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기 사건
다음은 ‘코믹 액션’의 일종이다. 열하에 도착해서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한 술집에 들어선다. 마침 몽고와 회자 패거리들이 수십명 술집을 점거하고 있다. 오랑캐들의 구역에 동이족(東夷族) 선비가 느닷없이 끼어든 꼴이 된 셈이다. 워낙 두 오랑캐들의 생김새가 사납고 험궂어 연암은 후회막심이나 이미 술을 청한 뒤라 괜찮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연암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넉 냥 술을 데우지 말고 찬 것 그대로 가져오게 한다.
심부름꾼이 웃으면서 술을 따라 가지고 오더니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먼저 벌여놓는다.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확 쓸어 엎어버렸다. “큰 술잔으로 가져 와!” 그러고는 큰 잔에다 술을 몽땅 따른 뒤, 단번에 주욱 들이켰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酒傭笑而斟來 先把兩小盞 鋪卓面 余以烟竹 掃倒其盞 叫持大鍾來 余都注一吸而盡
눈이 휘둥그레진 오랑캐들. 중국은 술 마시는 법이 매우 얌전해서 비록 한여름에라도 반드시 데워 먹을뿐더러, 술잔은 작기가 은행알만 한 데도 오히려 조금씩 홀짝거려 마시는 게 보통인데, 찬술을 큰 잔에 몽땅 붓고 ‘원샷’해버렸으니 깜짝 놀랄밖에, 물론 연암은 자신의 이런 행동이 ‘허장성세(虛張聲勢)’임을 꿰뚫어 보고 있다. “내가 넉 냥이나 되는 찬술을 단숨에 들이켜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저들을 겁주기 위해 부러 대담한척한 것일 뿐이다. 솔직히 이건 겁쟁이가 호기를 부린 짓이지 용기있는 행동은 아니다[一吸四兩 所以畏彼 特大膽如是 眞怯而非勇也].” 한껏 폼을 잡긴 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몽고, 회자 패거리들은 이제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기보다 호기심이 동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이때다 싶어 술값을 치르고 유유히 빠져나오려는 연암에게 돌발적 사태가 발생한다. 몇명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번 앉기를 권하고는 그중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비워서 그를 붙들어 앉힌 것이다. 연암의 등에 식은 땀이 흐른다. 무리 중 한 명이 술 석 잔을 부어 탁자를 치면서 마시기를 권한다. 그렇다고 이 마당에서 꼬리를 내릴 수는 없다. 한 번 더 ‘오버액션’을 하는 도리밖에.
나는 벌떡 일어나 사발에 남은 차를 난간 밖으로 휙 내버린 다음, 거기다 석 잔을 한꺼번에 다 부어 단숨에 쭈욱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즉시 몸을 돌려 한 번 습한 뒤 큰 걸음으로 후다닥 층계를 내려왔다. 머리끝이 쭈뼛하여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황급히 한참을 걸어 큰길까지 나와서야 비로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락 위를 쳐다보니, 웃고 지껄이는 소리가 왁자했다. 아마도 나에 대해 떠들어대는 모양이다.
余起潑椀中殘茶於欄外 都注三盞 一傾快嚼 回身一揖 大步下梯 毛髮淅淅然 疑有來追也 出立道中 回望樓上 猶動喧笑 似議余也
‘터프가이’ 혹은 황야의 무법자가 따로 없다. 하지만 속으로 덜덜 떨고 있는 걸 오랑캐 패거리들이 알았다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는 몽고, 회자 오랑캐들의 모습도 흥미롭지만, 연암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 더더욱 배꼽을 잡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도 궁금증이 동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냥 멋지게 오랑캐들의 기를 죽였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자신의 심리적 표정을 노출시키는 연암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저 웃기려고? 아님 심오하게 보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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