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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백제의 멸망?(광개토왕릉비, 장수왕, 개로왕, 문주왕, 웅진백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백제의 멸망?(광개토왕릉비, 장수왕, 개로왕, 문주왕, 웅진백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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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멸망?

 

 

정복군주란 원래 요절하는 걸까? 서른셋에 죽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처럼 광개토왕(廣開土王)도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비록 정복의 규모로 보면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듯이 광개토왕도 짧은 생애 동안 이룰 수 있는 모든 정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닮은 점은 여기까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그의 세계제국은 후계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쪼개졌지만, 광개토왕은 훨씬 든든한 후계자를 두었다. 그의 아들 거련(巨連)은 아버지가 외형적으로 성장시킨 나라에 확고한 토대를 놓았으며, 무려 7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흔여덟 살까지 살아 여러모로 요절한 아버지를 섭섭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묘호가 장수왕(長壽王)이었을까? 앞서 보았듯이 2세기 왕들의 특별한 장수 기록에 의문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장수왕(長壽王)은 실질적으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왕이다. 491년 그가 죽었을 때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그의 장수와 업적을 기려 직접 베옷을 입고 애도식을 거행할 정도였다(효문제는 획기적인 토지 제도인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한 황제로 중국사에서 이름이 높다).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은 우선 이듬해에 아버지의 위덕(威德)을 기리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세워 광개토왕의 뜻을 따를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오랜 치세를 시작했다(1500년 뒤에야 한반도인들에게 그 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비문을 새기고 비석을 세우는 그의 마음도 착잡했으리라). 흔히 그는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 전술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중국 방면으로 화려하게 진출한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유지를 받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맨 먼저 광개토왕의 공적비를 세운 것에서 보듯이 장수왕(長壽王)은 아버지의 의도를 잘 이해했고 거의 그대로 따랐다. 광개토왕이 더 오래 살았다 해도 아마 랴오둥 사태가 해결되고 나면 곧바로 남진에 나섰을 테니까.

 

하지만 장수왕은 마치 자신이 앞으로 장수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 신중하고도 느긋하게 행보한다. 우선 아버지의 시대에 이미 랴오둥 문제는 매듭이 지어졌지만 그는 좀 더 그 소유권을 확실히 다지고자 한다. 전쟁의 시대가 끝났으니 그 방법은 외교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전통적 수교 대상인 북중국을 넘어 멀리 남조의 동진에까지 외교의 손길을 뻗친다. 비록 그 방식은 조공이었지만 한족 왕조마저 고구려가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못한 데는 광개토왕(廣開土王) 대에 일궈놓은 고구려의 든든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으니, 집안에 인물이 한 명 나면 여러 대가 먹고 산다는 옛말이 새삼스럽다중국의 역대 왕조, 특히 화북에 자리 잡은 나라들에게는 늘 고구려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으니까 대중국 관계가 완전히 안정되기는 어려웠다. 그 무렵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466년 북위의 헌문제는 장수왕(長壽王)에게 딸을 자신의 후궁으로 바치라고 명한다. 그러자 장수왕은 조카딸을 대신 보내겠노라고 대답했는데, 그 뒤 북위가 연 나라를 칠 때도 정략결혼으로 우호를 다지는 척하다가 기습 공격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을 바꿔먹고 조카딸이 죽었다고 통보한다. 뻔한 거짓말에 헌문제는 대노했으나 별다른 조처는 취하지 못했다. 아마 당시 북위는 부쩍 성장한 고구려를 껄끄럽게 여겼을 테고, 고구려는 비록 북위의 조공국이지만 나름대로 버티는 자세였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한반도 역사상 중국과 마지막으로 보인 호각지세(互角之勢). 나중에 중국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 한반도는 두 번 다시 그런 관계를 꿈꾸지 못한다. 동진이 멸망하자 장수왕은 그 뒤를 이은 송나라에 다시 조공했으며, 이렇게 북조의 북위, 남조의 송과 두루 우호를 다짐으로써 남진을 위한 모든 차비를 마쳤다.

 

 

이렇게 고구려의 남침 의도가 점점 가시화되자 다급해진 것은 물론 백제다. 광개토왕(廣開土王) 때 역전된 이래 백제는 한번도 단독으로 고구려와 맞붙어 승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 이후 전지왕(腆支王) - 구이신왕(久爾辛王) - 비유왕(毗有王)의 치세 50여 년 동안 백제는 늘 고구려의 남침을 최대의 국가적 고민으로 간직해왔다. 나름대로 대비는 하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건 누가 봐도 분명하다. 따라서 백제가 기댈 것은 오로지 외교 즉 어떻게든 동맹을 확대하는 것뿐이다.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이제 마지막 외교로써 다가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스폰서인 북위와 접촉하는 것이다. 장수왕(長壽王)이 남조에까지 접근한다면 나는 북조에 접근하겠다. 남조의 송은 일단 구워삶아놨으니 고구려의 흔들기 작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북위마저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고구려의 의도는 불발로 끝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72년 드디어 개로왕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서신이 뱃길로 북위에 전달된다. 그러나 당시 북위의 황제가 장수왕과 마찰을 빚었던 헌문제에서 불과 3년 전에 그 아들인 효문제(孝文帝)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일단 개로왕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조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 대국을 섬기고자 하는 사무치는 정성을 달랠 길이 없다는 사뭇 감동적인(?) 글월에도 불구하고 효문제는 고구려가 본국을 섬긴 지 오래도록 별다른 결례를 한 일이 없으니 어찌 고구려를 정벌하겠느냐며 오히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이른다. 효문제의 진의는 물론 고구려의 백제 정벌을 승인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개로왕은 북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조공도 끊어 버린다.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로부터 3년 뒤 장수왕(長壽王)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침을 개시했다.

 

대병력은 아니지만 철기병 위주의 고구려 정예병을 백제는 막을 힘이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근초고왕(近肖古王)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고 고구려의 보복을 걱정하여 산 속에 도성을 쌓아 대비했으나(남한산성) 그 조상의 슬기조차 백제의 운명을 건져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근초고왕은 후손에게 복을 베풀기는커녕 화를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성문이 불타는 것을 보고 개로왕(蓋鹵王)은 뒷문으로 빠져 달아났다가 고구려의 추격군에게 잡혀 백제를 버린 매국노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으니까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다.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하기 전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 궁실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것처럼 위장하고 개로왕과 바둑친구가 되어 환심을 산다. 그리고는 개로왕에게 백제의 도성은 하늘이 내린 지세이니 걱정할 것 없다면서 왕궁을 확장해서 위세를 과시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백제가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축성 사업으로 방어망이 약해진 데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을 유발한 장수왕(長壽王)의 첩보전도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고구려의 남진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고,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장수왕(長壽王)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완전히 풀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역관계가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두 나라의 건국 이후 500년간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건국 이후 두 나라는 400년 가까이 지나도록 낙랑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탓에 직접 조우할 기회가 없었다. 완충지가 사라지자 두 나라는 곧바로 접경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결과는 교류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서전(緖戰)은 예상과 달리 백제의 완승,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구려가 대중국 관계에 주력하느라 남부 전선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근초고왕은 그 점을 알았기에 승리한 뒤에도 고구려의 침략을 걱정했던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분열 상태였지만 강남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던 화북에서 북위가 패자로 발돋움하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다. 북위는 고구려에게 랴오둥의 소유를 인정해주었고 그 대가로 고구려는 북위의 서열을 인정해주었다(그런 관계였으니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려 한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남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장수왕(長壽王)은 건국 이후 최대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이지만, 백제는 반대로 건국 이후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다행히도 개로왕은 도성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아들 문주에게 어서 도망쳐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는데, 그런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더라면 백제는 아마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졌을 것이다. 문주는 신라에서 1만의 병력을 빌려 황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아버지는 죽고 성은 무너진 상태였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고구려군이 물러갔다는 것인데, 아마 장수왕은 도성을 유린한 것으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했다고 본 듯하다오늘날 영토국가개념으로 보면 장수왕(長壽王)의 철군은 이해할 수 없는 게 된다. 그는 왜 백제의 뿌리마저 잘라 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모두 완전한 영토국가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국경선이라는 분명한 울타리를 두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제의 도성이 산 속에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개념이 아니라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의 국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라는 을 제거한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아마 그는 이후의 백제를 잔존 세력이 세운 지방정권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개념의 국가가 아니었기에 변방에 지방정권이 성립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비록 고구려군이 철수했다 해도 죽은 아버지의 왕위만 이었을 뿐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은 원래의 도성을 회복할 자신이 없었다.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일 처지도 아니려니와 여기서 얼쩡거리다간 언제 다시 장수왕의 철퇴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남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멀리 내려가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하는 웅진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을 원래의 백제와 구분하여 웅진백제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 백제가 멸망했다고 본다면 그런 구분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왕계의 보존을 고려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어쨌거나 그건 뭐든지 구분하기를 즐기는 학자들의 몫이니까 여기서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일설에 따르면 그 무렵 백제 지배층의 일부가 대규모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야마토 정권의 성립에 기여했으며, 따라서 일본 천황의 혈통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도 하는데,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시대에 굳이 두 나라 왕조의 혈통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극적인 천도 아신왕(阿莘王)을 살려준 광개토왕(廣開土王)과 개로왕(蓋鹵王)을 죽인 장수왕, 그것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잔인했기 때문은 아니다. 신라를 거느리고 있던 광개토왕은 백제의 항복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판단했기에 여유가 있었고, 장수왕은 나제동맹이라는 강력한 수비망을 의식해서 독하게 나간 것뿐이다. 어쨌거나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500년 도읍지를 버리고 사진에서 보는 웅진성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지금 이름은 공주의 공산성인데, 돌로 된 성벽은 조선시대에 개수된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비운의 왕

불세출의 정복군주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믿을 건 외교뿐

뭉쳐야 산다

백제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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