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동북아
최우(崔瑀)가 정작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자기 집 바깥이 아니라 나라 바깥이었다. 그에게 최소한의 역사적 안목만 있었더라도, 고려의 대내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외적인 국제질서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송과의 국교를 트면서 광종(光宗) 대에 왕권 강화의 기회가 주어졌고, 거란의 요나라에 복속되면서 현종 대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회를 맞을 수 있었던 고려가 아니었던가? 비록 여진의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이후에는 안정을 누리는 대신 내란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권력 구조 내부에 누적되어 오던 외척 세력과 문치주의의 모순이 분출되고 해소되는 과정이었으니 나름대로 필요한 단계였고 긴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고려 왕조가 틀을 갖추고 발전해 오는 과정에는 고비고비마다 대외 정세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런데 다시 그 바깥의 정세가 달라지고 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조위총이 원조를 요청했을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그의 사신을 고려 정부에 인계할 만큼 고려와의 군신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했던 금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족 제국이든 이민족 제국이든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하는 왕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면 금나라는 북송을 멸망시킨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대륙 정복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요나라처럼 단명한 제국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란이 랴오둥에 안주한 탓에 크게 뻗지 못했다는 점을 처음부터 알고 출발했던 금나라였지만, 막상 북송을 정복하고 중원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성공에 도취해 버렸다. 고려가 내란에 시달리던 시기에 금나라는 정복왕조의 껍데기를 벗고 중국식 제국 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그 때문에 고려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북중국에 국한된 ‘반토막’ 제국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금나라는 정복왕조 특유의 활력마저 잃게 된다. 12세기 중반 한때 남송 정복에 나섰다가 내부 반란으로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북방에는 다시 세대 교체의 분위기가 숙성되었다. 역사의 시간표에 따르면 다음의 임자는 누가 되든 요와 금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고 중국 대륙 전체를 정복할 웅지를 지닌 민족일 게 분명하다. 요는 송을 제압했고 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화북을 먹었으니 다음의 패자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게 뻔하다는 이야기다. 그 새 임자는 누굴까? 바로 몽골이다.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몽골 초원에서 12세기 말부터 통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몽골 한 부족의 족장이었던 테무진은 인근 부족들과 연대와 투쟁을 거듭하면서 드디어 1189년에 몽골 부족연합의 맹주로 추대되어 칭기즈 칸(1162~1227)【칭기즈 칸은 한자로는 成吉思汗이라고 쓰고 읽기는 Chingiz Khan이라고 읽는다(한자를 우리말로 읽으면 ‘성길사한’이 되겠지만 발음을 그렇게 표기한 것일 뿐 한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汗, Khan)이라는 글자다. 몽골만이 아니라 원래 중국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우두머리를 한, 간, 칸 등으로 불렀는데, 이 말의 한자어 표기가 바로 汗이다. ‘한’의 음은 ‘간’이나 ‘칸’과 통한다. 음운 구성상으로도 k음(ㄱ, ㅋ)과 h음(ㅎ)은 서로 통한다(예를 들면 Cossack를 ‘카자흐’로 읽는다든가 Khrushchev를 흐루쇼프 라고 읽는 경우다). 그렇다면 신라 초기의 왕명이었던 거서간이나 마립간의 간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이사금, 왕검, 임금 등의 금이나 ‘검’도 같은 기원일지 모른다). 앞서 신라는 외래 이주민들, 특히 북방 출신의 민족들이 유입되면서 형성된 나라라고 했는데,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1206년 그는 통일을 완료하고 몽골제국을 세웠으며, 9년 뒤에는 금나라의 수도이자 중원의 중심인 연경(燕京, 베이징)을 손에 넣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최충헌(崔忠獻)이 독재의 기반을 구축하고 이들 최우(崔瑀)에게까지 권력을 물려줄 수 있었던 데는 몽골이 한반도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 크다. 칭기즈 칸은 사실 한반도는커녕 중국 대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송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역(중앙아시아)과의 경제적 교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그는 금나라를 제압해 놓는 선에서 동방 경략을 일단락짓고 서역 원정에 나섰다. 예부터 동서 무역의 중추였던 실크로드를 장악해서 경제 대국을 이룩하는 게 그의 목표였으니, 과연 이 민족 왕조의 리더답게 그는, 중화세계에 만족하는 한족의 천자였다면 품지도 못했고 품을 필요도 없었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멀리 호라즘(지금의 이란)까지 정복해서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비로소 아버지 칭기즈 칸을 계승한 오고타이 칸(재위 1229~41)은 그때까지의 노선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그의 과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계승하는 것, 둘째는 신흥 몽골제국을 반석 위에 올리는 것. 카라코룸(Karakorum, 喀喇崑崙)에 궁성을 지어 수도를 옮기고 새로 얻은 정복지들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예법과 의식, 화폐제도와 조세제도를 정비해서 정복왕조의 한계를 탈피하려 한 것은 둘째 과제에 속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들은 첫째 과제를 실행하기 위한 예비절차에 불과하다. 궁극적 목표인 정복의 완성을 위해 그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동아시아 경략에 나서는데, 그 일환으로 1231년부터 시작된 게 바로 고려 정벌이다【몽골 제국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 고려 정벌은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은 1234년 금나라의 명맥을 끊었고, 그 이듬해에는 역사적인 유럽 정벌을 시작했다. 바투가 이끄는 20만의 유럽 원정군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6년 만에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유린하고 서유럽의 관문인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접경지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만 오고타이가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철군하게 된다. 당시 정복의 초점은 당연히 유럽 전선에 있었으므로 한반도의 고려는 정복이라기보다는 단지 후방 다지기의 대상에 불과했다. 실제로 고려 정벌도 몽골 주력군이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할당받은 칭기즈 칸의 동생 오치긴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고려는 3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고려가 세계제국 몽골을 맞아 엄청난 항전을 벌인 것처럼 지나치게 과대포장하는 건 곤란하다】.
▲ 역전되는 문명 드디어 비중화세계의 뒤집기가 이루어졌다. 동아시아 문명의 발생 이래 내내 중화세계에 뒤져 있던 중국 북방의 유목문명은 중화 농경문명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동안 꾸준히 힘을 키워오다가 마침내 중화세계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림은 그 초석을 놓은 칭기즈 칸의 몽골병사들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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