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의 지방정권 노릇을 자임함으로써 적어도 한반도는 완전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들었지만,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가 탄생하는 과정은 중국이 바라는 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문제는 랴오둥이다. 한족 왕조인 당의 입장에서 볼 때 친소(親陳)의 스펙트럼은 확연하다. 우선 중원 북방 몽골 초원의 오랑캐들은 전통적으로 노골적인 적이므로 초지일관 적대시하면 된다. 또한 한반도의 오랑캐들은 늘 자발적으로 중국의 한족 왕조에 접근해 왔으므로 특별대우만 해주며 다독거리면 만사 오케이다. 그러나 그 스펙트럼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랴오둥 ― 압록강 이북 지역은 언제나 중국에 양면적인 태도, 중국의 힘이 강하면 사대하고 약하면 저항하는 태도 ― 를 취해왔으므로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태도 역시 늘 미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고구려처럼 이 지역을 관할하는 확실한 임자가 있을 때는 차라리 속편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임자가 고구려처럼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당은 고구려를 제거한 것이지만 어차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랴오둥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구사해서 랴오둥에 특정한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것은 불가피하게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을 만들어냈다. 비록 안동도호부라는 지배 기구가 있다지만 제국 정부의 힘은 장성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 결국 그 공백은 이 지역에 또 다른 정치적 변동을 유발한다. 그 신호탄은 696년에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듬해 이들은 장성 바로 안쪽의 베이징까지 공략했다가 당의 사주를 받은 돌궐에 의해 진압되지만, 이제 이곳에 국지적 질서를 유지할 만한 중심 세력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쉽게 말해 랴오둥은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주인 없는 땅은 먼저 깃발을 꽂는 자가 임자다. 혼란을 기회로 여긴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大祚榮, ?~719)은 말갈의 족장인 걸사비우와 함께 봉기를 일으킨다【발해에 관한 사료가 부족한 것은 건국자에서부터 알 수 있다. 중국 측 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는 건국자가 대조영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고 되어 있다. 이 이름을 두고 역사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실은 대조영과 걸걸중상은 동일인이다. 거지를 뜻하는 걸(乞)을 이름자에 쓸 사람은 없으니 그 이름은 명백한 이두문이다. 대조영의 성인 대(大)는 알다시피 ‘크다’는 뜻이며, ‘클’과 ‘걸’은 발음이 비슷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그의 성을 뜻으로 옮겨 ‘대’라고 했을 것이다(아마 ‘중상’이라는 이름도 고대 중국어에서는 ‘조영祚榮’과 비슷하게 발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조영이라는 이름은 당시 실제 그의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발음이 되는데, 문자가 없었던 탓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 거란의 반란이 실패한 이유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거란은 랴오둥에 깃발을 꽂으려 했기에 제국 정부가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조영(大祚榮)은 랴오둥을 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해야 살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사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판단은 옳았다. 당은 랴오둥에서 봉기한 그들 무리가 멀리 만주 방면으로 도망치려 했는데도 추격군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추격군과의 교전에서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대조영은 그의 휘하에 있던 말갈족까지 이끌고 추격군을 물리치면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한다. 엑소더스는 모세만 한 게 아니다. 바다를 갈라 길을 터준 야훼의 도움 같은 것도 없이 대조영은 파라오 람세스의 군대보다 더 끈덕지게 추격해오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군대와 싸워가며 모세보다 더 먼 길을 도망쳐 와서 마침내 ‘가나안’까지 오는 데 성공한다. 그곳이 바로 동모산(현재 지린성의 둔화 부근)이다. 그는 이 새 터전에서 새 나라를 세우는데, 그것이 후대에 발해라고 알려지게 되는 진국(震國)이다.
▲ 만주의 가나안 대조영은 차오양에서 거의 1천 킬로미터나 당군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동쪽으로 행군해서 발해를 세웠는데, 사진에 보이는 한가운데 산이 바로 그가 첫 도읍으로 정한 동모산이다(백두산 북쪽 15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엄청난 대장정이지만 랴오둥을 버리고 동만주에 둥지를 튼 것은 향후 발해가 동아시아 질서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에 한반도 정벌의 대역사를 치른 당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제국의 영향권 바깥인 만주로 도망친 반란 세력까지 진압할 여력은 없다. 아마 추격군의 임무는 대조영(大祚榮)의 반란 무리를 랴오둥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다시는 랴오둥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사 만주까지 추격할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추격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돌궐이 오히려 랴오시에 둥지를 틀어 버리는 바람에 당은 랴오둥으로 가는 교통로마저 여의치 않아진 것이다. 그래서 당은 대조영이 진국을 세우고 천통(天統)이라는 독자적 연호마저 정하는데도 달래고 어르는 정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705년에 당의 황제 중종(中宗)은 대조영에게 화해의 사신을 보냈고 다음 예종(睿宗)은 713년에 그를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고구려의 부활일까?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걸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심정적으로는 누구나 그렇게 보고 싶을 것이다. 역사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를 가리켜 신라와 발해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고도 주장한다. 실제로 727년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당당하게 밝힌 바 있고, 무덤의 양식에서도 고구려의 전통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는 게 확인된다. 그러나 풍습에서 고구려의 것을 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것은 실상 신생국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는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말이야 무엇이든 못하랴? 중요한 것은 발해가 실제로 고구려를 계승했느냐는 것인데, 이 점에서 발해는 대외적인 주장과는 달리 고구려와는 거의 무관해 보인다. 우선 영토적인 면을 봐도 그렇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영토적 중심은 늘 랴오둥과 한반도 북서부였다. 하지만 발해는 처음부터 랴오둥을 포기했으며, 한반도 북서부에도 전혀 세력을 뻗치지 못했다. 한 번도 옛 고구려의 핵심부를 차지한 적이 없는데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좋게 말해서 발해의 외교적 제스처이고 나쁘게 말하면 발해가 고구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격이다. 또한 주민의 구성으로 봐도 발해는 옛 고구려 유민들보다는 말갈을 비롯한 만주 거주 민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일단 국가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영토와 주민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될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것이다.
▲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이 국서는 왼쪽의 ‘함화(咸和) 11년(842년)’이라는 문구로 연대를 알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진국’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발해’를 사용했다(오른쪽 맨 위).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발해가 처음부터 스스로 당에게 복속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발해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면서 신라와의 차별성을 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적극적인 대중국 사대 노선을 취했다. 여기에는 대외적인 위신을 강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어도 계속 ‘반란 세력’으로 남아 당의 집중 타깃이 되는 일만큼은 피해야겠다는 의도도 있다. 발해는 애초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새 질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국왕’도 아닌 발해군왕이라는 직책에 만족한 것은(이때부터 진국 대신 발해渤海라는 국명을 수용하게 되지만, 발해란 고유명사도 아니고 당시 보하이만渤海灣 주변의 지역을 중국 정부에서 총칭하던 일반명사였으니 명백한 후퇴다) 새로 자리잡은 동아시아의 질서에 기꺼이 따르겠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신라의 왕은 그보다 한 급 높은 ‘신라국왕’이었다)【오늘날 한국사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려는 입장이 힘을 얻은 이유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해고(渤海考)』를 쓴 유득공(柳得恭)은 “고려가 발해사를 쓰려 했다면, 고려로 망명온 발해 유민 십여만 명을 통해서 능히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발해사가 제때에 기록되지 못한 것을 대단히 아쉬워했다(사료가 부족한 탓으로 그는 자기 책에 『발해사』라는 제목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 왕조의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재단하려는 생각은 무모할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무모한 이유는, 7세기에 성립된 발해는 18세기의 조선과 아무 상관도 없으며, 21세기의 대한민국과는 더욱 무관하기 때문이다. 또 위험한 이유는, 과거 역사를 현대의 국가적 틀에 꿰어 맞추려 하면 자칫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해사는 ‘한국사’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둘 게 아니라 중국사와 한반도사를 아우르는 ‘지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옳다. 실제로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 당나라로서는 한반도의 신라라면 몰라도 멀리 만주 동부에 자리잡은 발해를 어떻게 해볼 만한 여력은 없었다. 따라서 당이 반란 세력에서 출발한 발해를 한 지역의 주인으로 잽싸게 공인한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과 발해의 관계가 정립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동아시아 지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적 체제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7세기 후반 중국의 한반도 정벌로 비롯된 약 50년에 걸친 진통은 새로운 질서를 낳았고,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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