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에서 일군으로
연개소문의 삼형제 중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둘째인 연남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기개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형 남생을 쫓아내고 대막리지가 된 그였으니, 항복한다고 해서 고구려 원정군으로 온 형의 용서를 받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성에 점령군이 들어오자 남건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했는데, 나중에 형과 아우는 당의 직책을 받은 반면 그는 혼자 유배형을 받아 줄을 잘못 선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백제의 선례를 좇아 고구려에도 즉각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한때 중국의 화북 왕조와 맞설 만큼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영토는 아홉 개의 도독부로 나뉘어 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당 군정청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20세기의 미 군정청은 3년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해체되었지만, 당은 애초에 괴뢰정권조차 세워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당 군정청은 상설기구였다(주한미군사령관 하지에 해딩하는 직책은 고구려 정복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설인귀가 맡았다). 이 기관이 계속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한반도는 신라까지 전역이 중국의 직접 지배하에 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675년에 안동도호부는 한반도에서 나와 랴오둥의 랴오양으로 이사하게 된다. 명장 설인귀가 지키는 도독부가 왜 밀려났을까?
우선 백제의 경우처럼 고구려에도 부흥운동을 도모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670년 고구려의 장수였던 검모잠(劍牟岑)은 당의 관리를 죽이고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옹립한 다음 고구려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에 곤욕을 치렀던 당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신속하게 대응한다. 이 신속한 대응에 탈이 난 것은 부흥 세력이다. 백제의 경우에는 그래도 부활한 나라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내분이 일어났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은 당에서 진압군이 파견되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는 것으로 사실상 끝나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이북으로 내몬 주체는 고구려 부흥 세력이라기보다 신라였다. 안승이 신라로 달아난 이유도 그 무렵 신라와 당의 사이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이 된 김법민은 당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승을 환영하고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다. 황금의 분업이요 찰떡궁합이었던 두 나라 사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되었을까? 아버지 김춘추와 달리 문무왕은 대중국 강경 노선으로 되돌아설 만큼 기백이 있는 인물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사실 백제 왕자 부여융에게 침을 뱉을 때만 해도 문무왕(文武王)은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여겼다. 가문의 원수와 나라의 원한을 다 갚았으니 이제 신라는 왕실이나 백성들이나 두루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고구려 원정에서 당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할 때도 그는 군말없이 동생 김인문(金仁問, 629~694)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험한 북행길에 오르게 했다【비록 당에게는 꼬리치는 개의 노릇을 한 김춘추였으나 그래도 그는 지락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둘째 아들 김인문의 역할에서 김춘추의 탁월한 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사후에 자신이 했던 역할을 둘로 나누어 대내 정치는 태자인 법민에게, 외교는 둘째인 인문에게 분담시키려 했던 듯하다. 651년 아버지의 명으로 당에 파견된 (사대주의 원년부터 가 있던 형제와 교대했다) 김인문은 장안에 머물면서 당과 신라의 관계를 다지는 외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춘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해서 (654년) 신라에 머물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뒤에 당 고종이 백제 정벌에 나서도록 구워삶은 인물은 바로 김인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잠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내내 당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에 관한 그와 당 고종의 구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통일전선은 여기까지다.
신라는 백제의 영토를 가져야 하고 당은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해야 한다. 물론 신라는 당을 상국으로 섬기겠지만 적어도 영토는 그렇게 나누어져야 한다. 문무왕(文武王)은 그렇게 생각했으며, 애초에 당과 신라가 분업을 이룬 목적도 그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당은 애초부터 신라에게 독자적인 지배권을 할당한다는 계획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당 제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영원한 변방일 뿐이니까. 따라서 동서남북의 다른 변방들처럼 신라는 당의 번진(藩鎭, 당은 변방의 수비를 위해 번진을 설치했는데, 예전의 전통에 따르면 일종의 제후국인 셈이다)이 되어야 했다. 당이 원하는 번진과 신라가 바라는 조공국, 관점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번진이나 조공국이나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관할하고 왕을 임명하는 나라[國]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자치의 정도에서는 차이가 컸다.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다음 두 나라를 도독부의 형태로 되살리려는 당의 구도는 신라에게 다시금 백제에게 시달리는 악몽을 꿈꾸게 하기에 족했다.
백제에 다섯 개의 도독부가 설치되었을 때 문무왕(文武王)은 비로소 관점의 차이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고구려가 남아 있었으므로 참았지만 고구려마저 정복하고 난 뒤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빌미로 파견된 당의 진압군이 황해도까지 내려오자 그는 다소의 무력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발언권을 높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674년 고구려의 적극적으로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영토에 신라의 관리와 군대를 파견한 것은 바로 그런 생각에서였다.
물론 문제 해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 고종은 크게 화를 냈고 문무왕(文武王)의 관직을 박탈하면서 정식으로 신라 정벌군을 편성해서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애초 통일전선의 목표였던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진 이상 양측 모두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관점의 차이는 번진과 조공국의 차이였던 만큼 양측의 모순은 비적대적인 것이었다. 과연 왕은 재빨리 황제에게 사과했고, 황제는 짐짓 물러서며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군대를 거둬들였다(당시 고종은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책봉했으나 물론 그건 제스처다). 이후 양측 간에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그건 제국과 왕국의 새로운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문무왕은 한편으로 당의 파견군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674년에 당의 달력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그런 양면 전술의 일환이다(당에 유학가 있던 덕복전德福傳이라는 자가 역법을 배우고 돌아와 역법을 개정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중국 달력을 쓰기 시작한 시기다).
어쨌든 문무왕(文武王)은 의도를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675년 가을 ‘주한당군사령관(駐韓唐軍司令官)’ 설인귀가 신라 공략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신라는 당의 본격적인 ‘테스트’를 받았다. 테스트치고는 치열했고 어려운 시기도 있었으나 신라는 ‘자립입시’에 그런 대로 좋은 성적을 냈다. 결국 676년 11월 기벌포로 들어온 설인귀 군을 접전 끝에 물리침으로써 신라는 백제의 옛 영토를 관리하는 능력에 관해 당의 승인을 얻었다. 이것이 공식적인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과연 통일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적어도 한반도에 국호를 가진 나라가 신라만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삼국통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통일이 아니다. 우선 영토를 보면, 당시 신라가 확보한 영토는 지금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에 그쳤으니 고구려의 영토까지 포함하면 삼국의 영토 가운데 절반이 되지 못한다(애초에 신라는 백제만을 병합하고자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또한 정치적으로 신라는 당에 조공하면서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완전한 독립 왕국이라 할 수 없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한반도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 왕국에서 하나의 중국 군현으로, ‘삼국에서 일군(一郡)으로’ 전락한 셈이 될 것이다.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오늘의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전한 통일이냐 불완전한 통일이냐로 가름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7세기의 그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정식 사대관계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 관계가 장차 19세기에 이르기까지 1300년 동안 한반도와 중국 간의 기본 관계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변방의 하나이지만, 다른 변방과는 달리 비교적 자치권이 보장된 조공국이다. 이 기묘한 관계는 점차 외교와 군사 측면에선 중국이 관할하고 내정 측면에선 한반도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이중적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 매국노 공덕비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의 묘비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는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동생들과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나라로 도망가서 고구려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 셈이지만, 그는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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