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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6부 표류하는 고려 -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망이 망소이, 신종, 만적)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망이 망소이, 신종, 만적)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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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하극상은 정치 무대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도 맑을 수 없는 건 당연할뿐더러, 원래부터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사회였으니 한복판이 혼탁해진 판에 변두리가 멀쩡할 리 없다. 정계에서 권력을 놓고 무신들이 푸닥거리 굿판을 벌이는 동안 그 혼란스런 분위기는 금세 사회 전반으로 전염되었다.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은 그나마 관료 집단이 이끈 반란이었고, 따라서 권력을 목표로 한 쿠데타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 다음부터는 일반 농민이나 천민이 들고 일어났으니 말 그대로 민란(民亂)’, 즉 하극상의 극치다.

 

봉기의 신호탄이 터진 것은 조위총의 난이 미처 끝나기도 전인 11761월이었다. 공주의 명학소에 살던 천민인 망이와 망소이는 동료 천민들을 이끌고 공주 관아를 습격해서 기세를 올렸다명학소의 소()란 향(), 부곡(部曲) 등과 함께 고려의 지방행정제도에서 최말단에 속하는 구역이다. 이들 지역에 사는 천민은 신분상으로 노비보다 약간 나았지만 실은 노비나 다를 바 없었다. 개인 노비가 아니라 국가에서 부리는 노비라고 보면 된다. 다만 소의 천민은 향민이나 부곡민과 달리 특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향과 부곡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제도로, 둔전이나 공해전(公廨田,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는 토지) 같은 국유지를 경작하고 토목공사에 동원되었으나 소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특수한 물건들을 생산했는데, 기능으로 보면 오늘날의 국영기업체에 해당한다. 금광을 채굴하면 금소(金所), 도자기를 만들면 자기소(瓷器所), 종이를 만들면 지소(紙所), 소금을 생산하면 염소(鹽所)라고 부르는 식이다.

 

당시 집권자였던 정중부는 북쪽을 막는 데 정신이 없는 데다 왕실의 공주를 며느리로 맞으려는 판에 남쪽의 공주에서 난리가 일어났으니 제대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정부는 반군 측에 황급히 사신을 보내 어떻게든 달래보려 한다. 그러나 이미 공주를 장악한 데다 병마사를 자칭할 만큼 세력이 커진 망이와 망소이는 아무 소득도 없이 깃발을 내릴 의사가 전혀 없다. 정부는 강경책으로 돌아서서 3천의 군대로 진압에 나섰지만, 오히려 천민 반란군에게 정부군을 물리쳤다는 자부심마저 안겨주는 결과를 낳고 만다. 결국 정부는 다시 유화책으로 나서서 명학소를 충순현이라는 정식 현으로 격상시켜주겠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오죽 다급한 심정이었으면 현 이름도 충성스럽게 순종하라는 충순忠順일까?).

 

그러나 한껏 끗발이 오른 반란군은 그 제안마저 거부하고 예산과 충주까지 점령하면서 전선을 확대한다. 자칫하다간 후삼국시대 이래 25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을 판이다. 다행히도 때마침 1176년 말에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면서 여유를 찾게 된 정부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전환하여 반군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양측은 강화를 도모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반군의 입장에서 정부의 약속을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정부는 약속대로 충순현을 설치했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책임자 처벌을 건너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이 체포되자 망이와 망소이는 다시 들고 일어나 이번에는 개경까지 함락시키겠다고 을러댔다. 비록 으름장이긴 하지만 아산까지 손에 넣고 충청도 일대를 거의 장악한 그들을 더 이상 내버려 두었다가는 아예 나라를 둘로 나누자고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정부는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함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벌써 몇 차례나 오락가락과 갈팡질팡을 거듭하던 정부였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연 반군의 상대는 아니다. 게다가 정부군은 프로 군인이지만 반군의 주축인 농민들은 군인으로서는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식량과 무기가 제한되어 있어 장기전에는 승산이 없는 데다가 농번기에 들어 농민들이 대열에서 이탈하자 반군의 힘은 급격히 약화된다. 결국 1177년 여름에 망이와 망소이가 체포되면서 반군은 완전히 소탕되었다.

 

 

하극상의 시대 무신정권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국가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었다. “저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하급 관리, 양민, 천민까지 하극상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지도는 1170년 무신정권이 성립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보여준다.

 

 

비록 반란으로 중앙정부가 무너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으나 이미 고려 사회는 총체적인 하극상으로 온통 만신창이가 되었다. 백성들은 걸핏하면 관청을 불사르고 양곡을 탈취하는가 하면, 관청의 노비들마저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다. 경대승(慶大升)의 집권기에 중앙 권력이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하던 민란은 이의민이 명종의 초대를 받아 권좌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다시 터져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1193년 김사미(金沙彌, ?~1194)와 효심(孝心, ?~1194)이 일으킨 반란은 신라 부흥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경상도 청도에서 봉기한 김사미와 멀지 않은 울산에서 일어난 효심은 자연스럽게 한 무리를 이루었고 신라를 부활시키겠다고 호기롭게 주장했다. 그들도 아마 동향의 집권자인 이의민과의 전략적 제휴를 염두에 두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의민이 그들과 내통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들 이지순(李至純)이 정부 진압군에 관한 정보를 비밀리에 전달한 덕분에 반군은 여러 차례 관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그 해 말에 파견된 대규모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몇 년 뒤 이의민이 실각한 데는 이미 이 사건에서 헛다리 짚은 후유증이 컸을 것이다.

 

이제 집권자는 민란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의민을 살해하고 집권한 최충헌도 예외가 아니다. 불행이라면 그에게 주어진 시험문제는 그 전까지의 어느 것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관리에서 농민으로, 농민에서 천민으로 반란 주동자의 신분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면, 그 저점은 바로 노비가 될 것이다. 과연 최충헌이 해결해야 할 민란은 바로 고려 사회의 최하층인 노비들이 일으키게 된다.

 

사실 최충헌은 처음부터 자기가 이전의 깡패 같은 무신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애썼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그는 자신이 지닌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나, 국가 운영을 위해서나 무엇보다 질서를 회복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말하자면 권력을 누리는 데 급급했던 이의민보다는 권력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려 했던 경대승(慶大升)의 해법을 따른 것이다(실제로 최충헌은 경대승과 더불어 무신 집권자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며, 처음에는 문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封事) 10조라는 개혁안을 올렸는데, 아마도 그는 명종이 그것을 제대로 시행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듬해인 1197년에 그것을 빌미로 명종을 폐위하고 후임 허수아비로 명종의 아우인 신종(神宗, 재위 1197 1204)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신하가 국왕을 갈아치우는 하극상이 일어났으니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번질 것은 이미 각오한 일, 그러나 하필이면 수도 개경의 노비들이 봉기할 줄은 최충헌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말하는 짐승 고려시대의 노비 상속문서다. 물론 노비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게 아니라 귀족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를 자식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는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를 말하는 짐승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신정권으로 윗물이 흐려지자 아랫물도 탁해져서 노비까지 들고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1198년 늦봄에 노비인 만적(萬積, ?~1198)은 동료 노비들과 함께 개경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장연설을 한다. “무신란 이후 천한 노비가 고관대작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신으로서 집권한 자들은 경대승과 최충헌을 제외하면 모두 근본 없는 천민 출신이었으니,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얼핏 시대를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슬로건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당시 대부분의 민란을 신분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런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 물론 천민들이 봉기한 데는 사회적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감이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당시의 정황에서 민란의 주동자들조차 실제로 자신의 슬로건을 액면 그대로 믿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김사미의 신라 부흥이나 만적의 연설을 과연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하필 그때 그런 구호를 외쳤는가 하는 점이다. 정중부의 난으로 국가 질서 자체가 무너진 시기가 아니었다면 그게 가능했을까?? 동양보다 시민의 역사가 훨씬 앞서는 서구의 역사에서도 신분해방의 요구가 실제로 제기되는 시기는 16세기부터다. 따라서 민란의 주동자들은 그저 하극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이득을 취하려 했을 뿐이다.

 

사회의 최하층 신분이 스스럼없이 최상층 신분을 넘볼 만큼 고려의 병은 깊다. 요즘 같으면 유동성이 흘러넘치는 바람직스런 사회라고 하겠지만, 자치와 자율의 역량을 갖춘 시민의 시대가 오기 훨씬 전이니 그건 명백한 사회 혼란이다. 만적의 생각은 쉽게 말해 남이 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는 것, 혼란을 틈타 신분 상승을 이뤄보자는 것뿐이다. 좋게 말해 몽상가,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을 만큼 배짱이 두둑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내친 김에 그는 노비들에게 자신의 엄청난 음모를 밝힌다. 거사 일자를 정하고 그 날짜에 모두 함께 궁성으로 쳐들어가 같은 신분인 궁노들을 규합하자. 그리고 집권자인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자 자기 주인집으로 가서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 노비문서)을 불사르자.

 

계획대로 되었다 해도 성공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겠지만 그 음모는 실행에 옮겨지지도 못했다. 사실 만적의 허망한 꿈을 믿은 노비는 그 자신을 비롯해서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분위기에 취했을 따름이다. 그 나머지 중 하나가 자기 주인에게 음모를 고발하자 그 엄청난 거사는 불발로 끝나고 만다. 결국 아무 것도 실행되지 못하고, 나무하러 갔다가 애꿎게 끼여든 100여 명의 노비들만 몰살당한 셈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반란이 역사상 유명한 사건으로 남게 된 건 순전히 후대의 역사가들이 신분해방이라는 후대의 이념으로 과대포장한 덕분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쿠데타의 조건

한 세기를 끈 쿠데타

하극상의 시대: 윗물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

틀을 갖춘 군사독재

격변의 동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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