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건 외교뿐
고구려의 남진정책이라고 하면 대뜸 장수왕(長壽王)이 떠오르지만 앞서 본 것처럼 고구려가 남쪽의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한 시기는 상당히 오래다. 일찍이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랴오둥과 낙랑을 함께 공략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처음부터 서쪽의 랴오둥만이 아니라 남쪽의 한반도도 전혀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랴오둥이 생존에 필수적인 비타민이라면 한반도는 고구려의 성장을 돕는 단백질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늘 중국쪽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고, 남쪽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더욱이 낙랑이 멸망하면서 백제와 접경하고, 백제와 신라가 제법 살집이 붙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자 남쪽을 향한 고구려의 시선은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이래 고구려가 아직 불안정한 정세에서도 남행길을 서두른 것은 남쪽이 그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남쪽은 고구려에게 결코 따뜻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긴 했지만.
고국원왕 때 백제에게서 따뜻하기는커녕 뜨거운 맛을 본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중국 관계를 안정시키면서 남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고구려의 그런 낌새를 알아챈 남쪽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구려가 압박 전술로 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 이에 대해 백제와 신라의 두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정이 다른 만큼 두 나라의 해법은 다르다.
백제가 선택한 방법은 동맹을 구하는 것이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평생 씻지 못할 수모를 당한 아신왕(阿莘王)은 차라리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처럼 전장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으니 광개토왕 앞에서 맹세한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백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도움을 얻는 일도 쉽지 않다. 우선 동쪽을 돌아보지만 비류왕(比流王) 시절에 느슨한 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이미 고구려에게 붙어 있다.
고민하는 아신왕에게 유력한 동맹자로 중국의 동진이 떠오른다. 아닌 게 아니라 동진과의 관계는 각별한 데가 있다. 379년에 할아버지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이 처음 인사를 텄고 아버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 때는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가 와서 백제에 처음으로 당대의 첨단 문명인 불교를 전했다. 이때가 384년, 고구려보다 12년 늦었지만 고구려는 북중국의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입한 데 비해 백제는 그와 별도로 남중국 동진의 불교를 수입한 만큼 고구려에 뒤질 게 없다. 더욱이 당시 극동의 불교는 호국불교였으므로 국가 종교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고구려에서나 백제에서나 불교가 처음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었던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다【불교의 발생지는 인도였으나 기원전 2세기에 마우리아 제국이 붕괴한 이래 인도는 오히려 전통적인 힌두교로 복귀했고 불교는 동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런데 불교를 수용하는 데서도 그 전부터 정치적 편제가 확고한 동북아시아와 그렇지 못한 동남아시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소승불교 계열이 전래된 동남아시아에 비해 대승불교 계열에 속하는 극동의 불교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호국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호국불교 외에 밀교와 선불교의 계통도 전해졌으며, 이후에도 독자적인 종파가 생겨날 정도로 한반도에 비해서 훨씬 다양했다】.
그러나 선진 문물까지는 수입할 수 있어도 동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었다. 당시 동진은 남중국에서도 이미 저물어가는 해였으며(동진은 420년에 멸망한다), 북중국의 강성한 ‘오랑캐’ 나라들에 비해 약해빠진 한족 왕조였으니 백제에게 당장 절실히 필요한 물리력의 도움을 얻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은 다른 조력자를 구해야 했다.
그 다음 후보로 떠오른 것은 일본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서로 안면을 익혔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 그러나 현 위기를 타개하는 데 유일하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은 일본뿐이다. 해답을 찾았다 싶은 아신왕(阿莘王)은 황급히 397년에 일본과 정식 수교를 맺기로 한다. 태자까지 일본에 볼모로 보낼 정도였으니 그의 다급한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후 백제와 일본은 여러 차례 사신을 주고받으면서 돈독한 우애를 다진다. 비록 두 나라의 거리는 상당히 멀지만 가야라는 징검다리가 있어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당시 가야는 마치 오늘날의 자유무역항과 같은 일본 전용 무역기지를 두고 일본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백제와 일본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이 전문이었다【이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논리를 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그것인데 (임나란 금관가야를 가리킨다), 가야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은 가야에 일본과 거래하던 무역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 측 입장에서 확대ㆍ왜곡한 논리였기에 곧 설득력을 잃었다. 문제는 그런 억지 논리를 오늘날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도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백제가 산둥을 비롯한 중국 일부 지방에 무역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대ㆍ왜곡해서 백제가 마치 중국 동해안을 관장하고 황해 무역을 독점한 것처럼 주장하는 게 그 예다】. 백제는 일본의 물리적인 도움이 필요하고, 일본은 백제의 문화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사이란 이렇게 서로 부족한 점을 메워 주는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직스러운 관계로도 고구려의 기세를 막지는 못했다. 399년 아신왕(阿莘王)은 일본과 가야까지 총동원해서 연합군을 이루어 고구려 측으로 달라붙은 배신자 신라를 먼저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내물왕(奈勿王)의 SOS를 받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5만의 대군을 보내는 바람에 아신왕은 다시 자기 머리털을 쥐어뜯어야만 했다. 게다가 백제와의 연고 때문에 할 수 없이 출병한 가야는 내친 김에 본토까지 밀고 내려온 고구려 군에 의해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이것을 계기로 가야는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신라에 병합된다). 아신왕(阿莘王)은 그에 굴하지 않고 404년에는 왜군과 함께 대방의 수복을 꾀하지만, 결국 또다시 실패하고 그 이듬해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재위 기간을 마감한다. 아마 그는 하필이면 제갈량의 시대에 태어난 주유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불과 한 세대 전 증조할아버지(근초고왕)에게 자신과 똑같이 당한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그래도 아신왕(阿莘王)은 자신의 죽음으로 백제에 한 가지 선물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인즉슨 이렇다. 태자가 국내에 없는 탓에 일단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아신왕(阿莘王)의 동생인 훈해(訓解)가 섭정을 맡았다. 그런데 왕위에 뜻을 품은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형을 죽이고 조카가 계승할 지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는 태자에게 일본 왕은 100명의 군사를 붙여준다. 태자가 일단 사태 관망을 위해 해안 부근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쿠데타에 반대한 대신들의 손에 설례가 죽는다. 이렇게 해서 태자는 어렵사리 왕위를 되찾고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420)이 되었는데, 자신을 보호해준 일본 측에 고마워했을 것은 당연하다. 이래저래 백제와 일본은 더욱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뒤늦게 중국의 동진은 전지왕을 책봉한다느니 하면서 수선을 떨지만 백제가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416년에 동진의 안제(安帝)는 전지왕에게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내렸는데, 쉽게 말하면 ‘중국의 동쪽 변방을 담당하는 책임자’라는 뜻이다. 백제에게 필요한 군사적 도움을 주기는커녕 정치적 영향력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북중국의 ‘오랑캐’들로부터 자신의 안위마저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제왕에게 그런 벼슬을 내렸으니, 중국 황제의 배짱(?)도 어지간하다 하겠다. 현실이 어떠하든 명분상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중국 한족 왕조의 고유한 중화 사상이며, 유학에서 비롯된 정치 이데올로기다. 당시 중국의 왕조들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반도의 군주들에게 관작을 주고 책봉했다. 참고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400년에 후연의 왕에게 ‘平州牧遙東帶方二國王’으로 책봉되었고, 435년 장수왕(長壽王)은 북연에 스스로 책봉을 청해 ‘都督遙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遙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라는 직책을 얻었는데, 뜻은 전지왕의 직함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중국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는다. 일본이 허물없는 친구라면 중국은 부모 격이다. 누가 현실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지는 뻔하지만 필요없다고 해서 부모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백제는 그런 심정으로 당장에 별 쓸모도 없는 중국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춰 대한다. 장차 한반도 역사 1500년을 좌우할 사대(事大)라는 독특한 대중국 관계는 여기서 싹튼다. 이 점에 관해서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고 나중에 신라는 그보다 한술 더 뜨게 되는데, 민족적 혈통과 언어가 판이하게 다른 나라를 단지 대국이라 해서 이처럼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대단히 희귀한 경우다(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모두 중국 중심의 질서를 인정했으나 한반도 왕조들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경우는 없었다). 동진이 곧 무너지고 남중국의 주인이 송(宋)나라로 바뀌고 난 다음에도 백제의 사대는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곧이어 장수왕(長壽王)의 고구려군이 코앞에 닥칠 무렵까지는.
▲ 가야의 운명 삼국시대 초기, 그러니까 사진의 고분들에 가야의 왕들이 묻힐 때만 해도 가야는 백제, 신라와 어깨를 견줄 만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가야가 몰락한 이유는 일찍부터 해상 진출에 주력하느라 상대적으로 육로로의 영역 확장을 게을리 한 탓이다. 철광산이 많고 바다에 면해 있다는 이점이 오히려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 된 셈이다. 어쨌거나 그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가야는 일찌감치 한반도 바깥의 문명을 접했으며(불교도 삼국보다 먼저, 그것도 인도로부터 직수입했다는 설이 있다), 자연히 일본과도 교역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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