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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다시 열하로!(2012년 여름) - 카메라 : 권력과 은총의 화신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다시 열하로!(2012년 여름) - 카메라 : 권력과 은총의 화신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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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 권력과 은총의 화신

 

 

압록강을 건넌 후 연암 일행은 책문에 도착한다. 책문은 조선과 중국 사이의 경계, 곧 국경이다. 검문검색을 통과하느라 연암 일행은 온갖 곤혹을 치른다. 하지만 정작 그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책문을 넘자 진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폭우다. 한창 장마철에 떠난지라 폭우로 강이 범람하면 말도 사람도 꼼짝할 수가 없다. 노숙을 하면서 하염없이 머무르는 수밖에. 그러다가 홀연 날이 맑으면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만수절 행사 전에 연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게다가 만수절 행사에 조선 사신단을 꼭 참여시키라고 특별명령까지 내렸다. 이런! 일행은 다시 짐을 챙겨 연경에서 열하로 달려가야 했다. 무박나흘의 강행군이었다. 야삼경에 고북구 장성을 통과하거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대모험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여행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 두 대의 자동차를 전세냈으니 날씨와 상관없이 수시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고 시설 좋은 호텔에서 끼니마다 만찬을 즐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도 도처에서 모험과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연암에 비하면 택도 없겠지만, 나름 체력과 정신력이 엄청 소모되는 강행군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카메라 때문이었다. 우리의 모든 스케줄을 지배하고 우리의 기분과 체력까지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 카메라! 카메라는 태양토템을 섬기는 족속이다. , 곧 햇빛과 조명이 유일한 척도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권력은 햇빛과의 오묘한 관계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단동항이나 압록강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에서는 중국공안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허용된 곳에서는 이제 카메라와 빛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여한 일정은 전체 2주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3분지 1이 비가 내리거나 혹은 흐렸다. 그런 날은 꼼짝없이 호텔방에서 뒹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정 또한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다. 처음엔 최고의 조명을 위해 기다리지만 시간이 임박하면 가차없이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빗속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찍어야 한다. 구련성의 장터에서 인터뷰 장면을 찍는데 비가 계속 쏟아졌다. 근처 슈퍼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소강 상태가 됐기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바로 폭우가 쏟아진다. 장비를 걷으면 그치고, 다시 찍으려 하면 쏟아지고…… 마치 비와 카메라가 밀당을 하는 격이었다. 하기사 비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갔을 뿐인데 우리가 눈치코치 없이 카메라를 들이댄 꼴일 테지만.

 

한편 카메라는 끊임없이 우리의 인내력을 테스트한다. 4시간을 기다려 1분을 찍기도 하고, 하루 종일 이동하고 또 높은 산 정상에 오르는 수고를 거친 뒤에 겨우 30초를 찍기도 한다. ~ 이런 식의 알바는 처음이다. 그런가 하면 열하에선 간만에 날씨가 맑자 피서산장, 포탈라궁, 찰십륜포, 보녕사에 고북구 장성까지 모든 장면을 하루에 다 찍어버렸다. 이런 식이다 보니 기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다음날 촬영할 대목이라 해서 인터뷰 대사를 밤새 암기했는데, 다음날 현장에 가보면 대본은 이미 바뀌어 있다. 그러면 느닷없이 전혀 다른 장면이 추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큐의 중심은 출연자가 아니라 촬영감독이다. 그래서 한PD는 늘 장PD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온 신경을 집중한다. 또 장PD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인물이 바로 현지코디 쭌이다. 쭌은 베이징에 사는 한국인인 데다 모두가 인정하는 명코디다. 의무려산 꼭대기에서 요동벌판의 광할한 스케일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을 찍는데, PD 말로는 다 좋은데 2%가 부족하단다. 그런데 그 사이에 쭌이 잽싸게 산 곳곳을 뒤져 기막힌 뷰포인트를 찾아냈다. 그곳에 서자 장PD의 얼굴이 햇살처럼 밝아진다. 그러면 덩달아 팀 전체의 분위기가 업된다. 이 모든 흐름의 배후조종자가 바로 카메라다. 모두를 웃겼다 울렸다 하는 요~물 아니 권력의 화신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 권력에는 보이지 않는 은총도 함께 존재한다. 카메라는 세상을 카메라로 절단하지만 전혀 예기치 않은 장면을 우리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봉황산 장면이 그랬다. 연암도 먼발치에서 보고 지나친 곳인데, 연암이 간 그 길을 부감으로 잡기 위해선 봉황산에 오를 수밖에 없다. , 그 장쾌함이란! 한편, 청석령 고갯마루를 찍을 때였다. 이 또한 카메라가 아니었으면 결코 밟아볼 수 없는 땅이었다. 그때의 촬영 콘셉트는 해가 지는 장면이었다. 한 시간 이상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그 다음에 그걸 초고속으로 돌리면 고갯마루에 해가 지는 장면을 근사하게 담을 수 있다(2초에 1장씩). 이런 기법을 인터벌이라고 한단다. 그때는 카메라 혼자 노동을 하고 일행들은 그 근처에서 한참을 웃고 떠들고 놀았다.

 

물론 카메라로 인해 겪는 모험도 적지 않다. 심양고궁에선 중국 공안을 따돌리기 위해 작은 카메라(DSLR)를 몸에 숨기고 들어가 기습촬영을 했고, 천안문 광장에선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드는 와중에 역시 공안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안 찍는 척하면서 인터뷰 멘트를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내가 또 번번이 NG를 냈다. PD는 공안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장PD와 김PD는 카메라의 상태를 점검하고, PD는 주변 인파의 동선을 살피고……. 정말이지 첩보영화가 따로 없다. 체력소모가 엄청나긴 했지만, 내 인생에 언제 이런 일을 경험해본단 말인가. 이 또한 카메라가 준 은총이라면 은총이다.

 

이로써 보건대 카메라는 또 하나의 판타지다. 빛과 조명이 어우러져 탄생한 판타지! 하여, 결코 카메라를 믿지 마시라. 다큐조차 철저히 연출의 산물이다. 어떤 프레임으로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암은 열하의 한 광장에서 화려한 요술의 퍼레이드를 목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爾]] 환희기(幻戱記)후지(後識)”것일 따름이다. 이 환희(幻戱)의 절정이 카메라일 터, 이 현란한 스펙터클 속에서 과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아니, 대체 어디가 카메라의 안이고, 어디가 바깥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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