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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5장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벅찬 텍스트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5장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벅찬 텍스트

건방진방랑자 2021. 7. 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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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열하일기고원 혹은 리좀

 

 

벅찬 텍스트

 

 

측근 관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바람은 마침내 그 진앙지로 열하일기를 찾아낸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과정록過庭錄2).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熱河日記, 予旣熟覽, 焉敢欺隱? 日記行世後, 文體如此, 自當使結者解之. 斯速著一部純正之書, 卽爲上送, 以贖日記之罪, 雖南行文任, 豈有可惜者乎? 不然則當有重罪, 須以此意, 卽爲貽書.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한 정조의 안목은 과연 적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장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조의 그 같은 조처는 뒷북치는 감 또한 없지 않으니, 앞에서 이미 짚었듯이 이 텍스트는 이미 10여 년에 걸쳐 열렬한 찬사저주어린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풍문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이 풍문의 정점이자 공식적 확인절차였던 셈이다.

 

어쨌든 사태가 이쯤 되자, 사대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암에게 쏠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과정록過庭錄2).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건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인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님의 분부 중에 여러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면서도 특히 박아무개를 들어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하신 것은 임금님께서 박아무개에게 주의를 주어 그 글이 좀더 발전되게 함으로써 장차 문임을 맡기려는 의도이시다. 더군다나 열하일기를 가리켜 문체를 그르친 장본이라 하시면서도 그것을 익히 보셨노라고 하여 애호하는 뜻을 나타내셨음에랴! 반드시 바른 글을 한 부 지어서 얼른 바치도록 해야 한다.

此實非怒之敎, 將有格外異數. 且聖敎中, 歷數諸人之愆, 而特擧朴某爲罪魁者, 乃大聖人抑而進之, 推任文權之意. 又况擧熱河日記爲眞贓, 而加以熟覽字以寵之乎! 是必有一部文字趁早撰進.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연암과 함께 안의에 있던 여러 문사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연암에게 참고가 되는 글을 베끼는 일을 한다든가 사실을 고증하는 일을 떠맡고자 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정조는 연암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둘렀다. 그러나 이 노회한 조치에 대해 연암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보잘것없는 제 책이 위로 임금님의 밝으신 눈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豈意兎園之遺册, 上汚龍墀之淸塵哉]”느냐, “중년 이래로 불우하고 영락하여 스스로 자중하지 못하고 글로써 유희를 삼아 때때로 궁한 처지에서 나오는 근심과 게으르고 나태하여 원고를 챙기고 단속하는 일을 제대로 못한 탓에 자신과 남까지 그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僕中年以來, 落拓潦倒, 不自貴重, 以文爲戱, 有時窮愁無聊之發, 無非駁襍無實之語. 性又懶散, 不善收檢, 旣自誤而誤人].”, “문풍이 이 때문에 진작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문단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文風由是而不振, 士習由是而日頹, 則是固傷化之災民, 文苑之棄物也]”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느[安有荷譴之蹤, 作爲文字, 自許純正, 要掩前愆]”냐며 결국은 반성문 하나 제출하지 않는다. 당근도 채찍도 모두 비켜간 것이다. 문체반정(文體反正) 이후 대부분의 문인들이 견책을 면하기 위해 혹은 영달을 위해 철저한 고문주의자로 변모해갔지만, 연암은 이후에도 정조의 견제, 아니 집요한 구애의 손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뱀처럼 유연하고, 두꺼비처럼 의뭉스럽게.

 

정조의 관심도 집요하여 1797년 연암이 면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 정조를 알현하자 내 지난번에 문체를 고치라고 했는데 과연 고쳤느냐[予向飭文體之變改矣. 果改之乎]?”고 다그치고, 제주 사람 이방익이 바다에 표류한 일의 전말을 들려주고서 기어코 글을 쓰게 만든다.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는 이렇게 해서 쓰여진 글이다.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장은 그처럼 깊고도 넓었다.

 

그 여파 때문이었던지 이 문제작은 연암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가 우의정까지 역임했음에도 조부의 문집을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뜨거운 감자였다. 마침내 1900년 창강 김택영(金澤榮)의 주도로 연암집이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연암속집이 발간되었다. 열하일기가 단독으로 출간된 것은 1911년 최남선이 고전 보급을 목적으로 창설한 조선광문회가 발행한 것이 최초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택영조차도 연암의 전()이나 열하일기가운데 도강록이하의 몇 편은 순전히 패관소설체로 되어 있다며, 빼버렸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도 열하일기는 여전히 벅찬텍스트였던 것인가?

 

 

 ▲ 『열하일기연암집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리고 촌철살인의 아포리즘(aphorizm)과 우주적 비전으로 가득찬 연암집,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의미있는 책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이 둘을 선택할 것이다. 나아가 이 난만한 포스트모던시대를 용감무쌍하게 돌파할 수 있는 동력 또한 그 속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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