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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호곡장(好哭場)’?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호곡장(好哭場)’?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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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호곡장(好哭場)’?

 

 

유머가 만들어놓은 매끄러운 공간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물론 범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중세적 엄숙주의와 매너리즘이 전복되면, 그 균열의 틈새로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 순간, 18세기 조선을 지배했던 통념들은 가차없이 허물어진다. 무엇보다 그의 유머에는 언제나 패러독스가 수반된다. 주지하듯이 패러독스, 역설은 통념의 두 측면인 양식(bon sens)과 상식에 대립한다.

 

봉상스, 그것은 한쪽으로만 나 있는 방향이며, 그에 만족하도록 하는 한, 질서의 요구를 표현한다. 그에 반해 역설은 예측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 혹은 알아보기 힘들게 된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패러독스란 봉상스의 둑이 무너진 틈을 타고 범람하는 앎의 새로운 경지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사이 혹은 의미의 전도, 그것이 바로 패러독스다.

 

강을 건너고 처음 마주친 요동벌판, 그것은 정녕 놀라운 경험이었다.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을 먹고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 하나를 접어드는 순간, 정진사의 마두 태복이가 갑자기 말 앞으로 달려 나와 엎드려 큰소리로 말한다.

 

 

백탑(白塔)이 현신(現身)함을 아뢰옵니다. 도강록(渡江錄)

白塔現身謁矣.

 

 

연극적인 제스처로 장차 펼쳐질 장관을 예고한 것이다.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드넓은 평원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당하여 연암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吾今日始知人生本無依附, 只得頂天踏地而行矣]”이라고, 삶의 통찰이 담긴 멋진 멘트다.

 

하지만 뒷통수를 내려치는 건 그 다음 대목이다.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好哭場! 可以哭矣]!”

 

12백 리에 걸쳐 한 점의 산도 없이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을 보고 처음 터뜨린 그의 탄성이다.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니? 어리둥절한 동행자 정진사의 물음에 연암의 장광설이 도도하게 펼쳐진다. 이름하여 호곡장론(好哭場論)혹은 통곡의 패러독스! 천고의 영웅이나 미인이 눈물이 많다 하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렸을 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聲滿天地, 若出金石]”한 울음은 울지 못했다. 그런 울음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사람들은 다만 칠정(七情)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도강록(渡江錄)

人但知七情之中, 惟哀發哭, 不知七情都可以哭. 喜極則可以哭矣, 怒極則可以哭矣, 樂極則可以哭矣, 愛極則可以哭矣, 惡極則可以哭矣, 欲極則可以哭矣. 宣暢壹鬱, 莫疾於聲, 哭在天地, 可比雷霆. 至情所發, 發能中理, 與笑何異?

 

 

요컨대 기쁨이나 분노, 사랑, 미워함, 욕심 어떤 감정이든 그 극한에 달하면 울 수가 있으니, 그때 웃음과 울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극치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을 당했을 때 애고’ ‘어이따위의 소리를 억지로 부르짖을 따름이다. 궤변 혹은 예측불가능한 생성. 이에 다시 정진사가 묻는다.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저도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今此哭場, 如彼其廣, 吾亦當從君一慟, 未知所哭, 求之七情所感, 何居?

 

 

대답 대신 또 다른 궤변이 이어진다. 갓난아기는 왜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가? 미리 죽을 것을 근심해서? 혹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그렇게 보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환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보고 발도 펴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兒胞居胎處, 蒙冥沌塞, 纏糾逼窄, 一朝迸出寥廓, 展手伸脚, 心意空闊, 如何不發出眞聲盡情一洩哉]”느냐는 것이다. 즉 이때의 울음은 우리가 아는 그런 울음이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경계를 넘는 순간의 환희이자 생에 대한 무한긍정으로서의 울음인 것이다.

 

그러니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故當法嬰兒, 聲無假做. 登毗盧絶頂, 望見東海, 可作一場]”,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 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自此至山海關一千二百里, 四面都無一點山, 乾端坤倪, 如黏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場]!”하는 것이 호곡장론(好哭場論)의 대단원이다.

 

이런 식으로 연암은 패러독스를 통해 저 높은 곳 혹은 심층에서 놀고 있는 관념들을 표면으로 끌고와 사방으로 분사하게 만든다. 처음에 그의 궤변에 당혹해하고 어이없어 하다가도 차츰차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결국은 설복당하고 만다. 그리고 돌아보면 이미 애초의 봉상스(bon sens)는 아스라이 멀어지고 눈앞에는 아주 낯선 경계가 펼쳐져 있다.

 

참고로 이 호곡장론(好哭場論)부분은 독자적으로 인구에 회자되어 일종의 고사성어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다음에 나오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시 요동벌판[요야, 遼野]이다.

 

 

 

千秋大哭塲 戲喩仍妙詮 천추의 커다란 울음터라더니 재미난 그 비유 신묘도 해라
譬之初生兒 出世而啼先 갓 태어난 핏덩이 어린아이가 세상 나와 우는 것에 비유했다네

 

 

요동벌판을 보고 연임이 ,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라고 외친 것과 갓난아이의 울음에 대한 궤변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텍스트다. 이렇게 비약과 생략을 통해서도 충분히 소통될 정도로 그의 패러독스는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것인가?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다산과 연암 실학캠프

눈물 시리즈는 준규식 호곡장론

이중섭미술관은 한바탕 울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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