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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 22. 실낙원의 비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산책 - 22. 실낙원의 비가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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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실낙원의 비가(悲歌)

 

 

1.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한나라 때 악부시 해로(薤露)는 풀잎 끝에 맺힌 이슬만도 못한 인생을 이렇게 노래한다.

 

薤上露 풀잎 위에 이슬
何易晞 너무 쉽게 마르네
露晞明朝更復落 내일아침 이슬은 다시 내리겠지만
人死一去何時歸 한 번 떠난 사람은 돌아올 줄 모르누나

 

고대 중국인들이 상여 메고 나갈 때 덧없는 인생을 슬퍼하며 불렀다는 노래다. 중국 위진 시대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과 마주하게 된다.

 

人生奇一世 奄忽若飄塵 인생이란 한세상 더부살이라 덧없이 흩날리는 티끌일레라

 

出郭門直視 但見丘與墳 성문 나서 똑바로 눈뜨고 보니 뵈느니 언덕과 무덤뿐일세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사는 해 백년을 못 채우건만 언제나 천년 근심 풍고 사누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난세를 살아가는 전전긍긍을 서글퍼했다.

 

人生若塵露 天道邈悠悠 인생은 티끌이나 이슬 같은 것 천도만이 아득히 유유하도다

 

終身履薄氷 誰知我心焦 일생 동안 살얼음을 밟는 듯했지 속 타는 맘 그 누가 알아주겠나

 

그러고 보면 죽림의 청담(淸談)이란 것도 세상일에 초연한 방약무인(傍若無人)이기보다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에 가깝다 하겠다. 이때 죽림은 현실의 폭력이 미치지 않는 정치적 진공지대일 뿐이다. 도연명도 이런 비탄을 금하지 못했다.

 

人生似幻化 終當歸虛無 인생이란 마치도 꿈과 같은 것, 종당에는 허무로 돌아가거늘.

 

이백(李白)은 다음과 같이 찌든 삶의 근심 끝에 아예 산발하고서 세속을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다.

 

抽刀斷水水更流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擧杯消愁愁更愁 잔 들어 맘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人生在世不稱意 인생살이 사는 동안 뜻 같은 일 없었지
明日散髮弄扁舟 내일은 머리 풀고 쪽배 타고 떠나리

 

당나라의 진자앙(陳子昻)은 다음처럼 노래하였다.

 

前不見古人 전날의 고인은 볼 수가 없고
後不見來者 장차 올 뒷사람도 보지 못하네.
念天地之悠悠 천지의 아득함 생각노라니
獨愴然而涕下 나 홀로 구슬퍼 눈물 흐른다.

 

 

 

 

2.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질식시킨다.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꿈꾼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어떤 갈등도 없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고 충만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그렇듯이 슬프고, 인간은 그렇듯이 나약한 존재인가?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시인들은 무의식의 저편에 저장된 언젠가 떠나온 곳,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꿈의 세계이다.

 

유선시(遊仙詩)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것은 아득한 은하수 저편 아홉 층의 하늘을 지나 있는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황금 궁전이거나 동해 너머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거대한 여섯 마리 거북이가 등에 업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상상의 섬 삼신산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서쪽 하늘 저편 아득한 그곳 하늘에 맞닿을 듯 솟아 있는 옥으로 된 곤륜산, 둘레엔 새의 깃털조차 가라앉아버린다는 약수(弱水)란 강물이 300리에 걸쳐 흐른다. 날개가 아니고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곤륜산 정상에는 요지(瑤池)란 연못이 있어 밤에 천상에서 신선들이 용이나 기림 또는 봉황을 타고 내려온다. 그곳의 주인 서왕모(西王母)가 주재하는 파티에 간다. 안주는 한 알을 먹으면 3,000년을 살 수 있다는 반도(蟠桃)1,000년쯤 너끈한 안기생(安期生)의 대추다 술은 옥()을 녹여 고은 경장(瓊漿) 또는 안개의 수분을 빚어 걸러낸 유하주(流霞酒). 입은 옷은 동해의 곱 빛깔 무지개 실을 자아지은 옷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지은 옷이라 바느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은 이 요지의 잔치를 묘사한 요지연부(瑤池宴賦)를 남겼다. 그의 안내로 선계를 따라가 보자. 티끌세상을 버려두고 여덟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선계에 이른 나는, 곤륜산 요지에 올라 아침엔 옥룡타(玉龍唾)를 마시고 저녁엔 금아탕(金鴉盪)에 목욕을 하며 신선들을 벗 삼아 노닌다. 이런 중에 청조(靑鳥)는 서왕모의 도착을 알린다. 상서로운 무지개가 걷히면 백은의 화려한 궁궐이 모습을 드러내고, 영롱한 햇살이 비치자 황금방(黃金牓)은 광채를 말한다. 그녀가 요대(瑤臺)에서의 향기로운 꿈에서 깨어나 운모(雲母) 커튼을 걷으면 삼각형으로 머리를 묶은 봉황은 칠보로 짠 학창의(鶴氅衣)를 가져오고, 얼룩무늬 기린을 타고 걸음을 재촉하면 채란(彩鸞)이 끄는 수레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이를 타고 높이 올라 구름 깃발 나부끼는 곳에 도착한다. 빙설같이 흰 피부에 부용꽃 같은 수줍음을 머금고, 초승달 눈썹을 살짝 찌푸려 별 같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맞이한다. 서왕모는 내가 이곳과 삼생의 묵은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며 요지 곁에 옥으로 만든 자리를 펴고, 잔치를 베풀어 용의 육포 안주와 봉황의 골수로 빚은 술을 권한다. 천년 반도를 따오고 아홉 번 찐 기장(杞醬)을 내온다. 앞에선 선녀들의 멋들어진 춤이 펼쳐지고 오색구름 감도는 저편에선 맑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계화(桂花)는 떨어져 온 천지가 향기롭고 화풍은 건 듯 불어 패옥소리는 쟁그랑거린다. 이 아니 황홀한가! 심의는 반도부(蟠桃賦)의 서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悲生死之浮休兮 삶과 죽음 부질없음 슬퍼하면서
超塵寰以遠徂 티끌세상 벗어나 멀리 떠났네
跆上界之仙府兮 상게의 선부(仙府)까지 올라가서는
俯下土之積蘇 하토(下土)의 풀덤불을 굽어보았지
過瑤池以悵忘歸兮 요지를 지나서는 돌아옴도 잊으니
王母鉥余以啓途 왕모가 날 이끌고 길을 인도하였네
贐一顆之神核兮 한 알의 신령한 복숭아를 주는데
芳酷烈其誾誾 그 향기 은은하게 몹시도 짙었다오
漠處靜以咀嚼兮 가만히 받아서 씹어 삼키니
忽乎吾將返眞 문득 이 몸 진인으로 되돌아가서
紛仙仙而担撟兮 어지러이 두둥실 날아올라선
逴絶垠乎東溟 아득한 동해 바다 넘놀았다네

 

서왕모의 요지연에 참여하여 선도를 먹고 진인으로 되돌아가 티끌세상의 갈등을 훌훌 벗어던진 기쁨을 구가하는 대목이다. 이후 그는 선계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 직접 여러 곳을 두루 소요하며 노닌다.

 

선계의 광경은 어떠한가. 앞의 요지연부(瑤池宴賦)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모두 한데 모아 엮었다.

 

 

허난설헌 또한 선계인 광상산(廣桑山)에서 노니는 꿈을 깬 뒤 그곳 광경을 묘사했다.

 

 

을유년에 내가 상을 만나 외삼촌댁에 묵고 있을 때 일이다. 밤중 꿈에 바다 위의 산으로 둥실 날아올랐다. 산은 온통 구슬과 옥이었다. 뭇 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흰 옷과 푸른 구슬이 밝게 빛나 현란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무지개 구름이 그 위를 에워쌌는데 오색 빛깔이 곱고도 선명했다. 옥 샘물 몇 줄기가 벼랑 사이에서 쏟아지고, 콸콸 쏟아져 내리는 소리는 옥을 굴리는 것 같았다.

乙酉春, 余丁憂, 寓居于外舅家. 夜夢登海上山. 山皆瑤琳珉玉. 衆峯俱疊, 白璧靑熒明滅, 眩不可定視. 霱雲籠其上, 五彩姸鮮. 瓊泉數派, 瀉於崖石間, 激激作環玦聲.

 

스물 남짓 두 여인은 얼굴빛이 모두 빼어나게 고왔다. 하나는 자줏빛 노을 옷을 걸쳤고, 하나는 푸른 무지개 옷을 입었다. 손에는 모두 금색 호로병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와 내게 절을 올렸다. 굽이굽이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니 기화이초가 곳곳에 피었는데 이루다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난새와 학과 공작과 비취새가 옆으로 날며 춤을 추고, 숲 저편에선 온갖 향기가 진동하였다.

有二女年俱可二十許, 顏皆絶代. 一披紫霞襦, 一服翠霓衣. 手俱持金色葫蘆, 步屣輕躡, 揖余. 從澗曲而上, 奇卉異花, 羅生不可名. 鸞鶴孔翠, 翺舞左右, 衆香馚馥於林端.

 

마침내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동남쪽은 큰 바다라 하늘과 맞닿아 온통 파랬다. 붉은 해가 막 솟아오르니 물결이 해를 목욕시켰다. 봉우리 위 큰 연못은 아주 맑았다. 연꽃은 빛깔이 푸르고 잎이 컸고, 서리를 맞아 반나마 시들었다. 두 여인이 말했다. “이곳은 광상산이랍니다. 십주(十洲) 중에서도 으뜸이지요. 그대가 신선의 인연이 있는 까닭에 감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시를 지어 이를 기념치 않겠습니까.” 내가 사양하였으나 한사코 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절구 한 수를 읊조리자 두 여인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는 신선의 말씀이로군요.” 조금 있으려니 한 떨기 붉은 구름이 하늘 가운데로부터 내려와 봉우리 꼭대기에 걸리더니, 둥둥 북소리에 정신이 들어 깨어났다. 잠자리엔 아직도 연하(煙霞)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遂躋絶頂. 東南大海, 接天一碧. 紅日初昇, 波濤浴暈. 峯頭有大池湛泓. 蓮花色碧葉大被, 霜半褪. 二女曰: “此廣乘山也. 在十洲中第一. 君有仙緣, 故敢到此境, 盍爲詩紀之.” 余辭不獲已. 卽吟一絶, 二女拍掌軒渠曰: “星星仙語也.” 俄有一朶紅雲, 從天中下墜, 罩於峯頂, 擂鼓一響, 醒然而悟. 枕席猶有煙霞氣.

 

 

이 꿈이 깨고 나서 그녀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34구가 이랬다.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서리 달 찬 속에서 붉게 떠지네.

 

이 시가 시참이 되어 스물일곱의 나이로 그녀는 천상 백옥루로 훌훌 올라가고 말았다.

 

그녀의 대표작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이다. 천상 광한전의 백옥루가 완공되어 쓴 상량문이다. 이 글의 선계 묘사는 더욱 황홀해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요지의 잔치를 묘사한 한 대목만 살짝 들여다보자.

 

 

선인 쌍성(雙城)은 나전 피리를 불고 안향(晏香)은 은쟁(銀箏)을 쳐서 균천(鈞天)의 우아한 곡조를 합주한다. 완화(婉華)는 해맑게 노래하고 비경(飛瓊)은 공교롭게 춤추어 놀랍도록 신령스런 소리를 빚어낸다. 용 머리에다 봉황의 골수로 담근 술을 따라, 학의 등에 기린의 육포로 만든 안주를 받들어 올리니, 구슬 돗자리에 옥방석은 아홉 갈래 등불에 빛이 흔들리고, 푸른 연밥과 얼음 같은 복숭아에는 여덟 바다의 그림자가 쟁반에 가득하다.

雙成鈿管晏香銀箏, 合鈞天之雅曲. 婉華淸歌飛瓊巧舞, 雜駭空之靈音. 龍頭瀉鳳髓之醪, 鶴背捧麟脯之饌, 琳筵玉席, 光搖九枝之燈, 碧藕氷桃, 盤盛八海之影.

 

 

용의 두개골로 만든 주전자에 봉황의 골수로 담근 술, 학의 등뼈로 만든 쟁반에 기린의 육포로 만든 안주. 어디 그뿐인가. 한 알만 먹으면 3,000년을 산다는 복숭아도 있다.

 

 

이수광(李晬光)기몽(記夢)이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紫宮半夜群仙會 자궁(紫宮)의 한밤중 신선들 모여들어
群仙色喜迎我拜 기쁜 낯빛 신선들 날 맞아 절 올리네
坐我堂中七寶床 방 안의 칠보상(七寶床)에 나를 앉게 하나니
怳然身入靑蓮界 아득히 이 몸이 청련계(靑蓮界)에 들었구나
餉我一杯船若湯 반야탕을 한 잔 따라 나를 마시게 하며
云是玉帝之瓊漿 옥제께서 드시는 경장(瓊漿)이라 일러주네
啜罷精神頓淸爽 마시자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洗盡十年塵土腸 진토에 찌든 속을 깨끗이 씻어준다
庭前有爐烟細起 뜰 앞의 화로에서 가는 연기 일더니만
令我了悟三生事 삼생의 온갖 일들 깨치게 하는구나
瑤空笙鶴覺來失 요대 허공 생() 불던 학, 깨어보니 간 곳 없고
萬里烟霞造夢裏 만 리 가득 안개 또한 꿈속의 일일레라
海上逢萊久無主 바다 위 봉래산엔 오랫동안 주인 없고
樂天偶餉人間苦 백낙천은 인간 괴롬 실컷 만나 겪었다오
唯須作急理歸笻 돌아갈 지팡이를 서둘러 만들리라
東風吹老三花樹 시든 삼화수를 봄바람이 불어가네

 

전형적인 몽유(夢遊) 구조에 의한 유선시(遊仙詩)이다. 꿈에 문득 자궁(紫宮)에 이끌려간 그는 여러 신선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옥례천(玉醴泉)의 경액(瓊液)을 달여 빚었다는 반야탕(般若湯)을 마시고 속세에 찌든 속이 깨끗해지는 환골탈태를 경험한다. 대궐 앞 화로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 연기는 전생과 현생과 내세의 일을 모두 환히 보여주지 않는가. ! 내가 봉래산을 너무 오래 방치해두었던 것은 아닐까. 봉래산을 떠나와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겪었던 것은 신맛 나는 인간고(人間苦)’ 뿐이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원래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자.

 

선계의 형상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역으로 투사되어 열린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 결과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무의식이 열린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작자 미상, [신선 세계의 복숭아], 19세기

 

 

3. 구운몽, 적선의 노래

 

 

구운몽(九雲夢)에서 구운(九雲)’은 무엇을 상징할까? 혹자는 양소유(楊少遊)와 팔선녀(八仙女)의 사랑 이야기이니, 결국 아홉 사람의 구름 같은 꿈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박사가 1922년에 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The cloud dream of nine’이라 한 것은 이러한 이해의 좋은 증거다. 초기 도쿄 경전의 하나인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천상 선계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이 가운데 태하(太霞) 가운데 성대한 집이 있는데 백기(白氣)를 맺어 서까래를 얹었고, 구운(九雲)을 한데 모아 기둥을 세웠다.”는 구절이 있다. 이때 구운은 아홉 가지 영롱한 빛깔의 구름을 뜻한다. 신선이 거처하는 장소의 의미로도 쓴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金萬重)보다 앞선 시기의 시인 권필(權韠)가슴에 구운에의 뜻을 품었네[胸次九雲夢].”라고 노래 한 바 있다. 구운몽이 양소유와 팔선녀를 합쳐 아홉 명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구운몽(九雲夢)신선 세계를 향한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유선적(遊仙的) 상상력이 빚어낸 도교적 깨달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팔선녀의 상전은 남악형산(南嶽衡山)의 위부인(魏夫人)이다. 그녀는 자허원군영상진사명남악위부인(紫虛元君領上眞司命南嶽魏夫人)이란 긴 이름을 지닌 도교 두 번째 위계의 여신격(女神格)이다. 천지의 주재자인 원시천존(元始天尊)에 버금간다. 성진(性眞)은 인간 세상에 귀양 와 양소유란 이름으로 태어난다. 이름 그대로 인간에서의 삶이란 성의 진체를 깨닫기 위해 소유(少遊)’, 즉 잠깐 놀다 간다는 의미일 뿐이다.

 

구운몽(九雲夢)뿐 아니라 대부분의 고전소설 주인공은 전생이 신선이거나 선녀이다. 그들은 천상에서 죄를 지어 인간에 귀양 온다. 그때 마침 지상에서는 늦도록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백일치성을 드리게 되고, 그 정성에 감응하여 죄를 지은 신선은 그 집에 늦게 얻은 자식으로 태어난다. 잠깐 다복했던 유년을 뒤로하고 조실부모한 주인공은 버려져 거지가 되거나, 삼촌 집에서 갖은 구박을 받다가 가출한다. 전염병에 걸려 다 죽게 된 절체절명의 순간 도사나 도승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도사에게서 둔갑술과 검법과 병법을 전수받은 주인공은 마침내 천상의 비범성을 회복한다. 그는 때마침 쳐들어온 외적을 물리쳐 나라에 공을 세우고 행복하게 살다가 천상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이른바 군담소설 또는 영웅소설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이런 예들에서 우리는 도교적 상상력이 옛 선인들의 삶 속에서 지녔던 의미를 헤아려보게 된다.

 

송강 정철(鄭澈)관동별곡(關東別曲)후반부에 다음 구절이 있다. “꿈에 한 사람이 날다려 닐온 말이 그대로 내 모르랴 상계(上界)의 진선(眞仙)이라. 황정경(黃庭經)일자(一字)를 어찌 그릇 읽어두고 인간(人間)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는가.” 여기서도 어김없이 자신을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라고 여기는 적선의식(謫仙意識)이 나타난다. 천상의 신선이 인간 세상에 귀양 오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신선들은 아침마다 옥황상제 앞에서 황정경(黃庭經)을 암송해야 하는데, 잠깐 정신이 딴 곳에 팔려 한 글자만 오독해도 귀양 사유가 된다. 그 밖에도 구운몽(九雲夢)의 성진처럼 하라는 심부름은 안 하고 팔선녀와 놀아나다가 들통이 나서 귀양 오는 경우도 있다. 벌을 받아 귀양 온 처지이니 그 인생은 괴로운 시련의 연속일 뿐이다. 자신을 귀양 온 신선으로 내세우는 심리의 이면에는 고통뿐인 현세를 합리화하려는 심리 기제가 작용한다.

 

 

華表柱鶴不來 화표주 위로 학은 오지 않고
遼山日暮歸雲靑 요동 땅 저문 날엔 구름만 푸르도다
當時學仙倣生死 그때에 선도 배워 생사 하찮게 여겼어도
故國歸來有愴情 옛 땅이라 돌아와선 슬픈 정만 있었다오
而吾未了齊物義 내사 여태 제물의 뜻도 깨치지 못했건만
到此轉覺悲浮生 예 와서 외려 뜬 인생 슬픔 깨닫누나
亦有多小曾知情 또한 정을 품었던 이 많이도 있으리라
蓬萊元自蓮渤海 봉래산은 원래부터 발해에 있었거니
安得跨鶴尋仙扄 어이해야 학을 타고 선계를 찾아볼까
松江居士謫仙人 송강 거사께서는 귀양 온 신선이라
往年按節遼陽城 지난해에 요양 땅에 사신으로 왔다네
題詩弔古多感慨 옛 조문해 지은 시는 감개함 많았어도
旋駕飇輪朝帝庭 수레를 돌이키어 황제께 조회했지
人間擾擾竟何有 인간 세상 시끄러워 다시 어이 있으리오
更莫錯讀黃庭經 다시는 황정경을 잘못 읽지 마시구려

 

이춘영의 화표주차송강운(華表柱次松江韻)5수 중 첫째 수이다. 요동 땅 화표주에 얽힌 옛 신선 정령위의 고사에 가탁하여 세상을 떠난 송강 정철(鄭澈)을 추모했다. 요동 사람 정령위는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다. 뒤에 800년 만에 다시 학이 되어 요동으로 돌아오니, 예전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무덤만 빽빽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허공을 배회하며 슬피 우짖고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덧없는 인생, 그나마 현실은 좌절과 질곡의 연속일 뿐이다. 육침(陸沈)의 갈등 속에서 선계를 향한 강렬한 동경은 자연스레 유선(遊仙)을 향한 욕망을 낳는다. 나아가 자신의 불우를 지상선(地上仙)의 통과의례 같은 고통으로 인식하는 적선의식을 낳는다.

 

少隨安期子 海上遊蓬萊 젊어선 안기생을 따라나서서 바다 위 봉래산을 노닐었다네.
同坐若木陰 共食棗一枚 같이 약목(若木)의 그늘에 앉아 둘이 함께 대추를 한 알 먹었지.
謂言半餉間 安知時劫類 한 끼 먹을 사이라고 말을 하지만 오랜 세월 흘렀음을 어찌 알리오.
當時棄棗核 聞巳撑月窟 그때에 버렸던 대추의 씨가 어느새 월굴(月窟)을 찌른다 하네.
仙家事闊絶 與世殊軌轍 선가(仙家)의 일이야 아득만 하여 세상과는 자취를 달리 하누나.
安得臥蓬闕 千秋復萬春 어이해야 봉래궁에 돌아가 누워 천추만추 긴 세월을 누리어볼꼬.
俯見扶桑海 十度掦沙塵 부상의 동쪽 바다 내려다 보면 모래 먼지 자옥이 날리는 구나.

 

권극중(權克中, 1585~1659)무제(無題). ()나라 때 신선 안기생(安期生)은 동해지방에서 약을 팔고 있었다. 진시황이 산동지방을 돌다가 그를 만났다. 그는 적옥(赤玉)의 신발 한 켤레를 남겨두고 뒷날 봉래산으로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나버렸다. 시에서 시인은 자신이 안기생과 더불어 봉래산 약목(若木)의 그늘에 앉아 불사의 신령스런 대추를 나눠 먹던 신선이었다고 밝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득한 세월이 흘러 이제 티끌세상에서 다시 돌아갈 날을 헤어보는 착잡한 심회를 보였다. 옛 신선 안기생과의 동일시는 진세에서 새삼 느끼는 선계와의 거리감을 더욱 아득하게 만든다. 이 거리감의 사이에는 그때 버린 대추씨가 자라 달까지 도달할 정도의 시간이 가로놓였다.

 

이러한 관념의 밑바닥에는 개인의 힘의 한계를 훨씬 웃도는 현실에 대한 우울한 비관주의가 가라앉아 있다. 스스로를 적선으로 생각할 때 유선 행위는 언젠가 자신이 속해 있었던 잃어버린 낙원, 또는 본향으로의 귀환이며, 동시에 불완전한 현재에서 완전했던 과거로의 회귀라는 성격을 띤다.

 

 

 

 

4. 이카로스의 날개

 

 

유선시에는 선계에서 노니는 도중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하계조감(下界鳥瞰)의 묘사가 자주 나온다. 김시습(金時習)능허사(凌虛詞)중 한 수다.

 

朝餐沆瀣暮流霞 아침엔 항해(沆瀣) 먹고 저녁엔 유하(流霞)로세
須信凌處有作家 허공 걷는 사람 있음 모름지기 믿을레라.
下視塊蘇嗟渺渺 굽어보니 땅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大鵬飛少蠛蠛多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 우글댄다.

 

人間無地不風波 인간 세상 어디에도 풍파 없는 곳이 없어
八翼凌風是大家 날개 달고 바람 타니 큰 집이 여기 있네.
下界蜉蝣寰宇窄 하계엔 하루살이 온 세상에 가득한데
塵埃萬丈贐君何 만 길이나 쌓인 먼지 그댈 속임 어찌하리.

 

이렇듯 유선사에서 하계는 하루살이만 득실대고, 풍파 잘 날이 없으며, 만 길이나 없으며, 만 길이나 쌓인 먼지가 시야를 흐르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티끌만 자옥하고, 급류 속에 온갖 잡귀가 질주하며, 온갖 근심이 인간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곳에서의 갈등을 떠올리고 하게의 존재 양태를 무의미하고 왜소한 것으로 비하시킴으로써 선계에서 노니는 기쁨을 극대화하려는 의식의 과정이다. 동시에 이는 현세의 갈등과 좌절에 대한 자기 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하늘 위 광한전을 노닌 꿈을 깨고 나서도 꿈속에서와 같은 득의의 시간이 현세에까지 지속되기를 열망한다. 현세에서 득의가 주어졌더라면 이들은 결코 선계를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하계를 향한 혐오감의 표현은 반동형성에 의한 양가감정의 투영이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신체는 미화되고 하계의 모습은 일그러져 나타난다.

 

白雲入大梁 出自蒼梧山 흰 구름 대량(大梁)으로 들어가더니 창오산으로부터 피어나누나.
仙人白雲裏 俯視天地間 선인은 흰구름 그 속에 들어 하늘과 땅 사이를 굽어본다네.
汲汲名利輩 車馬相往還 세속의 명리에 급급한 무리 수레와 말 왔다갔다 부산스럽다.
黃鵠絶四海 壤蟲焉能攀 황곡(黃鵠)이 사해를 막고 있으니 땅의 벌레 어이해 오를 수 있나

 

정두경(鄭斗卿, 1597~1673)유선사(遊仙詞)11수 가운데 한 수다. 흰 구름을 타고 하계를 굽어보는 선인과, 명리에 급급하여 부산스런 하루살이 같은 무리가 대립한다. 자신을 저 높은 하늘 위로 올려놓고, 먼지 자욱한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것만으로도 현세의 온갖 시름과 걱정은 말끔히 사라진다.

 

그러나 꿈은 깨게 마련이고, 자아는 결국 변한 것 없는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몽중 유선의 과정에서 더욱 확대된 세계와의 괴리 앞에 다시 직면한다. 탈출은 좌절의 새삼스런 확인일 뿐이어서 현실과의 불화나 첨예한 긴장 상태를 해결할 어떤 대안도 마련해주지 못한다.

 

 

夜夢靑童引我去 밤 꿈에 푸른 동자 나를 끌고 가더니만
忽到雲霞最深處 어느새 구름 안개 자옥한 곳 이르렀지.
仙樂風飄自帝所 신선 음악 궁궐에서 바람결에 들려오고
玉樓十二高入天 백옥루 열두 기둥 하늘까지 솟았네.
五色靄靄煙非煙 오색구름 뭉게뭉게 안개인 듯 아닌 듯
攝身飛上身飄然 몸 떨쳐 날아올라 몸이 나부끼는 양.
金支翠蓋相後先 황금 자기 비춰 일산 앞뒤로 벌여 있고
左右環佩羅群仙 좌우론 패옥 두른 신선들 늘어섰네.
余乃長跪玉皇前 옥황상제 앞에서 내 길게 무릎 꿇고
焚香敬受長生編 향 사르며 공경스레 장생편을 받으니
一讀可度三千年 한 번만 읽어도 삼천 년을 산다 하네.
簷間語燕聲呢喃 처마 사이 제비는 지지배배 재잘대고
破窓透雨寒𩁺𩁺 부서진 창 비 새어 찬 기운 스멀스멀.
招魂不復煩巫咸 넋 부름에 무함(巫咸)을 번거롭게 할 것 없네.
此身兀兀仍世間 이 몸 변함없이 세간에 있는 것을.
眼前萬事頭欲斑 눈앞에 온갖 일에 터럭만 세려 하니
幾時長往巢神山 언제나 길이 가서 신선(神仙)에 깃들거나.

 

권필(權韠)기몽()이다. 꿈에 청의동자의 안내로 상계에 올라 군선(群仙)이 둘러싼 가운데 옥황으로부터 장생편(長生編)을 받았다. 한 번만 읽어도 3,000수를 한다는 그 장생편을 막 읽으려는데 창밖 처마 밑에서 재잘대는 제비 소리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백옥루의 웅장한 광경과 늘어선 군선의 장관이 깨진 창으로 찬 기운이 스멀스멀 돋아나는 방 안으로 급강하되면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렿나 장식의 황금 궁궐이나 신선의 음악소리가 아니라 눈앞의 온갖 근심뿐이다. 심의가 지은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의 각몽 대목도 이와 유사하다.

 

 

이색이 등을 어루만지며 좁은 방으로 데려갔다. 나를 난탕(蘭湯)에 목욕시키고는 금도(金刀)로 배를 갈라 먹물 몇 말을 들이부으며 말했다. “마땅히 40여 년을 기다려 다시 이곳에 와 함께 부귀를 누릴 터이니 근심하지 마시오.” 배가 동그랗게 불러오더니 칼로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배는 불러 북과 같고, 가물거리는 등불은 꺼지려 하고, 병든 아내는 누워 끙끙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환상적 장관과 득의에 찬 날들은 간데없고, 비가 새어드는 창과 병든 아내의 신음만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뿐이다.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선계로의 비상은 이카로스(Icarus)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그리스ㆍ로마신화에 나오는 그는, 날개를 만들어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올랐다가 날개가 녹아 떨어져 죽었다. 한계를 초월코자 하는 비상의 욕구는 결국 죽음의 징벌을 부르고 말았다.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 해서 선계를 향한 꿈 자체를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현될 수 없다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유선의 과정에서 만끽한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해방감은 세속적 가치의 무의미함과 인간 존재의 왜소함을 새삼 인식케함으로써 현실의 불우와 모순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준다.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꿈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개조는 있을 수 없다.” 김현의 이 말은 바로 유선시에서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의 혈관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상징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호들을 유선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고구려 5회분 4호묘 고분벽화 가운데 학과 용을 탄 신선.

학을 탄 신선과 용을 탄 신선이 젓대를 불며 두꺼비를 지키는 월굴(月窟)을 향해 간다. 흰 관을 쓴 사람이 무덤의 주인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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