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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지배인가? 전파인가?(한4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지배인가? 전파인가?(한4군)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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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인가, 전파인가

 

 

어차피 한나라 초기의 권력 공백을 틈타 성립한 나라였기에, 위만조선은 처음부터 한시적 수명밖에 누리지 못할 운명이었다. 언제라도 제국이 안정된 기반 위에 오르면 동북 변방에 위치한 위만조선은 즉각 제국의 토벌 대상이 되리라. 과연 한 무제는 흉노를 멀리 내쫓은 다음 곧바로 동북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에게 고조선은 천자에 대한 충성을 팽개치고 반기를 든 나라일 뿐 아니라 랴오둥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부근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얄미운 존재였으며, 자칫 흉노의 잔당과 결합한다면 간신히 꺼놓은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골칫거리였다.

 

이윽고 한 무제는 칼을 뽑았다. 기원전 109년 그는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고조선 정벌을 명한다. 한 갈래는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통해, 다른 한 갈래는 산둥에서 뱃길을 통해 랴오둥을 공략하려는 구상이다. 한편 위만의 손자로 3대째 고조선을 다스려온 우거왕(右渠王)은 이미 전쟁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나라 조정에 입조하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부한 것은 결전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자세다. 더욱이 그는 고조선에 온 한나라 사신이 어느 장수와 다툼을 벌이다 그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사신을 보복 살해함으로써 제국과 일체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결국 이 사건은 선전포고가 된다.

 

우거왕은 과연 항전의 의지만큼 승산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까? 그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고조선은 예상 외로 오래 버텼다. 한나라는 수도인 왕검성을 1년 이상이나 공략한 끝에 비로소 고조선을 정복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사건은 변방 정리 작업에 불과한 작은 일이었지만, 한반도 역사에서는 엄청난 격변이었다. 이로써 단군조선 이래 2천 년 동안 존속해 오던 고조선이 마침내 최종적으로 멸망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땅이 한나라의 영토로 바뀌었으니 이제 제국의 행정 체제에 따라 재편되는 것은 당연하다. 알다시피 한나라의 기본 체제는 군국제(郡國制). 초기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한 사정을 감안해서 봉건제의 속성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진 시황제를 능가하는 강력한 황제의 권력이 생겨났으니 이름은 변하지 않았어도 이때부터의 군국제는 사실상 군현제(郡縣制)나 다름없다. 전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편제하려는 무제의 의도에 따라 제국의 중앙정부는 랴오둥과 한반도 북부 지역을 네 개의 군으로 편성하는데, 그게 바로 낙랑 (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4이다한 무제가 꼭 고조선만을 괴롭힐 목적으로 한4군을 설치한 것은 아니다. 무제의 시절에 한나라의 영토는 크게 팽창했는데, 주요 정복지마다 한4군과 같은 군을 두어 변방의 방어에 주력하게 했다. 예컨대 월남, 즉 오늘날의 베트남에는 9군을 두었으니 말하자면 베트남 역사에서는 한9군인 셈이다.

 

4군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넓게 보면 랴오둥에서 오늘날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임은 분명하지만, 각 군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한반도 남부에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일찍이 준왕도 거기서 새 왕조를 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남부는 아직 힘의 공백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낙랑군은 현재의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였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낙랑군을 기준으로 추측해 보면, 진번군은 기원전 82년에 낙랑군과 통합되는 것으로 미루어 낙랑의 북부, 즉 압록강 하류와 랴오둥 부근인 듯싶다. 그렇다면 임둔군과 현도군은 낙랑-진번의 동쪽, 그러니까 만주 남부와 오늘날 한반도의 동북부까지 아우르는 지역일 것이다. 기원전 82년에는 임둔군도 현도군에 통합되어 4군은 2군으로 축소되며, 곧이어 7년 뒤에는 현도군이 옛 고조선 세력의 저항을 받아 북쪽의 만주로 밀려나면서 사실상 낙랑군만이 남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한4군은 고대에 겪은 민족적 치욕 정도로 간주될 뿐 별로 중시되지 않고 있다. 물론 당시 고조선에도 그것을 치욕으로 여긴 백성들이 적지 않았을 법하다. 고조선이 중국 문명의 전통적 영향력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원전 2세기라면 어느 정도 원시적인 민족의식도 생겨났을 테니 한나라의 지배에 대한 저항감은 제법 팽배했을 것이다.

 

 

 

4군의 흔적 현재 평양시에 남아 있는 무덤 유적이다. 기단이 벽돌로 쌓여 있고 주변에도 벽돌담이 둘러진 축조 방식은 원래 중국식이다(한반도의 경우 삼국시대 중기까지 원형봉토식 무덤이 일반적이었다). 이 고분이 낙랑의 것임을 말해 주는 증거다. 4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지금의 평양을 포함하는 평안남도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군이 우리 역사의 태동기에 한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4의 지배 역시 양면적이다. 정복지를 지배했던 만큼 피정복민에 대한 상당한 정치적인 억압이 뒤따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 지배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명이 한반도에 이식되는 과정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4세기 초반까지 존속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왕조 시대가 개막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중국의 사상(유학)과 문자(한자)가 전래된 것은 바로 낙랑이라는 중국의 전초기지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낙랑군이 없었다면 과연 고구려가 한반도의 왕조 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한군의 이민족 지배는 우리 고대사의 질곡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봐야 하며,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서 편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더욱이 군국제(郡國制)의 속성이 그렇듯이 한4군은 중앙정부로부터 거리상으로 먼 만큼 상당히 독립된 일종의 자치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조선의 멸망으로 한반도 역사는 이제부터 중국의 역사와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지게 된다. 고조선의 변천 과정에서도 그런 흐름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거치면서 고조선은 조금씩 중국 문명권에 가까워졌다. 물론 지리적으로 가까워졌다는 게 아니라 중국 문명권과 한반도 문명권이 각각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접촉하기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메이저 문명과 마이너 문명이 만났으니 어느 쪽으로 통합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뻔하다. 위만조선의 멸망을 문명사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독자적 발전을 해오던 고조선의 소문명권이, 통일 제국을 이루고 본격적으로 문명의 전파에 나선 중국의 대문명권에 통합된 것에 해당한다. 결국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은 침략과 지배라기보다는 문명의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확산이었던 것이다이런 점에서 우리와 비슷한 고대사를 가진 나라가 영국이다. 고대에 브리타니아(영국)는 원래 켈트족이 살던 지역이었으나 당시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공을 받으면서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듯이, 브리타니아도 로마가 해협을 건너 침략하면서부터 비로소 알려진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서로 비슷하다. 한 무제의 역할을 한 사람은 물론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무제와 달리 그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브리타니아를 공략했다). 고조선이 저항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한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선진 문명권에 편입되었듯이 브리타니아도 역시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결국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라틴 문명권에 들어간다. 그러나 한군을 애써 무시하려는 우리와는 달리 오늘날 영국인들은 로마의 지배에 항거한 민족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로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것도 역시 중요한 역사적 모멘트였다고 생각한다

 

 

낙랑봉니 봉니(封泥)란 말 그대로 진흙으로 봉한 것을 가리키는데, 고대에 대나무로 된 문서를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도장이 찍힌 봉니를 붙였다. 낙랑봉니는 낙랑군의 위치를 말해준다는 주장도 있고, 일각에서는 일제가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분명한 시작

누락된 시대

두 번째 지배집단

중국과의 접촉

지배인가, 전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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