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의 물결
국제정세가 안정되자 신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대내적 정비다. 비록 중국의 지방정권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단독정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행정제도와 관제를 대폭 손봐야 한다. 그래서 신문왕(神文王)은 우선 수도가 영토의 동남부에 치우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충주와 남원에 각각 소경(小京)을 두고 주민들까지 강제 이주시켰으며, 전국을 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관직도 신설했다【이 무렵의 신라는 사실상 신생국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왕권의 힘이 후대에 비해 오히려 강력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신문왕(神文王)은 689년에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관리의 봉급제도를 바꾸는 개혁을 실시한다. 녹음제에서는 관리들이 토지 생산물과 주민들을 모두 소유했으나 이제부터는 토지 생산물의 일부만을 봉급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니 그 차이는 대단히 크다. 이 제도가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신라 왕실은 전국적인 중앙집권화를 추진할 수 있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귀족들은 집요하게 반발해서 결국 경덕왕(景德王) 때인 757년에 녹습제를 복원시켰다】.
나아가 신문왕은 김씨 시조인 미추왕을 비롯하여 자신의 4대 조상들에게 성대한 제사를 올려 새 나라와 새 질서를 자축한다. 다섯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 것은 ‘천자는 7묘에, 제후는 5묘에 제사를 지낸다’는 예기(禮記)에 따른 절차다(중국의 천자는 조상들 외에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드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라 왕은 제후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추왕이야 당연하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나머지 조상들이다. 그는 아버지 김법민(문무왕), 할아버지 김춘추(태종무열왕), 증조 문흥왕, 고조 진지왕의 4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중에는 전대의 왕이 아니었던 인물이 하나 끼여 있다. 문흥왕이라면 누굴까? 그는 바로 진지왕의 이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다. 비록 죽고 난 뒤 갈문왕으로 추대되어 왕호를 얻기는 했지만, 갈문왕이 국가 대사 중 으뜸인 왕실 제사에 올랐다면 이미 신라는 사실상 새 왕조를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이후 신라의 왕들은 모두 그 전통을 따라 미추왕과 자신의 4대조를 ‘5묘’로 삼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렇다면 물론 그 건국자는 김춘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선진적’ 사대관계로써 한반도의 단독정권으로 가는 길을 열었으니까.
어쨌든 그러한 예비 단계를 거친 뒤 새 질서가 완전히 자리잡은 8세기 초에 신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번영기를 맞게 된다. 형인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는 바람에 왕위를 잇게 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왕위만이 아니라 번영의 토대까지도 물려받았으니, 이후의 역사까지 포함하여 신라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왕이다. 재위 기간 중 그는 당나라에 착실하게 조공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일을 한 게 없는데, 실은 그게 신라로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였다. 그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어느 누구보다도 나라를 잘 이끈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즉위한 직후인 703년에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수교를 맺었다는 점이다. 신라와의 첫 대면에 걸맞게 당시 일본에서는 무려 204명의 대규모 사신단이 파견되었다. 불과 40년 전 백제를 도와 당군과 싸웠던 일본이 신라를 외교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그 일본과 이 일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더 엄밀히 말한다면 ‘이 일본이 진짜 일본’이다).
한반도에 대규모 전란의 구름이 드리워 있던 645년 일본에서는 당시의 집권자였던 소가(蘇我)씨 세력이 타도되고 천황 세력이 집권하는 다이카(大化) 개혁이 일어난다(다이카란 일본이 최초로 제정한 연호다). 그러나 671년에 개혁 주도자인 덴지 천황이 죽자 다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한반도의 백제가 멸망한 직후였으므로 그 투쟁에는 백제계 유민과 원래부터 있던 신라계 도래인도 한몫 거들게 되는데, 한반도에서처럼 신라계가 지원한 오아마가 승리하면서 덴무 천황으로 즉위한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맞아 덴무는 적극적으로 당의 제도를 수입하여 권력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우는 데 주력한다. 701년에 그는 다이호(大寶) 율령을 제정하는데, 이것으로 사실상 일본이라는 고대국가가 건국된 셈이다(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율령을 쓰다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독자적인 율령을 포기하고 당의 율령을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이라는 국명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니 진짜 일본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대에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 문명을 전해받았으므로 한반도에 비해 늘 뒤처졌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일본은 적어도 7세기 이후로는 한반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을 구축했다. 비록 지리적으로는 선진 문명권에서 멀었으나 일본은 한반도의 1.5배에 이르는 면적에다 인구도 훨씬 많았으므로 출발에서 뒤진 것을 어렵지 않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신라처럼 당의 속국이 아니었으므로 신라보다 훨씬 독자적인 역사를 꾸릴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로, 일본의 경우 고대 인물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7세기 인물인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생몰연도가 기록에 전하지만 신라의 경우 10세기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까지도 출생연도가 전해지지 않는다】.
▲ 일본의 기민함 당나라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자 일본은 즉각 당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모방하기 시작했다(여기에는 그때까지 주요 수입 루트였던 백제가 멸망했다는 게 크게 작용했으니, 말하자면 일본은 신라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림은 일본이 당나라에 열 차례 이상 보냈던 견당선의 상상도다. 그러나 일본은 당이 쇠락의 기미를 보이자, 함께 몰락한 신라와는 달리 재빠르게 ‘국풍’으로 전환하는 기민함을 보인다.
703년의 수교는 바로 이 진짜 일본과 한반도의 단독정권 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아시아의 평화, 팍스 아시아나(Pax Asiana)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과연 중국은 모든 질서의 중심이었다. 중국이 안정되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를 되찾았으니까. 신라와 일본은 동아시아 평화와 문명의 중심인 당나라에 앞다투어 견당사(遣唐使)를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당을 모방하기 시작했다(심지어 일본은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서 계획도시를 새 수도로 꾸며 천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그런 운동이 당풍(唐風)이라는 정식 명칭까지 얻었지만, 신라는 일본과 달리 당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므로 ‘모국화’라고나 해야 할까?
모국화 드라이브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치세 때 절정에 달한다. 우선 그는 전통적인 신라식 이름으로 불리던 행정구역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를테면 삽량주, 한산주, 웅천주, 무진주처럼 토속적인 지명을 양주, 한주, 웅주, 무주로 바꾼 것이다(그 가운데 상주와 전주는 오늘날까지도 시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당시까지 전해지던 옛 지명들은 원래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에서 나온 이름을 음역 또는 훈역으로 한자화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웅천은 원래 ‘곰나루’였는데, 백제의 수도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어 웅진(雄은 곰이고 津은 나루다)이 되었고 신문왕(神文王)이 그것을 다시 웅천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웅주가 되었으니 이미 지명의 기원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곧이어 경덕왕은 율령박사를 두어 중국식 율령을 시행하는 데 더욱 만전을 기했으며, 당의 중앙제도를 본받아 시랑과 낭중 등의 관제를 도입하고 당의 6부에 해당하는 기관을 설치했다.
경덕왕이 자신있고 소신있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신라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 마치 소나기가 휩쓸고 간 뒤 새순이 돋는 것처럼 오랜 전란의 시대가 끝난 뒤 신라는 꿀맛 같은 휴식과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꽃피운 것도 이 시기다. 원효(元曉, 617~686)의 아들 설총(薛聰)이 이두를 총정리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게 무형문화재에 해당한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오늘날까지도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유형문화재다. 이 작품들을 기획한 김대성(金大城, ?~774)은 지금의 부총리급인 이찬까지 오른 인물로서, 공직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751년에 대규모 국책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완공되지 못하고 이후에 국가에서 완성했는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오히려 불국사는 오늘날 수학여행지로 애용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신라 최대의 사찰은 단연 황룡사, 아마 김대성은 불국사를 황룡사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 신라의 대표적 사찰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을 것이다. 200년 전인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당시의 기술로 16년 만에 완성한 황룡사보다 더 긴 기간을 공사하고도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게 그 증거다. 그러나 불국사의 운명을 위해서는 그게 다행이었다. 황룡사는 최대 사찰이었기 때문에 13세기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으니까【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데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그는 전생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품삯일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흥륜사 스님에게서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 밭을 절에 시주하자고 권한다. 그러나 그 뒤 그는 곧 죽었고 그의 벤처투자는 후생에 빛을 본다. 그 덕분에 김대성은 김문량이라는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토함산의 동서 양편에 자리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의 위치로 미루어 다른 해석도 있다. 석굴암에서 굽어보는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주요 노선인 탓으로 신라 왕실에서 불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절을 많이 지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인 왜구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 두 사찰의 엇갈린 운명 위는 불국사의 전경이고, 아래는 황룡사 목탑지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만 해도 황룡사는 동양 최대의 목탑을 자랑하며 웅장하게 서 있었겠지만 500년 뒤 몽골 침략 때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아마 김대성이 더 오래 살아 불국사를 직접 완공했더라면 황룡사보다 더 크게 짓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랬다면 몽골군의 타깃이 되었을 테니 오히려 지금에는 불국사가 사라지고 황룡사만 남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덕분에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의 달밤에 불국사의 종소리를 고즈넉이 들을 수 있었지만,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만개한 시기가 바로 가장 적극적으로 중국화 노선을 추진한 시기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중국화의 마무리는 788년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이 처음으로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장식한다. 이것은 일종의 과거제(科擧制)라 할 수 있지만, 중국의 과거제와는 다르다. 과거제는 수 문제가 처음 만들었고 뒤이은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지명이나 관직명은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써도 내용적으로는 크게 달라질 게 없겠지만 과거제(科擧制)는 다르다. 과거제는 관리 임용제도이므로 신라의 여건에 맞지 않는다면 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중국의 과거제는 한나라 때 유학을 공인하고 나서도 수백 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었던 제도인데, 유학 자체가 막 도입되기 시작한 신라 사회에서 그런 관리 임용제도가 통할 리 만무하다.
신라의 관리들이라면 누군가? 비록 성골이라는 피라미드의 맨꼭대기가 사라지고 없다지만 아직 신라에는 골품제의 입김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신문왕(神文王)과 경덕왕(景德王)이 관제를 정비하고 관직을 신설했다 해도 아직 신라에서는 정상적인 관료제가 성립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에게는 권력이 있다. 따라서 기존의 것이든 새로 생긴 것이든 모든 관직은 당연히 귀족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독서삼품과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으니, 말하자면 선진적인 과거제와 전통적인 귀족제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성공했다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집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이다. 시험이라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관리를 선발하겠다는 원성왕의 의도는 현실적인 여건 앞에서 좌초한다. 골(성골, 진골)에 속하는 왕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원하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고 품에 속하는 귀족들, 그 중에서도 최상층 세력인 6두품은 독서삼품과에 응시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유학을 가는 게 관직 임용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독서삼품과는 이후 우리 역사를 얼룩지게 만드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 즉 ‘시험’과 ‘국가고시’가 최우선시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오명만 남기고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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