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헤어진 후에야 알게 되는 뒤늦은 깨달음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삶은 너무나 많은 자명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간단히 나열해보도록 하죠.
부모님께 효도하기, 부모님께 혼나기, 피곤해서 일찍 귀가하기,
외출하기 전에 화장하기, 설거지하기, 홈페이지 관리하기,
메일 확인하기. 친구와 전화하기, 영어 공부하기,
스포츠에 열광하기, 유명 연예인 좋아하기, 이별에 슬퍼하기,
친구들과 술 마시기, 외박하기, 친구들과 여행하기,
산에 오르기, 나이든 사람에게 자리 양보하기, 영화 보기,
음악 듣기, 독서하기, 시험공부하기, 시험 보기, 직장 다니기,
아르바이트하기, 월급 타기, 쇼핑하기, 저축하기, 휴가 떠나기,
군대 가기, 예비군 훈련받기, 결혼하기, 아이 낳기,
아이 야단치기, 투표에 참여하기, 반상회에 나가기,
친구 결혼식 가기, 돌잔치 가기, 문상 가기, 유해 화장하기,
제사에 참여하기, 명절에 친지들 방문하기 등등.
철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자명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그 의미를 다시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음미되지 않은 삶은 맹목(盲目)적인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철학은 풍성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만’ 할까요? 그냥 살던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살기도 바쁜데 삶에 거리를 두고 또 삶을 음미한다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사실 삶을 낯설게 만든다고 해도 별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뭐 별다른 대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구성하는 많은 자명한 것들을 우리가 문제 삼아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낯설어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우리로부터 ‘낯설어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서, 아니면 그가 먼 곳으로 불가피하게 떠나게 되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이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랑이란 무엇일까?’ 혹은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사람일까?’라고 미리 반문해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후 회한에 가득 차서 사랑에 대해 반문해보는 것은 너무 때늦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의 가치와 그 의미에 대해 한번쯤 반문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점이 바로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철학적 사유란 미리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의 책 제목이 생각나는군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이별할 경우 보통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쓰라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우리의 마음에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사랑했다는 나의 생각이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역으로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이별했는데 놀랍게도 나의 마음이 깊은 비탄(悲嘆)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헤어진 사람이 단순히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한탄에 젖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말처럼 철학과 삶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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