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갖춘 군사독재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했을 때 아마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틸까였을 것이다. 정중부 이래로 30년 남짓 지나는 동안 권좌의 임자는 벌써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경대승(慶大升)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후임자의 손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비록 최충헌이 나름대로 소신있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본색이 드러날 테고 누군가에 의해 칼로 일어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러나 최충헌은 난세의 리더답게 잔머리와 냉혹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봉사 10조를 이용해서 임금을 갈아치운 게 잔꾀라면, 동생인 최충수(崔忠粹, ?~1197)를 죽인 것은 그의 단호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동생(터무니없게도 그들 형제는 이의민의 아들이 최충수 집의 비둘기를 빼앗으려 한 사건을 계기로 거사
했다)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집어넣으려 하자 최충헌(崔忠獻)은 동생을 죽여 분쟁의 싹을 제거해 버렸다.
동생이자 동지마저 죽일 정도라면 그가 권력을 누구와도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 과연 그는 정적은 물론이고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가차없이 숙청한다. 여기에는 국왕마저 열외가 아니다. 1204년 병에 걸린 신종의 뒤를 이은 희종(熙宗, 재위 1204~11)이 내시와 모사해서 최충헌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자 최충헌은 주저없이 희종을 폐위하고 명종의 아들을 불러다가 강종(康宗, 재위 1212~13)으로 즉위시킨다. 덕분에 강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늙은 나이(예순)로 즉위한 임금이 되었는데(왕계가 불명확한 삼국시대 초기왕들은 제외다), 얼마 못 가서 죽고 아들 고종(高宗, 재위 1213~59)에게로 왕위가 계승된다. 최충헌은 자신의 집권 시기에 네 명이나 왕을 갈아치우고 왕계도 마음대로 바꾸면서 고려 왕실을 주물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충헌(崔忠獻)이 왕위계승보다 더 중시한 것은 실질적 집권자의 계승이다(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계승보다 바쿠후 정권의 소유자인 쇼군의 계승이 더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왕이야 어차피 바지저고리니까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애써 장악한 실권이 자기 가문에서 상속되지 못한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된다. 게다가 어차피 무신정권이 들어섰으니 나라를 위해서도 정권의 안정이 무엇보다 긴요할 터이다. 여기서 그는 자연스럽게 선배들의 집권 과정으로 눈을 돌린다. 이고, 이의방, 이의민은 함부로 권세를 휘두르다가 살해당했고, 정중부 일가는 권력의 세습까지는 성공했으나 권력을 유지하기보다 향유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앞의 세 이씨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본받을 선배는 경대승(慶大升)밖에 없다. 그래서 최충헌은 경대승이 설치한 도방을 부활하고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친위대는 단기적으로 권력을 보장해주지만 장기적으로 국정 운영의 기구는 되지 못한다. 아마 경대승도 더 오래 살았더라면 도방만으로 국정을 완전히 커버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으리라. 그럼 뭐가 또 필요할까?
고민하던 최충헌(崔忠獻)에게 해답을 준 것은 불교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계시라도 받았을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극을 가한 것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조직으로서의 불교였다. 당시
최충헌의 독재에 맞설 만한 유일한 세력은 사원이었다. 고려 초기부터 사원들은 면세의 특권을 누리면서 방대한 사원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왕실이나 귀족 세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자체 무장 조직까지 갖추고 있었다(나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단단히 한몫을 하게 되는 승병의 기원이다). 1209년 최충헌에 반감을 품은 청교(靑郊, 지금의 개풍)의 관리들은 사원 세력을 규합해서 독재를 타도하고자 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비밀 결의문이 사원들을 두루 거치며 전달되다가 귀법사에 이르렀을 때 결국 펑크가 나고 만다. 귀법사 승려의 전갈을 받은 최충헌(崔忠獻)은 즉각 진압에 나선다(희종이 폐위된 것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무신정권이 성립하자 종교로서의 불교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불교는 의천의 영향 아래 발달한 교종 계통의 천태종이 지배했는데, 그에 맞서 이 시기에는 선종 계통의 조계종이 새로 발달하게 된다. 오늘날 불교계의 2대 종파가 이 무렵에 형성된 셈이다. 조계종의 스타는 보조국사로 알려진 지눌(知訥, 1158~1210)이다. 그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성행하던 교종보다 선종을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주장했는데, 하극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걸맞은 종교개혁이라 하겠다. 아마 최충헌에 대한 반란도 당시 지눌이 선도한 불교 대통합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의천과 지눌은 모두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외쳤지만, 그 생리상 완전 통합은 불가능했다 (쉽게 말해 교종은 교과서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선종은 깨달음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어 오늘날 불교계에서도 공부와 깨달음의 우선순위를 놓고 자주 논쟁이 벌어지지만, 그건 사실 닭과 달걀의 논쟁과 다를 바 없고 불교만이 아니라 어느 종교나 학문에서도 흔한 쟁점일 뿐이다)】. 이것을 계기로 사원 세력은 일망타진되었고 최충헌(崔忠獻)은 덤으로 고민을 해결했다. 반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아예 상설기구화한 것이다.
출발부터 그랬으니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당연히 정치인과 관리에 대한 사찰이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기구로 출발했던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총괄하게 된다. 교정도감을 상설화하면서 최충헌(崔忠獻)은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신의 적절한 직함도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정도감의 책임자, 곧 교정별감이다(1205년에 그는 꿈에도 그리던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낡아빠진 문신의 최고위직이란 이미 그에게 어울리는 직함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교정도감은 무신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 일본사에 비유하면 바쿠후의 쇼군에 해당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우리 현대사에 비유하면 교정도감은 박정희 정권 때 설치된 중앙정보부, 교정별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장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신정권은 시대를 초월한 독재권력의 전형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다.
이렇게 권력이 안정되자 최충헌(崔忠獻)은 비로소 다른 분야에도 신경쓸 여유를 얻게 된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으나 중앙 권력이 확실한 만큼 버텨낼 수 있고 차차 질서를 잡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과제는 권력의 태생적인 결함, 즉 물리력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는 취약점을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하여 문신들을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여유에서 나온 노선 전환이다(그런 탓에 이규보는 권력에 아부한 지식인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왕조 시대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의미한 비난이다).
시대를 앞서 ‘군사파쇼’의 기틀을 마련했던 덕에 최충헌(崔忠獻)은 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한다는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비록 1217년에는 다시 들고 일어난 사원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승려 800명을 집단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2년 뒤인 1219년에 그는 암살이나 살해가 아닌 정상적 죽음을 맞았고, 교정별감이자 고려판 중앙정보부장이자 한반도판 쇼군의 지위는 아들 최우(崔瑀, ?~1249)에게로 순조롭게 상속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 무신정권이지 이제 고려는 왕국이 아니라 깡패 집단이 지배하는 나라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 보스는 대물림이 가능하니까 단순한 ‘조폭’ 정도가 아니라 마피아 수준이다. 무신 집권자로서는 처음으로 권력을 무난하게 상속받았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아버지 최충헌이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급급했다면, 최우는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창조적인(?) 독재정권으로 발전시킨다.
그가 창조한 기구는 정방(政房)과 서방(書房)인데, 이름부터 ‘청(廳, 관청)’이 아닌 ‘방(房)’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둘 다 최우의 집안에 설치된 지배기구다. 기능 면에서 정방은 쉽게 말해 집안에 있는 교정도감에 해당한다. 힘으로 정상에 오른 권력자가 흔히 걱정하는 것은 바로 잦은 바깥 출입에서 변을 당하는 일일 테니까 최우는 아예 집안에서 모든 국정을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정방은 무신들이 완전 독점한 교정도감과 달리 문신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지배기관이란 점에서 나름대로 정치기구로서의 면모는 더 분명하다고 하겠다(그 덕분에 훗날 무신정권이 끝났을 때 교정도감은 폐지됐으나 정방은 계속 남게 된다). 이제 최우(崔瑀)는 문무 양측을 다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다. 정방보다 문신 참여율이 더 높은 서방까지 창설한 것은 그런 자부심의 발로다. 정방이 집행기관이라면 서방은 국정 자문기관이므로 문신과 유학자들을 대거 참여시킬 수 있는 데다 무신정권기에 소외됐던 문신 세력을 회유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으니 최우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다.
이렇게 해서 바깥에는 별채(교정도감), 집안에는 방 세 개(도방, 정방, 서방)를 갖추고 수많은 사랑방 손님과 식객들(문신, 유학자)까지 거느리는 것으로 ‘무신의 집’은 완공되었다. 이렇게 지배기구를 완비하고 나서 최우(崔瑀)는 미뤄두었던 군제 개편에 나선다. 장기집권은 물론 권력 세습까지 보장된 판에 사병 조직이란 어울리지 않을 터, 그래서 그는 새로 마별초(馬別抄)라는 군대를 창설한다【별초란 이름 그대로 ‘특별히[別] 뽑은[招]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있었는데(앞서 윤관이 편성한 별무반도 별초의 하나다), 마별초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 전까지 고려의 군대 조직은 궁성 경비대와 변방의 진지에 주둔한 군대 이외에 별도로 상비군이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이를테면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모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우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편성한 셈이다(최초의 상비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무신 권력을 수호하는 목적을 지녔다는 것은 보기에 영 좋지 않지만). 이는 잠시 뒤에 나오겠지만 몽골이 성장하고 있는 대륙의 정세 변화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 역시 도방처럼 최우의 친위대였으므로 사병 조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도방이 보병들로 이루어진 데 비해 마별초는 기병대였으므로 일종의 의장대와 같은 역할도 맡았다. 마별초에서 재미를 본 최우(崔瑀)는 이후 도성 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도 편성했는데, 나중에 인원이 많아지면서 야별초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여기에 신의군(神義軍,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만든 군대)이 더해지면서 후대에 삼별초(三別抄)라 알려진 군대를 이루게 된다.
최충헌(崔忠獻)과 최우 부자의 2대에 걸친 노력으로 그간 혼란스러웠던 중앙 권력은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정상적인’ 왕국이었던 그 전과는 너무도 다른 체제다. 나라의 대표자라는 상징적 존재로만 강등된 국왕, 그리고 실권을 지닌 최씨 무신정권, 왕위와 실권자가 모두 세습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만큼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지배 체제는 그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려는 나라의 이름만 변하지 않았을 뿐 이 무렵에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무신정권기부터 고려 사회는 지배권력의 성격만이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면에서도 전과는 다른 측면을 보이게 된다. 별일만 없었다면 아마 이후부터는 그런 변화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지연시킨 ‘별일’이 고려 바깥에서 터진다. 최씨 집권 이후에도 간간이 터져나오던 민란들마저 중단시키고 전국을 폭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그 사건은 바로 몽골의 침략이다.
▲ 군사파쇼의 시대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설 무렵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도 무신정권의 일본 버전이라 할 바쿠후가 성립했다. 그림은 바쿠후 정권을 낳은 헤이지의 난이라는 내전의 장면인데, 국왕과 중신들만을 처단하고 손쉽고도 평화롭게(?) 집권한 고려의 무신들에 비해 일본의 무사들은 서로 간에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서 군사파쇼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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