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원래 광개토왕(廣開土王)은 한반도를 평정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철갑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대와 더불어 탁월한 전략적 감각을 지닌 그가 왜 중국 대륙이라는 넓은 천하를 외면했을까? 여기에는 고구려의 역대 대중국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이 참에 그때까지 400년간 고구려가 취해온 대외 노선의 변화를 정리해보자.
건국 이후 고구려는 우선 생존을 위해 팽창해야 했다. 사방에 크고작은 부족국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압록강변에서 탄생한 약소국 고구려는 팽창을 통해 어느 정도의 영토 확보를 이루어야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몽의 초기 정복사업과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태조왕(太祖王)에 이르기까지 랴오둥 세력과 벌인 다툼은 그 일환이다.
중국에서 후한이 무너지고 랴오둥에 공손씨 정권이 성립했을 때 고구려는 생존을 위한 팽창을 넘어 성장을 위한 팽창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래서 방어의 차원이 아니라 공격의 차원에서 랴오둥 서쪽을 넘본다. 하지만 그것은 위나라의 반발을 샀고, 결국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에 호되게 당하면서 고구려는 사실상 중국 진출의 꿈을 접는다(동천왕의 천도는 그것을 말해준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 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서열상의 우위를 인정하는 선에서 화친을 맺고 남쪽 한반도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노선 전환의 결실은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복이었고, 그 후유증은 백제의 반발과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전사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랴오둥이다. 오늘날 중국의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랴오둥은 태조왕(太祖王) 이래 고구려가 관할했지만 중국에게도 고구려에게도 변방이었던 탓으로 완전한 고구려의 영토라고는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랴오허(遼河) 서쪽, 즉 차오양(朝陽)이나 베이징을 중심으로 삼는 중국 왕조가 강성해질 경우에는 고구려가 랴오둥에서 밀려나고 약한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고구려가 랴오둥을 다시 차지하는 식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사라지고 분열기를 맞으면서 랴오둥 주변의 국제 정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임시 통일제국이었던 진나라가 317년에 강남으로 물러가서 동진으로 딴살림을 차린 뒤 화북, 즉 북중국 일대는 중원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제각기 나라를 세우고 패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다. 중국 역사에서 이것은 분열기이지만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팽창기이기도 하다. 한나라 시대 400여 년 동안 정치적 통일하에서 안정을 누림과 동시에 부패해 왔던 중국 문명은 분열기를 통해 팽창과 도약을 향한 계기를 맞는다【일찍이 1차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그랬던 것처럼 중국은 통일제국의 시대보다 분열기에 더 큰 발전을 이룬다. 1차 분열기에 유학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형성되었다면, 2차 분열기에는 이후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균전제(均田制)나 과거제(科擧制)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2차 분열기를 사이에 둔 두 통일제국, 즉 한나라와 당나라는 얼핏 비슷한 듯 보이지만 실은 커다란 위상 차이가 있다. 한나라는 유학을 공인했을 뿐이지만, 당나라는 균전제를 조세 및 토지제도로 삼고 과거제를 관리 임용제도로 삼아 한층 업그레이드된 유학 제국을 완성한다(한나라는 유학을 공인했어도 그것을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기에 외척과 환관들이 중앙정치를 주름잡는 폐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변화의 초점은 북방 민족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한족 문명권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북중국의 나라들이 랴오둥을 놓고 고구려와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선비족의 모용씨에게 시달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중국관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랴오둥의 서쪽까지만 중국으로 인정하고자 했다. 바꿔 말하면 랴오둥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해주는 중국 왕조라면 어느 나라든 기꺼이 서열상의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도였으므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백제를 정벌하고 나서 곧바로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그 중국은 30년 전 소수림왕(小獸林王)과 친교를 맺은 전진이 아니라 후(後燕)이었다. 전진에게 멸망당한 모용씨 세력이 권토중래(捲土重來) 끝에 다시 전진을 타도하고 연나라를 부활시킨 것이다. 외교 파트너가 옛 원수로 바뀌었으니 광개토왕도 떨떠름했을 테고 후연의 왕 모용성(慕容盛)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용성은 고구려 사신의 태도가 거만하다는 것을 트집잡아 400년에 고구려 공격에 나선다. 물론 그 배후에 숨은 의도는 랴오둥을 고구려에 할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하게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전직 어깨의 심기를 건드린 셈이 되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후연의 침략을 맞받아쳐서 오히려 랴오허를 건너 차오양 인근까지 공략한다. 고구려 역사상, 아니 한반도 역사상 군대가 랴오허를 넘은 경우는 그게 유일했다. 애초부터 랴오둥 확보만을 목표로 삼았던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힘을 한 번 시위한 다음 곧바로 철군했지만, 후연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거센 역공에 심신상의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마음의 충격이 워낙 커서 몸의 충격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이후 후연은 두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모두 실패하면서 407년에 결국 서쪽에서 일어난 새로운 위 나라, 즉 북위(北魏, 물론 원래 이름은 위인데 후대 역사가들이 ‘북위’라고 부른 것이다)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북위는 후연과 같은 선비족이었으나 모용씨와는 씨족이 다른 탁발씨(拓跋氏) 정권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성씨만 다른 게 아니어서 북위는 이후 100년 이상 6세기 중반까지 존속하는, 분열기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한 왕조가 된다. 북위가 화북의 패자로 오래 군림하면서 랴오둥은 고구려의 영토로 공인되었고 비로소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은 안정을 되찾았다. 따라서 이제 고구려는 모든 국력을 남부 전선에 기울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다음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나타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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