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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삼한, 유리왕, 대무신왕, 낙랑공주)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삼한, 유리왕, 대무신왕, 낙랑공주)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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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

 

 

앞서 고조선이 멸망하면서부터 한반도 역사는 독자적 정체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중국 역사와의 관련성도 한층 커지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고대 삼국이 신화로나마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달라진 덕택이 크다. 어떤 변화일까?)

 

4을 설치한 무제의 시대는 한나라의 최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이기도 하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이것은 중국 역대 왕조들의 기본 코스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은 건국한 뒤 초기에는 불안정하게 유지되다가 50년쯤 지날 무렵에 유능한 황제(이를테면 한 무제, 당 태종, 명나라의 영락제)가 등장해서 기틀을 잡고는 곧바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 200여 년쯤 더 지나면 멸망하는 게 공식이다. 그 점에서도 한나라는 중국식 제국의 전형을 확립한 셈이다. 무제는 화려한 대외 정복 이외에도 역법을 통일하고, 유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재정정책을 시행하는 등 내치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올렸으나 한 가지 고질적인 중국병남겼는데, 그건 바로 외척과 환관이 발호하는 것이었다. 외척과 환관이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있었지만, 그들이 병폐로 등장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다. 왜 그럴까? 통일 제국은 천자, 즉 황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국사를 황제가 처리할 수는 없는 일, 따라서 황제는 측근을 중용하게 되는데 황제가 가장 믿을 만한 가까운 측근이라면 바로 외척과 환관이 아닌가?

 

아무리 무제가 유학을 장려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유학에 뿌리를 둔 사대부가 관료 집단을 이룰 수 있는 사회 체제는 아니었다(이는 기원 후 6세기에 과거제(科擧制)가 생기면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유능한 황제가 연이어 등장하지 않는다면 모든 권력은 결국 외척과 환관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다시피 카리스마란 유전되는 게 아니다. 결국 외척과 환관들이 황실을 주름잡기 시작하면서 한나라는 점차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중앙정부가 이 모양이니 자연히 변방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한반도에 고대 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조건 덕분이었다. 앞서 본 것처럼 4이 둘로 축소되었다가 결국에는 낙랑군만 한반도에 남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낙랑군마저도 본국과의 통신이 거의 두절된 채 독립국처럼 행세하게 된다. 낙랑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우선 이름부터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한편 수렁에 빠진 한나라는 쉽게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다 급기야 기원후 9년에는 외척인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이라는 자가 황실을 주무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름도 새롭고 신나게 신()나라다. 이것으로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는 일단 멸망한다. 신나라는 불과 몇 년 가지 못하고 기원후 23년에는 다시 한 황실이 복원되지만, 한 번 스타일을 구겼던 한나라는 과거와 같은 동아시아 질서의 강력한 중심이 되지 못한다(중국사에서는 이 새로운 한나라를 후한後漢, 그 전에 있었던 오리지널 한나라를 전한前漢이라 부른다).

 

 

이러한 한나라의 위상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삼국 중에서도 단연 고구려다. 사실 말이 삼국시대지 당시 백제와 신라는 간신히 역사에 명패만 올려놓았을 뿐 나라라 할 것도 없는 처지였다(후대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백제와 신라라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고구려에 비해 대륙 문명권에서 먼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는 그때까지 국가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보잘것없는 부족연맹체들이 난립하면서 문명적으로도 후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없을지 모르니 이 참에 반도 중부와 남부를 간단히 개괄하고 나서 고구려의 활약상으로 넘어가자.

 

건국신화는 백제와 신라의 것만이 전해지지만 두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는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수천 호의 가구로 이루어진 데 불과하니까 오늘날의 군이나 읍 정도의 규모로 여기면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를 연상하면 알기 쉽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했듯이, 한반도의 폴리스들도 서로 얽히면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었다. 그 연맹체를 대충 가름하면, 오늘날 충청도와 전라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마한(馬韓), 경상도 지역에는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이 있었다이것을 합쳐 삼한(三韓)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사기(史記)한서(漢書)등의 중국 측 사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세 개의 한국은 서로 간에 서열을 짓지 못하고 병립하는 데 만족했을 뿐이므로 나중에 이 지역의 정치적 통일은 연맹체 자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연맹체에 속한 백제와 신라라는 도시국가가 주도하게 된다.

 

그에 비해 고구려는 그와 차원이 다른 국가였다. 물론 고구려도 아직 일정한 강역을 지니는 영토국가는 못 되었고 각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연맹을 이루고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초기부터 하나의 국가로서 결집된 행동을 취할 정도의 위상은 뚜렷이 지니고 있었다. 다만 변수는 중국이다. 한나라는 비록 중앙정부가 약화되고 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국이었으므로 신생국 고구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주몽의 아들 유리왕(琉璃王, 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 대에 도성을 졸본성에서 더 후방인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오늘날 중국 지린성의 지안集安)으로 옮긴 것은 일단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어차피 고구려의 장기적 생존은 적어도 한나라의 동북쪽 변방, 특히 랴오둥을 물리치지 못하면 보장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마침 왕망(王莽)의 집권 시기를 거쳐 후한이 들어서자 그 혼란을 틈타 고구려는 즉각 생존과 성장을 위한 작전 개시에 나선다당시 중국의 정세 변화를 포착하는 고구려의 순발력은 놀라울 정도다. 유리왕 시절에 이미 고구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중국이 예전 같지 않다는 기미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나라의 왕망(王莽)은 기원후 12년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려 한 적이 있다. 그때 유리왕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병사들은 중국의 동원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쳐 버린다. 그리고 그들을 응징하기 위해 추격하던 랴오시(遼西)의 한나라 군이 오히려 역공을 받아 전멸한다. 고구려가 이렇듯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왕망(王莽)의 집권이 불안정하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일 터이다.

 

주인공은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이다. 열다섯 살에 아버지 유리왕의 뒤를 이은 그는 곧바로 부여를 공략하여 멸망시킴으로써 할아버지 주몽의 원수를 갚는 것으로 정복사업을 출범시킨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비롯된 과거의 뿌리와 숙제를 모두 해결하고 완전한 새 나라로 정비됐다. 여세를 몰아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압록강 상류를 손에 넣고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영토를 크게 키운다. 이제 고구려는 낙랑과 한반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쟁패할 만큼 힘을 길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진출 방향은 남쪽의 낙랑이 아니라 북쪽의 랴오둥이다. 낙랑은 이미 한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으므로 고구려에게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랴오둥은 신생국 고구려의 생존을 위해 일단 제압해 놓아야만 했다. 한편 랴오둥 태수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가 부여를 마음대로 정복한 행위는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그래서 28년에 태수는 고구려를 선공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미 고구려의 기세는 욱일승천하는 중이었다. 결국 그는 본전도 건지지 못했고, 고구려는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마저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그래도 그 경험은 북으로 향하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차 고구려가 제국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세 불리기. 그렇다면 적절한 타깃은 남쪽에 있는 낙랑이 될 수밖에 없다. 북수남진(北守南進), 즉 북쪽을 수비하고 남쪽을 공략한다는 방침은 나중에 전성기 고구려의 기본적인 대외 노선이 되지만 원조는 바로 대무신왕 때 생겨난 것이다. 그에 따라 32년부터 대무신왕은 방향을 급선회하여 낙랑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데, 그 과정은 유명한 호동왕자 이야기로 전해진다. 자명고만 멀쩡했더라면! 아니, 낙랑공주가 호동의 꾐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받은 낙랑은 간신히 명패는 유지했으나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후 낙랑은 313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삼한 사이에서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기병의 기동력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갑기병이 없었다면 남으로 낙랑을 압박하고 북으로 랴오둥을 공략하는 대무신왕의 뛰어난 기동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낙랑공주를 배신한 호동도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림에 보이는 무사 같은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마이너 역사

새 역사의 출발점

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

고구려의 성장통

물보다 흐린 피

포위 속의 생존

이주민 국가

세 편의 건국신화

미스터리의 세기

마지막 건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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