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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명변 - 기(記)라는 문체에 대해 본문

산문놀이터/문체글

문체명변 - 기(記)라는 문체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19. 10. 2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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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문체에 대해

 

서사증(徐師曾)

 

 

金石例: “記者, 紀事之文也.” 禹貢顧命, 乃記之祖. 而記之名, 則昉於戴記學記諸篇. 厥後, 揚雄蜀記, 文選不列其類, 劉勰不著其說 則知漢魏以前, 作者尙少.

其盛自唐始也, 其文以敍事爲主, 後人不知其體, 顧以議論雜之. 陳師道: “韓退之作記, 記其事耳; 今之記, 乃論也, 蓋亦有感於此矣.”

然觀燕喜亭記, 已涉議論, 以下, 議論寢多, 則記體之變, 豈一朝一夕之故哉.

故今採論諸記, 而以三品別之, 如碑文之例. 欲使學者, 得其所考. 而又有託物而寓意者, 有首之以序而以韻語爲記者, 有篇末系以詩歌者, 皆爲別體. 文體明辯

 

 

 

 

해석

金石例: “記者, 紀事之文也.”

금석례(金石例)에서 ()라는 것은 일을 기록하는 문장이다.”라고 말한다.

 

禹貢顧命, 乃記之祖.

우공(禹貢)고명(顧命)이 곧 기문의 비조(鼻祖).

 

而記之名, 則昉於戴記學記諸篇.

()라는 이름은 대기(戴記)학기(學記)의 여러 편에서 찾아진다.

 

厥後, 揚雄蜀記, 文選不列其類,

그 후 양웅이 촉기를 지었는데 문선에는 그 종류가 나열되지 않았으니

 

劉勰不著其說 則知漢魏以前, 作者尙少.

유협이 그 말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한나라와 위나라 이전을 알아 짓는 이들은 오히려 적었으리라.

 

其盛自唐始也, 其文以敍事爲主,

기문의 성대해짐은 당나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문장을 지을 적엔 서사를 위주로 삼았는데

 

後人不知其體, 顧以議論雜之.

후대 사람들이 체제를 알지 못하고 다만 의론을 섞었다.

 

陳師道: “韓退之作記, 記其事耳;

그러므로 진사도는 말했다. “한퇴지가 지은 기문은 그 일을 기록했을 뿐이지만,

 

今之記, 乃論也,

지금의 기문은 곧 의론문이니,

 

蓋亦有感於此矣.”

대체로 또한 여기에 유감스럽다.”

 

然觀燕喜亭記, 已涉議論,

그러나 연희정기를 보면 이미 의론을 섭렵했고

 

以下, 議論寢多,

구양수와 소식 이후론 의론이 점점 많아졌으니

 

則記體之變, 豈一朝一夕之故哉.

기문 문체의 변화가 어찌 하루 아침과 하루 저녁에 따른 것이겠는가.

 

故今採論諸記, 而以三品別之,

그러므로 이제 여러 기문을 채집하여 논함에 세 개의 등급으로 나누니

 

如碑文之例.

비문의 예와 같아

 

欲使學者, 得其所考.

학자로 하여금 상고할 바를 얻게 하려 한다.

 

而又有託物而寓意者,

또한 사물에 의탁하여 뜻을 붙이는 경우도 있고

 

有首之以序而以韻語爲記者,

책 머리에 서문을 짓고 시어로 기문을 짓는 경우도 있으며

 

有篇末系以詩歌者, 皆爲別體.

글 끝에 시가를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모두 별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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