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묻어나는 시와 그걸 알아보는 사람
『소화시평』 권하 19번의 에피소드는 바로 이런 ‘조회수 높은 글 VS 쓰고 싶은 글’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아주 서두를 파격적으로 열어젖히고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란 진실한 사람이 아니며, 모두가 좋아하는 글이란 지극한 글이 아니다[爲人而欲一世之皆好之, 非正人也; 爲文而欲一世之皆好之, 非至文也]’라고 말이다. 이 말에 나는 충분히 동의한다. 애초부터 ‘모두가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에선 불가능한 환상에 가까운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설혹 천만 영화와 같이 대다수가 보는 좋아하는 영화가 나왔을지라도 그건 그 당시의 시대상황, 영화관 여건 등이 전체적으로 고려된 결과치일뿐, 작품의 질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어떤 글 한 편을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면, 그땐 정말 자신의 글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해봐야 할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나만이 쓸 수 있는 개성적인 글이 아니라 아주 평이한 수준의 무색무취한 글이 나왔다는 얘길 테니 말이다.
나그네와 장유의 일화는 글의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나그네는 최립이 쓴 시를 마치 자신이 쓴 것인 양 장유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장유는 그 시를 한참동안이나 읽더니 나그네가 지을 수 있는 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나그네와 여행을 한 시기와 시에서 나타난 시기는 엄연히 다르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일출을 읊은 시들 중 단연 으뜸이기에 나그네가 지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러자 나그네는 그런 장유의 감식안에 탄복하며 결국 최립의 작품임을 실토하고 만다. 그러자 장유는 강인하고 굵게 한 마디 한다.
“이 어르신이 아니라면 이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네[非此老, 不能道此語].”
이 일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무색무취하게, 특히나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대중 취향에만 맞는 글을 쓰려 할 게 아니라, 지금 니가 관심에 있는 것, 그래서 너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라는 내용이니 말이다. 그렇게 썼을 때 너만이 지닌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반대로 나의 글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뭐 이딴 글을 쓰냐’고 비난을 퍼붓더라도 그런 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홍만종은 이 일화를 소개하며 장유가 그토록 감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모든 사람이 좋아할 만한 시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바로 홍만종의 이 이야기야말로 요즘처럼 창작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크리에이터(creator)가 되는 시대에 정말 필요한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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