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바로 ‘나’
이처럼 장쾌한 편력기답게 『열하일기』에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연 도드라진 인물은 연암 자신이다. 그는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신의 심리를 미세한 부분까지 아낌없이 드러내 보인다. 불타는 질투심과 호기심, 우쭐거림, 머쓱함 등, 그 생동하는 파노라마는 이 편력기에 강렬한 색채를 부여한다.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있다 그는 꿈을 꾼다. 밤에 조금 취하여 잠깐 조는데, 몸이 홀연 심양성 안에 있다. 꿈속에서 보니 궁궐과 성지와 여염과 시정들이 몹시 번화ㆍ장려하다. 연암은 “이렇게 장관일 줄이야! 집에 돌아가서 자랑해야지[余自謂壯觀]”하고 드디어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소리개처럼 날쌔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야곡(冶谷, 서울 서북방 동리) 옛 집에 이르러 안방 남창 밑에 앉았다. 형님(박희원)께서, “심양이 어떻더냐[瀋陽如何]?” 하고 묻자, 연암은 “듣던 것보다 훨씬 낫더이다[勝於所聞]” 하고 대답한다. 마침 남쪽 담장 밖을 내다보니, 옆집 회나무 가지가 우거졌는데, 그 위에 큰 별 하나가 휘황히 번쩍이고 있다. 연암이 형님께, “저 별을 아십니까[識此星乎]?”하니, 형님은 “글쎄. 잘 모르겠구나[不識其名]” 한다. “저게 노인성(老人星)입니다[此老人星].” 하고 답하고는 일어나 절하고, “제가 잠시 집에 돌아온 것은 심양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여행길을 따라가야겠어요[吾暫回家中 備說瀋陽 今復追程耳].” 하고는 안문을 나와서 마루를 지나 일각문을 열고 나섰다. 머리를 돌이켜 북쪽을 바라본즉, 길마재 여러 봉우리가 역력히 얼굴을 드러낸다.
그제야 퍼뜩 생각이 났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나 혼자 어떻게 책문을 들어간담? 여기서 책문이 천여 리나 되는데,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꼬,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 지도리가 하도 빡빡해서 도무지 열리지를 않는다. 큰 소리로 장복이를 불렀건만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는다. 힘껏 문을 밀어 젖히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忽自大悟曰 “迂闊迂闊 吾將何以獨自入柵” 自此至柵門千餘里 誰復待我停行乎 遂大聲叫喚 不勝悔懊 開門欲出 戶樞甚緊 大叫張福 而聲不出喉 排戶力猛 一推而覺
마침 정사가 나를 불렀다. “연암!” 비몽사몽간에 이렇게 물었다. “어, 어 …… 여기가 어디오?” “아까부터 웬 잠꼬대요?” 일어나 앉아서 이를 부딪치고 머리를 퉁기면서 정신을 가다듬어본다. 제법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도강록(渡江錄)」
正使方呼燕巖 余猶恍惚應之 問曰 “此卽何地” 正使曰 “俄者夢囈頗久矣” 遂起坐敲齒彈腦 收召魂神 頓覺爽豁
이 꿈의 에피소드에는 연암의 심리가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처음 연행에 나선 설레임과 가족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 거기에 더해 책문을 넘을 때의 두려움 등, 연암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속내를 두루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솔함이야말로 연암이 유머를 구사하는 원동력이다. 그런 까닭에 『열하일기』가 펼쳐 보이는 유머의 퍼레이드에는 늘 연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소한 충돌과 코믹 해프닝은 헤아릴 수도 없거니와, 그 가운데 몇 개만 소개해본다. 만화를 보듯 그냥 즐기시기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