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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다시 열하로!(2012년 여름) - ‘서프라이즈’ 사랑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다시 열하로!(2012년 여름) - ‘서프라이즈’ 사랑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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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사랑

 

 

여행은 만남이다. 길 위에 나서면 누군가를 만난다. 낯선 이든 혹은 이국인이든, 이번 여행도 그랬다. 다큐팀과의 만남은 아주 생소하고 신선했다. 정규직과 함께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다큐를 찍는 프로들이라 더더욱 그랬다. 평소엔 여유있고 유연하지만 일에 대한 긴장감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회식을 하는 것도 역시 정규직답다!^^ 하지만 나는 잠이 많은 데다 회식체질이 아니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대신 나의 룸메이트이자 동반 출연자였던 사랑이와의 만남은 아주 특별했다.

 

처음 사랑이를 봤을 때 두 번 놀랐다. 얼굴이 꼭 인형같이 생겼다. 무슨 연예인을 데려온 줄 알았다. 동갑내기인 양PD와 비교해도 완전 애송이처럼 보였다. 또 하나 이름이 사랑이라니? 아이디나 예명인 줄 알았는데 진짜란다. 풀네임은 부모님의 성을 모두 써서 한유사랑인데, 언뜻 들으면 한우사랑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매로 어떻게 이 험한 여정에 참여하게 되었을까(체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모순으로 뽑은 게 틀림없다, 고 놀렸을 정도다). 아무튼 이래저래 내 스타일이 아니라 처음엔 몹시 어색했다. 또 반대로 사랑이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이상했겠는가. 다행히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잠이 많아서 우리는 차츰 일상의 리듬을 맞출 수 있었다. 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매지만 봉황산 꼭대기 바위 위에서 그림을 그릴 때나 이제묘가 있는 마을에서 2시간 이상을 쭈그린 자세로 탁본을 뜰 때는 끈기와 집념으로 사람들을 감탄케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질 즈음,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비 때문에 차 안에서 갇혀 있을 때 내가 소일삼아 장PD의 사주를 봐준 일이 있었다. 여행 오기 직전 사주명리학을 인문학적으로 풀어쓴 나의 운명사용설명서를 탈고한 터인 데다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팔자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PD는 일간(日干)이 경금(庚金)인데 불이 아주 많은 사주였다. 경금은 굳고 단단한 바위를 의미하니 카메라를 정교하게 다루는 작업과 잘 어울렸고, 불이 많다는 건 화려한 표현력과 활발한 인간관계, 그리고 술에 대한 욕망 등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아주 기본적인 개념 몇 가지만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다들 재밌어했다. 내친 김에 사랑이 사주도 잠깐 봤더니 역시 간//신장이 다 약하다. 자신의 말로도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뿐더러 밤에는 종종 몽유병 증세까지 겪는단다. 쯔쯔, 역시 미모에는 대가가 따르나보다. 그때부터 사주를 빌미로 건강을 유지하려면 일상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곤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자기도 이 원리를 배우고 싶다는 거다. ‘? 정말이야? 그럼 매일 숙제를 내줄 테니 외워 보아라~’하고 음양오행, 상생상극, 십신, 육친 등을 간략하게 일러주었다. 솔직히 한두 번 배우다 말려니 했다. 그런데 웬 걸? 호텔에서건 차 안에서건 길거리에서 건 틈만 나면 낑낑거리며 외우는 게 아닌가. 솔직히 사랑이는 한자에 너무 무식하다. 육십갑자 한자를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처음 붙여준 명칭은 스투피드 사랑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무식함을 절대 개의치 않는다. ‘어메이징 스투피드라고 놀려도 재밌어 죽는다. 자기의 무식함을 놀이로 삼다니 뭐 이런 애가 다 있담? 그러니 절대로 포기를 모른다. 그래서 나도 구박을 하면서도 뭔가를 계속 가르쳐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되니 벌써 초식을 읽는다. 친구는 또 어찌나 많은지 온갖 친구들의 사주를 알아내서는 그 얕은 지식으로 이리저리 짜맞추기 바쁘다. 와우, 서프라이즈! 역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뚝심이다.

 

명리학을 배우게 되면 대화의 수준이 달라진다. 고상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온갖 숨겨둔 이야기를 다 꺼내놓게 된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불과 열흘 만에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병력이며 남친들의 신상, 가족의 내력까지. 명실상부한 커플이 된 것이다(그래서 사랑이는 한동안 나의 동거녀라고 떠들고 다녔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친구가 합류했다. 다름 아닌 명코디 쭌이다. 알고보니 쭌은 중의사 출신이었다. 20대에 중국으로 건너와 중의대를 졸업할 즈음 우연히 알바로 방송코디를 했다가 너무 잘해낸 나머지 그 길로 들어서버리고 만 것이다. 팔자가 핀 건지 꼬인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 동양의학과 역학에 대한 공부가 나보다 깊은 수준이었다. 초짜인 사랑이, 고전평론가인 나 곰숙씨, 그리고 중의사 출신의 코디 쭌, 나이도 출신도 체질도 다 다르지만 함께 이야기하고 탐구할 수 있는 공통의 지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평소엔 개그콘서트식 개그로 친분을 다지고 일이 끝나면 호텔방에서 사주명리학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세 사람의 사주를 맞춰 보니 해묘미(亥卯未)’ 삼합이다. 내친 김에 삼합회라는 이름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세상을 연결하는 건 공부밖에 없다는 걸. 좋은 음식을 먹고 서로에게 친절한 말을 하고 좋은 풍경을 보고, 이런 여행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돌아서면 물거품이다. 이 허망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앎 혹은 지성이 필요하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탐구할 때 삶은 굳건히 이어진다. 이번에도 과연 그랬다. 귀국하고 나서 사랑이는 많이 아팠다. 툭하면 쓰러지고 입원을 하고 잠수를 타고……. 그런데도 사랑이와 나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사랑이가 계속 감이당으로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 들어가는 그림을 맡게 되었고, 이후 북드라망의 전담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쭌과의 인연은 말할 것도 없다. 명코디에 중의사라니, 인문의역학을 지향하는 감이당으로선 이보다 더 유용할 순 없다!

 

연암 박지원은 정말 우정의 달인이다. 열하일기로 끊임없이 나를 길 위에 나서게 하고 그 길 위에서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니 말이다. 이 인연을 바탕 삼아 감이당의 비전이기도 한 소수민족 의학기행(Healing on the road)’도 조만간 시도할 생각이다. 쭌이 현지코디를 맡고 나와 감이당 친구들은 글을 쓰고 사랑이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래서 사람팔자 알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보다. 인생도처유반전(人生到處有反轉)! 서프라이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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