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지성 - 잡초는 범람한다
학교가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달라붙은 ‘기식자’들을 양산하는 동안, 그 외부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지적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름하여 대중지성!(고병권) 꿀벌이나 개미떼처럼 언제나 무리로 움직이고, 오직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대중지성은 ‘무리지성’이기도 하다. 대중보다 더 대중적이고, 지식인보다 더 지성으로 충만한 집단.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 자본, 국가’의 삼위일체 속에서 움직인다면, 대중지성들은 그 외부에서 ‘지성의 敎海’에 몸을 던진다. -26쪽
발트해 연안의 거대한 숲, 나무와 나무 사이로 붉은 장막들이 나부낀다. 몰이꾼들이 요란하게 나팔소리를 울리며 한 무리의 늑대를 붉은 장막 쪽으로 몰아붙인다. 빼곡이 늘어선 나무들과 울퉁불퉁한 바위, 급한 여울과 가시덤불 사이를 날렵하게 달리던 늑대들이 장막 앞에서 흠칫, 멈춰선다. 울타리도 아니고 철조망도 아니고, 그저 펄럭이는 장막일 뿐인데, 대체 왜? 결코 넘을 수 없는 ‘금지의 선’이라 스스로 안주해 버린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몰이꾼들이 늑대들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31쪽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 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전율을 느껴보았으면...“
책과 몸 사이. 공부와 삶 사이의 경계가 문득 사라져버리는,
책도 없고, 책 아닌 것도 없는 그런 질주를.....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40쪽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할 따름이다. -49쪽
아무리 즐거워도 돈이 되지 않으면 ‘인생에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아무리 싫어하는 것이라도 돈이 되면 ‘몹시 유용한’ 일이 된다. 돈이 깊이 개입하는 순간, 어떤 활동이든 졸지에 타율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증까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활동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력은 완전 잠식되고 만다. -53쪽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에 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혹은 사람마다 스스로 몸을 돌볼 능력을 터득하여 ‘병원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공부로 축제를 열면 어떻게 될까? 가족이 해체된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등등. 사람들은 다들 머리 싸매고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다. 넓은 아파트에 아이들 교육에 노후대책까지 몽땅 혼자서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더불어 함께 해결한다고 생각해보라. 일단 기본 비용이 반의 반도 들지 않을뿐더러, 함께 살면 먹는 거나 입는 것이 몇 배로 풍족해진다. 또 굳이 노후 대책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함께 노년을 보낼 친구가 있는데, 무슨 대책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건 의기투합하는 친구가 있느냐인데, 바로 어릴 때부터 이걸 훈련하면 된다는 것이다. 의리ㆍ우정ㆍ신의ㅡ창의적으로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가치를 몸에 익히는 것이기도 하다. -67쪽
공부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 이탁오 『분서』
꿈은 이루어진다!
학교의 제도적 속성이 부여하는 이 끔찍한 소외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 무엇보다 고전의 지혜를 적극 응용해야 한다. 즉, 자기가 선 자리를 제도적 울타리가 아니라, 스승을 만나고 벗을 부르는 배움터로 전환해야 한다.
…… 대학 밖에도 멋진 스승들은 얼마든지 있고, 또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나를 이끌어줄 존재들은 계속 출현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인복이다. 속된 말로 인복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게 무어랴. 거꾸로 세상 모든 걸 다 가져도 인복이 없으면, 인생 참, 꿀꿀해진다. -84쪽
공부는 ‘네트워킹!’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시작하면 된다. 토익과 고시 공부에 찌든 학생들에게 ‘앎’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를 체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택도 없는 소리라고 코웃음칠 것이다. 요즘 얘들에게 그런 게 먹힐 줄 아냐고. 맞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 그보다는 소규모일지라도 사제 간에 ‘즐거운 공부’의 장을 만들어 가고, 그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 집합적 관계망을 만들면 그게 곧 ‘앎의 코뮌’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적 열정 뿐 아니라, 학생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한 일상적 노력도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식은 세미나 때마다 소박한 파티를 여는 것이다. 세미나를 지식의 향연이자 음식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
…… 연구비 지원이 부족한 것보다 연구비를 핑계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조차 방기하는 태도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주저하지 말고 할 시간이 없다. 사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 …… 그 자체만으로도 앎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는데,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최근 뇌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 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 함께 모여 고전의 명문장들을 암송하고, 함께 토론하고, 그것으로 다양한 게임과 놀이를 만들어 내고, 그 공부를 바탕으로 또 다른 ‘밴드’와 결합하고, 이게 바로 지식의 향연이다. -88쪽
암송의 힘
암기가 묵독에 기초한다면, 암송은 청각에 기초한다. 암기가 개별적 활동이라면 암송은 집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암기를 단체로 할 순 없지만, 암송은 많은 사람과 할수록 효과적이다. 암기가 두뇌 플레이라면, 암송은 신체 운동이다. 암기를 많이 하면 신체가 허약해지지만, 암송은 신체 전체의 기운을 활발하게 소통시킨다. 좋은 공부는 반드시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따라서 몸을 소외시키지 않는 공부, 그게 진짜다!
…… 암송은 형식 자체가 집합적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식의 사적 소유라는 주술에 걸려들지 않는다. 한두 사람이 튀는 것보다 다 함께 리듬을 타야만 즐거운 공부가 가능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암송의 배치 속에선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서로를 소외시킬 필요가 없다.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소리를 합치면 되는 것이다. -93쪽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큰 소리로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기의 목소리만큼 낯선 것이 없다. 실제로 녹음을 해서 들어보면 누구나 자기의 목소리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곧 목소리야말로 내 안의 타자인 것이다. 따라서 낭송이란 일상적으로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 집단적으로 암송을 하노라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도 터득할 수 있다. 즉, 목소리에도 개성과 표정, 색깔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에 대해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목소리와 타인의 목소리가 뒤섞일 때 전혀 다른 종류의 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지식과 몸의 소외가 극복된다. 소리를 내려면 두뇌보다는 몸이 적극 반응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낭송을 한다는 건 체력과 기운의 분포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 앎의 신체성! 이것이야말로 학교식 공부가 망실해버린 원리가 아니었던가. -95쪽
구술, 리더십과 유머의 원천
진정한 유머는 무엇보다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와 간극을 관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의 말 속에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기발한 착상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유머의 기술과 구술 능력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이야기를 잘하다 보면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고, 웃음이 야기되다 보면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도 한다. 이렇게 현장을 장악하는 능력이 커지면 그게 다름 아닌 리더십이다.
독서 없는 연애는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순정파일 경우 대책 없이 계속 실연을 당할 것이고, 나름 바람기가 있는 경우엔 연애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될 것이다. 이치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랑의 패턴은 삶의 패턴과 나란히 함께 간다.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은 멋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절대! 따라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형을 만나도 소용없다. 왜?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눈에 안경이니, 눈에 콩깍지가 씌었느니 하는 말이 다 거기에서 연유한다. -113쪽
오래된 미래, 도래할 과거
고전이 있기에 그 협소한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역사의 궤적을 조망할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탐구할 수도 있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체험할 수도 있고, 생명과 존재의 심연을 항해할 수도 있다. (...) 다시 말해, 그런 책과 접속하는 순간, 나는 단번에 우주적 존재로 도약한다. 앉아서 유목하기! 방에 앉아서도 천하의 이치를 관통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119쪽
차이를 구성하라
대상이나 방법론이 무엇이건 지식인이라면 일단 자신이 던진 물음과 ‘온몸으로’ 마주하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처럼 말이다. ‘화살-되기’
그러다보면 문득 알게 된다. 내가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료가 내 신체를 통해 스스로 웅성거린다는 것을. 세상 가득히 앎의 흐름이 있고, 나는 단지 그 흐름 속을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다는 것을. -132쪽
글쓰기의 운명
한 일간지 기자가 내게 물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좀 엉뚱한 질문이긴 했지만, 나는 즉시 이렇게 답했다. “글이 참 재미있네, 혹은 이 사람 역시 훌륭해! 이런 평가는 받고 싶지 않아요. 내 글을 읽고 나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게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참 좋겠어요.” 그렇다.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139쪽
최고로 좋은 운세란 운명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이름하여, 운명애(Amor Fati)! 나쁜 운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운이 좀 나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그것을 인생의 자산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개발하는 것, 다시말해 화를 복으로 바꾸는 습관 혹은 훈련 말이다. 그런 식으로 운세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다가오는 지금, 여기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운세가 어디 있으랴. -170쪽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 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 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176쪽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 보면 본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억압이고 명령에 불과하다. -177쪽
학교는 공부를 독점함으로써 전 사회를 학교화하고 말았다. 자격증과 학벌, 국경 등 온갖 처벌을 뼈와 살에 사무치게 만들어버리는 볼모적 공부법! 하지만, 그런 공부를 전복해버리면 천하가 다 배움터가 된다. 순임금과 공자가 천하를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도 천하를 다 배움의 장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다만 배움의 열정 뿐. 그러므로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일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 -181쪽
‘사이’에서 존재하기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대승기승론소)”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희노애락은 그 자체로는 번뇌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은 거기에다 자신의 전도망상을 덧씌움으로써 스스로 번뇌를 쌓아간다. 그게 바로 두 번째 화살이다. 그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온갖 감정의 회오리는 내 스스로 지은 두 번째 화살이었구나. -191쪽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공부하면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것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193쪽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완벽한 독서를 희망하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국의 땅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모른다. 도대체 어떤 감미로움이 사람을 고향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리고 고향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현명한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성 빅토르 위그 『공부』
고향은 없다
공부하는 이들은 고향을 떠남과 동시에 ‘반-기억’(counter-memory)을 수행하여야 한다. ‘반-기억’은 일종의 망각 능력이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몽땅 지워버리는 식의 망각은 아니다. 중요한 건 기억이냐 망각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과거의 기억을 삶의 새로운 배치 속으로 밀어넣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에게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 곧 ‘의지의 기억’이다. 자신이 의욕한 것을 잊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능력, 그 때문에 그의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한다』)
요컨대,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 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195쪽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미국이 혁명으로 약동하던 20세기 초 유명한 혁명가로서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편집자였던 엠마 골드만의 발언)라고 했듯이, 시간을 견뎌내고, 일상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단언컨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억압과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그것이 곧 혁명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공부로부터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외되지 않는 자만이 구조적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 …… 노동해방이란 노동자가 중산층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스로 자율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과 세계를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200쪽
정약용 「賦得山北讀書聲」
天地何聲第一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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