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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 - 발해고서(渤海考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유득공 - 발해고서(渤海考序)

건방진방랑자 2019. 3. 2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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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발해사를 지었어야만 했다

발해고서(渤海考序)

 

유득공(柳得恭)

 

 

고려가 남북국사를 찬수하지 않은 건 잘못이다

高麗不修渤海史, 高麗之不振也.

昔者氏居于北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曰百濟, 朴昔金居于東南曰新羅. 是謂三國, 宜其有三國史, 高麗修之是矣.

扶餘氏高氏,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高麗不修之非矣.

 

고려는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해 망했다

大氏何人也? 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當是時, 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執而責諸女眞: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 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也; 執而責諸契丹: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 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鴨綠以西可有也.

竟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鴨綠以西, 不知爲誰氏之地, 欲責女眞而無其辭, 欲責契丹而無其辭. 高麗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발해가 망했을지라도 고려가 맘만 있었다면 발해사는 지을 수 있었다

或曰: “渤海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

此有不然者.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而問於世子則其世可知也, 問於其大夫隱繼宗則其禮可知也, 問於十餘萬人則無不可知也.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高麗之人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발해사가 아닌 발해고를 지은 이유

嗚呼! 文獻散亡幾百年之後, 雖欲修之不可得矣.

余在內閣, 頗讀中秘書. 遂撰次渤海事, 爲君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不曰世家, 而曰考者,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 泠齋集卷之七

 

 

 

 

해석

 

고려가 남북국사를 찬수하지 않은 건 잘못이다

 

高麗不修渤海史, 高麗之不振也.

고려가 발해사를 찬수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영향력을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昔者氏居于北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曰百濟,

옛적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며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며 백제라 했으며

 

朴昔金居于東南曰新羅.

박ㆍ석ㆍ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며 신라라 했다.

 

是謂三國, 宜其有三國史,

이것을 삼국이라 했으니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高麗修之是矣.

고려가 그것을 찬수한 것은 옳은 것이다.

 

扶餘氏高氏,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曰渤海.

부여씨와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남쪽에 있고 대씨가 북쪽에 있어 발해라 했다.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이것을 남북국이라 했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지만

 

高麗不修之非矣.

고려가 남북국사를 찬수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고려는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해 망했다

 

大氏何人也? 高句麗之人也;

대조영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곧 고구려 사람이고

 

其所有之地何地也? 高句麗之地也,

그가 소유한 땅은 어느 나라 땅인가? 곧 고구려의 땅으로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동쪽을 개척하고 서쪽을 개척하며 북쪽을 개척하여 넓혔을 뿐이다.

 

及夫金氏大氏, 王氏統而有之曰高麗.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함에 이르러 왕건이 계승하여 고려라 했다.

 

其南有金氏之地則全,

고려는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소유한 것은 온전히 했지만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북쪽으로 대씨의 땅을 소유한 건 온전하지 못하여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혹은 여진으로 편입되었고 혹은 거란으로 편입되었다.

 

當是時, 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마땅히 급하게 발해사를 찬수하여

 

執而責諸女眞: “何不歸我渤海之地?

발해사를 잡고 여진에게 어째서 우리의 발해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渤海之地, 高句麗之地也.”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땅이다.”라고 질책하고서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也;

한 장군에게 가서 거두어오게 했다면 토문강 북쪽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執而責諸契丹: “何不歸我渤海之地?

발해사를 잡고 거란에게 어째서 우리의 발해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渤海之地, 高句麗之地也.”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의 땅이다.”라고 질책하고서

 

使一將軍往收之, 鴨綠以西可有也.

한 장군에게 가서 거두어오게 했다면 압록강 서쪽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竟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鴨綠以西,

그러나 마침내 발해사(渤海史)를 찬수하지 않아 토문 이북과 압록 이서가

 

不知爲誰氏之地,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알지 못해

 

欲責女眞而無其辭, 欲責契丹而無其辭.

여진을 질책하고자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질책하고자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高麗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고려가 마침내 나라가 약해진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루 탄식할 만하구나!

 

 

 

발해가 망했을지라도 고려가 맘만 있었다면 발해사는 지을 수 있었다

 

或曰: “渤海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

혹자는 말한다.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당했으니 고려가 무엇을 따라 역사서를 찬수한단 말인가?”

 

此有不然者.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발해는 중국을 따라 반드시 사관을 두었으리라.

 

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홀한성이 파괴되자 세자 이하의 고려로 도망친 사람들이 십여만 명이었다.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사관이 없었다면 반드시 역사서가 있었을 것이고 사관도 없고 역사서도 없었다 하더라도,

 

而問於世子則其世可知也,

세자에게 물었다면 왕가의 계보는 알 수 있었을 것이고,

 

問於其大夫隱繼宗則其禮可知也,

대부 은계종에게 물었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問於十餘萬人則無不可知也.

십여만 명에게 물었다면 발해의 역사를 알지 않음이 없었을 것이다.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장건장張建章(806866)의 묘지명이 1956년 북경에서 발견되어 그의 일생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832년에 사신으로 발해에 가게 되었다. 8349월에 발해 수도에 도착하였고, 9358월에 유주에 돌아왔는데, 그 뒤에 渤海記3권을 지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신당서』「발해전에 많은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은 당나라 사람임에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저술했는데

 

高麗之人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고려 사람은 유독 발해사를 찬수할 수 없었단 말인가.

 

 

 

발해사가 아닌 발해고를 지은 이유

 

嗚呼! 文獻散亡幾百年之後, 雖欲修之不可得矣.

! 문헌이 흩어지고 사라진 지 거의 백년 후로 비록 찬수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됐다.

 

余在內閣, 頗讀中秘書.

내가 규장각규장각을 내각, 교서관을 외각이라 했다.에 있으면서 매우 궁중의 비밀문서를 읽었었다.

 

遂撰次渤海事, 爲君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마침내 발해사를 편찬하여 군ㆍ신ㆍ지리ㆍ직관ㆍ의장ㆍ물산ㆍ국어ㆍ국사ㆍ속국의 9()를 지었다.

 

不曰世家, 而曰考者,

세가ㆍ전ㆍ지라고 부르지 않고 라고 부른 것은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 泠齋集卷之七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했고 또한 감히 역사서로 자처할 수 없어서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비교 성해응 / 유득공 / 박제가

수업실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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