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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고국원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고국원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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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백제의 최전성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시대였다. 이 무렵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와의 해묵은 불화를 해소했고, 북쪽으로는 강국 고구려와의 실력 대결에서 승리했다. 게다가 서쪽 바다 건너로는, 비록 통일제국의 지위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중국의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동진과 수교했고, 남쪽 바다 건너로는 일본과도 친교를 맺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강대국의 면모다. 형세가 유리할 때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건 바둑만이 아니다.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것은 판을 닦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였다. 아마도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말은 일찌감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애초부터 고구려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로서는 고이왕(古爾王) 시절에 손에 넣은 옛 대방의 땅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3세기 후반에 고이왕은 대방과 낙랑을 공략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벌은 고구려만의 힘으로 이룬 성과가 아니었다. 그런만큼 낙랑이 무너진 뒤 무주공산이 된 이 지역을 백제가 고구려와 반분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처사며 정당한 권리 행사였다. 적어도 근초고왕의 생각은 그랬다.

 

물론 고구려의 생각은 달랐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한반도를 위협하는 한나라의 군현들과 싸워왔고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낙랑을 완전히 반도에서 몰아냈다. 따라서 백제의 대방 침략은 좋게 말해 어부지리(漁父之利)였고 나쁘게 말하면 무임승차였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전략이지만 고구려가 볼 때는 비열한 술책이며 인륜을 배반한 행위였다. 더구나 백제가 애시당초 고구려에서 갈라져나간 형제국임을 고려할 때 백제의 행위는 천륜을 배반한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생각은 그랬다.

 

이렇게 같은 상황을 두고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고국원왕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결국 양측이 자신의 판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쟁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사실 고국원왕은 진작부터 백제를 응징하고 싶었다. 그는 낙랑을 멸망시킨 이듬해, 미천왕(美川王)의 태자였던 시절에 이미 백제의 영향권이 되어 있던 대방을 공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369년까지 후속 조치를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주변 상황, 즉 중국의 변동 때문이었다.

 

 

317년 한족의 진나라가 강남으로 옮겨가서 동진으로 명패를 바꾸자 화북 일대는 북방 민족들의 세상이 된다. 이른바 5(五胡)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옛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자 전통적인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데, 그 중 고구려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앞서 보았듯이 선비족이다. 봉상왕 때부터 고구려를 괴롭힌 그들은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에는 아예 연나라를 세워 중원을 노리는 공식 대권후보로 등록한다. 옛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이것을 전연(前燕)이라 부른다(옛 왕조의 이름을 따는 경우는 중국 역사에서 대단히 흔한데, 전연이라 이름지은 이유는 나중에 후연이 생기기 때문이다). 랴오시의 차오양(朝陽)을 수도로 삼아 전연을 세운 모용씨 세력은 당연히 랴오둥까지 진출한 고구려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 이 지역에서 일어선 중국의 모든 나라가 그랬듯이 모름지기 대권을 노리기 위해서는 후방에 해당하는 고구려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낌새를 알아챈 고국원왕(故國原王)340년에 전연에 사신을 보내 친교를 꾀하고자 했으나 전연의 방침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국 342년에 전연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이끄는 55천의 공격군과 고국원왕이 이끄는 5만여 명의 수비군은 랴오둥의 패권을 놓고 대회전을 벌이기에 이른다. 병력의 규모로 보면 엇비슷했으므로 승부는 전략에서 판가름날 것이었다. 불행히도 고국원왕은 투지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전략에서 중대한 미스를 범한다. 랴오시와 랴오둥 사이에는 남과 북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보면 넓은 북쪽 길에 대병력을 배치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수비하는 고구려가 그 상식을 따른 데 반해 공격하는 연나라는 그 상식의 허를 찔렀다는 점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거의 전 병력에 해당하는 5만을 동생에게 주어 북쪽을 막게 하고 자신은 소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을 막으려 했지만, 모용황은 거꾸로 북쪽에서 15천의 병력으로 응전하게 하고 남쪽으로 주력군 4만을 보냈다. 남과 북에서 벌어진 두 차례 전투에서 고구려는 종합전적 11패를 올렸으나 전쟁은 무승부가 아니었다. 북쪽에서 고구려의 대군이 전연의 소군을 물리치고 있는 동안 남쪽으로 온 전연의 본군은 수도인 환도성을 유린하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포로로 잡아간 것이다. 더욱이 고국원왕으로서 통탄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아버지 미천왕(美川王)의 시신마저 파헤쳐 갔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원왕은 몇 년에 걸친 협상의 결과로 산 가족과 죽은 가족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전연을 상국으로 받들고 모용황의 아들 모용준(慕容儁)에게서 장군과 자사의 벼슬을 받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분노에 찬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목표는 한 가지, 어서 힘을 키워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을 갚는 것뿐이다. 그럼 어떻게 힘을 키울까? 바로 한반도 남쪽의 백제를 공략하는 것이다. 적어도 낙랑과 대방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연나라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

 

369년 백제를 침공한 것은 바로 그런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어지러운 대륙의 정세는 그 무렵 또 한 번 큰 격변을 일으킨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정의와 분노의 칼을 받아야 할 전연이 370년에 서쪽에서 일어난 진(, 전진)에게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고국원왕의 심정은 허탈해졌지만 문제는 간단해졌다. 이제 개인적 분노의 대상이자 국가적 노선은 백제라는 하나의 타깃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아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이 전사하는 비극이었다.

 

 

연나라와의 악연 한나라가 무너지고 나서 중국은 400년에 가까운 오랜 분열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한반도 삼국이 팽창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고구려는 지정학적 위치상 분열시대에 중국 동북 방면 왕조들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내는 주문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숙적은 분열기마다 늘 부활하는 연나라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비운의 왕

불세출의 정복군주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믿을 건 외교뿐

뭉쳐야 산다

백제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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