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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두 명의 신라인(장보고, 최치원)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두 명의 신라인(장보고, 최치원)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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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명의 신라인

 

 

원래부터 경주 부근에만 중앙정부의 힘이 미칠 만큼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데다, 마땅히 등대가 되어줘야 할 중국이 당말오대에 접어들면서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취약한 신라 호가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은 뻔하다. 중앙이 약해지면 지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거의 물리적 법칙이다. 앞서 말한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은 이런 배경에서 터져나왔다. 물론 김헌창 개인으로서는 아버지(김주원)원성왕(元聖王)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따라서 자신도 왕위계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원한에 사무칠 수 있었겠지만, 이미 40년이나 지난 일인 데다 원성왕의 증손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이 재위하는 중에 새삼스럽게 해묵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어지러운 정세를 이용해서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이제 지방 호족들이 스스럼없이 왕권을 넘볼 만큼 권력구조가 취약해졌다는 이야기다. 침몰해가는 신라 호, 그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승객이 있다. 후대에까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장보고(張保皐, ?~846)최치원(崔致遠, 857~?)이 그들이다. 그들을 프리즘으로 삼아 9세기 신라의 스펙트럼을 한번 보자.

 

어린 시절이었는지, 젊은 시절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라고도 하는데 이두 이름이니까 같은 발음이었을 것이다)이라는 신라인은 일찍부터 중국에 건너가 당의 지방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장보고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바꾼 것을 보면 아마 그에게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중국에서 출세해 보겠다는 야심이 있었을 터, 그러나 그는 해적(왜구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들이 한반도의 해안지방에서 잡아 당나라에 팔아넘긴 신라인들에게 부당한 대우가 가해지는 것을 보고 분개한다. 그래서 해적들을 소탕하겠다는 각오로 그는 828년에 신라로 귀국해서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에게 군대 모집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내가 할 일을 대신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으니 흥덕왕은 당연히 대환영이다. 물론 충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신라의 중앙권력이 힘을 잃은 게 아니라면 그렇듯 민간인이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을까? 또 장보고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해서 신라 정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쨌든 장보고는 군사적 재능만이 아니라 무역과 외교적 감각에도 두루 능한 탁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군사 1만과 청해진 대사라는 벼슬을 얻어 완도(‘청해는 완도의 옛 이름이다)에 진지를 차린 그는 흥덕왕과 약속한 대로 해적들을 소탕한다. 게다가 그는 해적들에게 장악되었던 동아시아 무역로를 복구하는 것은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독점하게 된다장보고는 당에 견당매물사와 교관선을 보내 당과 신라의 수출입을 독점했으며, 중국에 있는 신라인들을 조직해서 무역로를 더욱 넓히기도 했다. 특히 그는 산둥에 유학 승려들을 위한 절을 세우는 등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실은 장보고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것도 그 덕분이다. 천태종의 고승으로 이름이 높은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은 당에 유학갔다가 돌아올 때 배편을 장보고에게 부탁했으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자신의 책에 장보고의 이름과 그에게서 받은 깊은 인상을 기록했다. 순식간에 막대한 부를 쌓고 국제적 거물로 발돋움했으니 그에게 정치적 야망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청해진 원래 무역기지로 설치되었으나 장보고는 이곳을 본부로 삼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당시에는 목책까지 둘러 성곽처럼 꾸몄다.

 

 

836년에 스폰서였던 흥덕왕이 죽은 것은 그에게 좋은 기회다. 흥덕왕은 즉위 초에 왕비가 죽고 나서 시녀조차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평생 수절(?)한 왕이었으니 후사가 있을 리 없다. 왕위계승을 놓고 흥덕왕의 동생과 조카가 다툼을 벌이자 여기에 귀족들이 편을 갈라 합세했다. 여기서 삼촌 김균정(金均貞)은 일찍이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었으나 결국 조카인 김제륭(金悌隆)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으로 즉위하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권력을 추구하기 이전에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식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낙동강을 빠져나가 완도에 있는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당시 신라 중앙정치의 혼탁한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더 큰 혼란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쿠데타로 집권한 희강왕은 재위 3년 만에 옛 동지였던 김명(金明)의 쿠데타로 궁중에서 자살하고 김명이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으로 즉위하는데, 그렇잖아도 경주를 노리던 장보고에게 그것은 거병의 명분이 되었다. 그는 즉각 군사 5천을 경주로 보내 민애왕을 살해하고, 보관하고 있던 김우징 카드를 뽑아든다. 비록 장보고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김우징은 839년에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4~7)이 되어 아버지의 한을 풀었다. 문제는 석달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건데,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꼭두각시의 소임은 다했다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에서부터 45대 신무왕까지 여섯 명의 왕은 모두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이다. 비록 그 중세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는 했지만, 800년에서 839년까지 40년 동안 신라 왕위는 친형제 셋을 포함해서 형제들끼리 주고받은 셈이다. 만약 당의 제국정부가 예전처럼 굳건했더라면 그렇듯 신라의 왕위계승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쿠데타로 집권한 신라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문책을 가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 당의 황실은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으므로 변방의 사정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같은 기간에 당의 황제는 무려 다섯 명이 즉위했고, 그 중에서 두 명이 암살당했으니 결코 신라 왕실보다 나은 사정이 아니었다.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라는 벼슬을 내려 보답한 데다 자신의 아들이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으로 즉위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문성왕에게서 청해장군이라는 직함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이르기까지 그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었다. 심지어 840년에 그는 일본에 무역을 요청하는 특파원까지 마음대로 보낼 정도였으니 사실상 신라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진 자의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게 마련이 아니던가? 비록 자신이 직접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킹메이커의 자리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책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딸을 왕비로 만들면 되니까. 근친혼이 행해지던 왕실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그에 따르면 신라 왕비는 무조건 김씨나 박씨여야 한다) 장보고는 딸을 둘째 왕후로 집어넣으려 한다. 예상했듯이 문성왕은 장보고의 절대적 지원으로 팔자에 없던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싫든 좋든 반대할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미 신라의 왕권이 실추될 대로 실추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고, 왕 대신 실권을 쥔 경주 귀족들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거센 반대로 결국 장보고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지만, 거기서 멈출 거였다면 아예 걸음을 떼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이듬해에 그는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다. 그가 킹메이커일 뿐만 아니라 킹킬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문성왕과 경주 귀족들은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공포에 휩싸인 그들에게 구원의 검은 손길이 다가온다. 일찍이 김우징의 쿠데타에서 공을 세웠던 염장(閻長)이라는 자가 단신으로 장보고를 암살하겠노라고 장담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인 문성왕은 반신반의했지만 알고 보니 그 지푸라기는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염장은 문성왕을 배반한 것처럼 가장하고 장보고에게 접근해서는 환영석상에서 그를 찔러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장보고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던 청해진은 한때 동아시아 해상을 지배했던 근거지답지 않게 일순간에 몰락한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신라의 왕권마저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당나라가 더 이상 동아시아 질서의 축으로 역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렸다. 변방의 번진들은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고, 중앙의 황실은 환관들이 쥐고 흔드는 판이다(안사의 난 이후 황실에서는 감군사를 보내 번진을 감독하게 했는데, 그 임무를 맡은 게 바로 환관들이었다). 오죽하면 이 무렵의 황제들을 따로 부르는 이름까지 생겼을까? 9세기 초반의 덕종부터 당나라가 문을 닫는 907년까지 100년 동안 11명의 황제들 중 한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환관들이 옹립했는데, 환관의 테스트를 거쳐 제위에 올랐다 해서 이 황제들은 문생천자(門生天子)’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불린다.

 

 

결국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당나라의 명맥을 죄는 사태가 터졌다. 875년 소금 밀매업자였던 황소(黃巢)가 일으킨 반란이 그것이다. 산둥에서 봉기한 그들은 소금 밀매 유통망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전국으로 세력을 확대했으며, 880년에는 수도인 장안까지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당의 관리로 있던 어느 신라인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문장을 지어 황소에게 보냈는데, 워낙 명문이었던 탓에 그것을 읽은 황소가 깜짝 놀라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바로 최치원(崔致遠)이다.

 

최치원이 당에 유학을 떠난 것은 열두 살 때니까 아마 장보고보다도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최씨라면 왕족은 못 되지만 신라 초기 6 가운데 하나다. 성씨로 짐작할 수 있듯이 최치원은 신라의 두품 가운데 최고인 6두품 출신이었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진골이 정치와 행정을 독점한 세태에 한껏 불만을 품은 지식인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최치원(崔致遠)은 교육열에 불타는 아버지의 바짓바람에 힘입어 869년에 멀고 먼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신라의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은 어려서부터 지혜와 총기를 자랑하던 인물로서 학문을 권장하는 데 힘썼으니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데는 아마 그런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왕의 모자를 만드는 사람이 경문왕의 큰 귀를 보고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다가 죽기 직전에 대나무 숲에서 마음껏 외쳐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왕들과 달리 그에 관해 이런 설화가 전해지는 이유는 그가 특이한 과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아들이 없었던 헌안왕(憲安王, 재위 957~961)의 눈에 들어 맏사위가 되었다가 장인의 왕위를 이었다. 사위 계승은 신라 초기에는 흔했지만 중기 이후에는 그가 유일했으니 아무래도 이야깃감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헌안왕이 사위로 대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장차 또 한 명의 여왕인 진성여왕이 즉위할 때 다시금 문젯거리가 된다.

 

장보고가 군사, 경제, 외교 등 사회과학의 천재라면 최치원은 역사와 문장 등 인문학의 천재였다. 그는 유학 생활 5년 만에 거뜬히 당의 과거에 합격했고 2년 뒤에는 관직까지 따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종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를 침대에서 떨어뜨리고 당의 황실을 감격케 한다. 이렇게 대단한 신라인으로 대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어떤 계기에선지 885년 한창 일할 나이인 스물여덟 살에 신라로 귀국한다. 좋게 보면 선진 세계에서 갈고 닦은 경륜으로 고향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뜻일 테고, 나쁘게 보면 아무리 대국이라 해도 지방 군수 정도의 직위에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날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쉽게 교수직을 얻은 얼치기 교수보다는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에 가까웠을 것이다.

 

일단은 금의환향이다. 그러나 박동혁이 그랬듯이 청운의 뜻을 품은 최치원(崔致遠)도 현지 방해꾼들의 시기와 농간에 견디지 못한다. 신라의 중앙 정치는 그의 아버지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경주 귀족들은 그를 어디서 날아온 낙하산처럼 여긴다. 좌절한 그는 중앙 정치를 포기하고 지방 군수직을 맡겠다고 자청하는데, 이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다. 몇 년 동안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닭이나 잡던 그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에게 시국 해결책인 시무 10여조를 제출해서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인 아찬에 임명된다. 중앙 정치로의 성공적 복귀일까? 그러나 아니었다. 오히려 경주 귀족들의 한층 날이 선 시선에 못 이겨 그는 아예 정계에서 은퇴해 버린다.

 

최치원이 느낀 좌절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신분의 한계다. 6두품으로서는 중대 이래 진골들이 독점해 온 중앙 정치 무대에서 뜻을 펼 수 없었다. 둘째는 신라의 지적 수준의 한계다. 그가 배운 학문은 당시 첨단 학문이었던 유학이었다. 알다시피 유학은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이었으니, 불교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전통적인 귀족제 사회의 틀을 벗지 못한 신라에서 그게 통할 리 없다. 오히려 그는 유학이 성행하는 고려시대에 고인에게 주는 벼슬을 받았고 조선시대의 서원들에 이름을 남겨 시대를 앞서간 인물의 자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의 중앙 정치를 개혁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오히려 그의 이름은 후대에 길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유학만이 아니라 불교, 도교, 그리고 고유의 풍수지리 사상에도 두루 능한 만물박사였던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집필에 몰두해서 역사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과 불교 서적, 각종 비문 등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으로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아쉽게도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저작이 아니라 당나라에 있을 때 써둔 시문들을 모은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뿐이다(그래도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유학을 다룬 문헌 중 가장 오래 된 문헌이다).

 

 

사관과 신사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를 앓는다는 것은 오늘의 현상만이 아니다. 중국이 비틀거리자 신라는 아예 주저앉았다. 이 시대에 걷고 뛰었던 두 명의 신라인이 있었는데, 바로 장보고(위)최치원(崔致遠, 아래)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당의 지방정권, 대내적으로는 경주 정권에 불과했던 신라 왕조는 이미 이들의 포부를 끌어안을 여유와 능력이 없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흔들리는 중심

두 명의 신라인

북방의 새로운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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