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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우효ㆍ우충ㆍ우열의 역사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우효ㆍ우충ㆍ우열의 역사

건방진방랑자 2023. 3. 3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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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효ㆍ우충ㆍ우열의 역사

 

 

조선조 오백년을 통하여 삼강행실도가 가르친 우효(愚孝)ㆍ우충(愚忠)ㆍ우열(愚烈)의 소행은 참으로 비참한 수준의 것이었다.

 

송ㆍ원대에 이십사효가 확립된 이래, 이러한 우효의 관행은 명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의 관학화와 더불어 엄청난 포퓰리즘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것은 명태조 주원장의 개인 싸이콜로지(psychology, 심리학)와도 관계가 있었다. 주원장은 천애(天涯)의 고아(孤兒)로 자라나 천자가 된 인물이다. 우리나라 북녘땅 곳곳의 민담 중에 주원장이 자기네 동네 고아였다는 설화가 많이 있다. 그토록 그는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포의(布衣)로서 민간의 빈곤과 질고를 충분히 체험하였으며, 민간에서의 효도의 거대한 효용을 숙지하였다. 더구나 원나라 통치를 통하여 북방 유목민족의 악습과 괴이한 가정풍습(형이 죽으면 형수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등등의 풍습)이 중국인에게 침투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중국 정통의 종법개념과 일가일성(一家一姓)의 효도를 새롭게 확립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더구나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된 후에도 자신의 영화를 같이 나눌 수 있는 혈육이나 부모가 없다는 고아로서의 고독감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뼈에 사무치게 만들었다. 그는 조종(祖宗)에 제사를 지낼 때도 실제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청나라도 이민족으로서 중원을 제패했을 때, 한민족의 민족적 감정을 억누르고 충군(忠君)케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효도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비법을 그들은 일찍이 체득했다. 순치(順治)황제도 입관(入關)하여 자금성의 주인이 된 후 얼마 안 되어 친히 효경을 주석했고, 강희제도 강희 46년에는 만한합벽(滿漢合璧: 만주어와 중국어가 같이 쓰여짐)효경을 간행했다. 옹정제도 옹정 5년에 흠정(欽定)의 새로운 효경을 판각하여 반포시켰다. 그리고 역대 효경의 중요한 주해를 회집(匯集)하여 효경집주(孝經集註)를 간행하였다.

 

이들은 효의 충화(忠化)야말로 한족을 통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희제는 효야말로 백행지본(百行之本)이요, 만사지강(萬事之綱)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효로써 위로는 신명에 감응하고[上感神明], 아래로는 민심을 순화시킨다[下順民心]는 효치(孝治)의 이념에 철저했다. 그는 강희 16년에 인심풍속치치미정십육조(人心風俗致治美政十六條)를 반행(頒行) 했는데 그 제1조가 효제를 돈독히 함으로써 인륜을 중시하고[敦孝悌以重人倫], 종족을 돈독하게 함으로써 화목을 밝힌다[篤宗族以昭雍睦]’라는 것이다. 명대의 썩어문드러진 황제들에 비하면 청조의 이민족 황제들은 학술과 문화에 밝은 개명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명ㆍ청대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그 양 조대에 걸쳐 지속된 조선왕조는 안심하고 삼강행실도의 우효(愚孝)ㆍ우충(愚忠)ㆍ우열(愚烈)의 우행을 선전한 것이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상당수의 우행들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효경의 종지에 어긋난다. 송대는 이러한 우효(愚孝)를 조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전통에 물들지 않은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송나라 사람들이 최고의 효행이라고 여긴 단지(斷指: 손가락을 자름)와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 료친療親), 그리고 효도를 위하여 자녀를 상해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원조(元朝)가 지난 후, 명ㆍ청대에는 다시 이러한 송대의 분위기가 부활된 것이다. 효행의 포퓰리즘은 날로 극단화되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단지나 할고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소독(sterilization: 미생물 발견 이후에 생겨남)관념이 전혀 없었던 시대에 부엌칼로 자기 살을 에어내는 고통이란 형언키 어려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균감염(infection)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죽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몇 사람이 쾌차되어 표창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우매한 소행에 우리는 낭만성을 부여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공자라도 괘씸하게 생각했을 우행일 뿐이요 인권의 유린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은 만청에서 끝난 우행이, 일제의 악랄한 압제수탈시기를 통하여 더욱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교풍회(矯風會) 등의 조직을 통해 효자ㆍ열녀에게 상을 내리고, 명륜회와 향교도 삼강적행위에 대하여 적극적 권장을 하였다. 조선총독부와 천황에 복종하는 식민지 국민을 만드는 데 삼강적 인간상은 매우 유효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유교도덕을 부르짖는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반공이나 부르짖고 친체제적인 사유에 물들어 있는 까닭은 그들이 참다운 효경의 도덕을 배우지 못한, 모두 일제 끄나풀에 불과한 세도가나 우매한 촌로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유학이라 하면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것이다이러한 문제는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5장 주영하의 글을 보라.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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