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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 명진의 이야기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 명진의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7. 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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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의 이야기

 

 

기실 나는 명진의 삶의 일대기에 관해 자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구요. 성인으로 만나 생각이 통하고, 인품의 질감을 통해 교제하는 것뿐이지요. 명진에게는 당대의 여타 스님과는 달리 강렬한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중이라 하면 쉽게 도 닦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가치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아는데, 명진은 근원적으로 도를 닦는다[修道]’하는 것을 공동체적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동의 사회적 선(Common Good)을 위하여 자기를 내던지는 일상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이지요.

 

명진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핏 경상도 액센트가 강한 것처럼 들리는데, 기실 그는 충청남도 당진(唐津) 신평면(新平面)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차여차 해서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다녔다고 합니다. 6개의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해요(당시는 초등학교를 다 초등학교라고 불렀음). 그리고는 다시 여차여차 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당진 송악면에 있는 송악중학교(松嶽中學校)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그만 젊은 여인을 사랑하는 상사병에 걸리고 맙니다. 이 젊은 여인, 당시 24세의 아리따운 얼굴과 정숙한 몸매를 지닌 이 여인은 누구였을까요? 불행하게도 이 여인은 송악중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어선생님이었습니다. 매일 밤 이 선생님을 사모하여 잠 못 이루게 된 명진은 꾀를 하나 냈습니다. 명진은 이 새로 부임한 여선생님이 당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장선생님 사택 한 귀퉁이에 방을 얻어 세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선생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자! 그 집 문깐에 편지를 집어넣으면 선생님은 반드시 편지를 읽어보실 것이다!’

 

그래서 명진은 용감하게 붓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저는 커서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제발 저의 이러한 생각이 허황되다 생각하여 무시하지 마시고 꼭 기다려주십시요,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선생님을 부인으로 맞아 모시고 평생 행복하게 사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 프로포즈를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정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정말 황당하고 또 황당한 편지이지만, 명진은 결코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순결하게 사랑하니까 그런 용기가 솟구친 것입니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의 부인 브리지트가 248개월 연상이라는 것, 그리고 고교 시절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뭐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1960년 우리나라 일반윤리관념으로 생각하면 좀 기특(奇特, 기이하고 특별한)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객지에서 불현듯 접한 영어선생님은 닭살이 돋았습니다. 좀 공포스러웠습니다. 인생체험이 부족한 젊은 여선생이 이렇게 황당한 상황에 갑자기 맞부닥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여유 있게 형량하자면, 결코 공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한기중(명진의 속명)이라는 학생의 행위는 황당하기는 해도 폭력적인 사태는 아닙니다. 그리고 문제의 테마가 사랑이고, 사랑은 표현이 가능하고 또 거절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명진을 불러다가 조용히 타이르고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녀인 여선생은 어쩔 줄을 모르고, 또 말날 것 같아 타인에게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자기와 좀 말을 나눌 수 있었던 같은 학교 체육선생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육선생은 이 여선생님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를 보는 순간 한기중이 학생이 아닌 연적으로 비화되어 인식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체육선생님은 이런 사태를 이지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체육선생님은 한기중을 교무실로 부릅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기중이를 때립니다.

 

야 이 새끼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이게 뭐야! 선생님에게 이런 편지를 써! 너 정신이 있는 놈야!” 하면서 무식하게 사정없이 패는 것이었습니다.

 

한 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는 달콤한 꿈에 대한 보답으로 돌아오는 이 따귀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는 사태였습니다. 그리고 체육선생이 생각치 못한 것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선생님에게 결혼프로포즈의 편지를 보낼 정도라면, 결코 그런 학생은 만만하게 볼 수 있는 학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진은 이미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고, 인간의 극한상황에 대한 체험이 있고, 명철한 가치판단이 있었습니다. 분명 그 체육선생의 폭력은 합리적인 수수(授受)가 아닌 일방적인 이유 없는 폭력이었습니다. 명진은 참을 수 없었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법전의 말대로 화가 치밀어 오른 명진은 가차 없이 체육선생의 따귀를 세차게 맞받아쳤습니다. 아무리 어리다한들, 세파에 시달린 명진의 주먹은 용서 없이 얼떨떨한 체육선생의 급소를 찌르고 들어갔습니다. 따귀대회에서 명진은 완벽한 승자였습니다. 이 사태는 목격자들이 있었고 당연히 학교 전체의 토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이런 사태가 논리적인 토론을 통하여 합리적인 해결에 도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학생에 대한 일방적인 징계가 있을 뿐이죠.

 

어린 학생은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약자였습니다. 한기중에게 퇴학의 명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명진은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명진은 체육선생을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연적으로서 때린 것이고, 영어선생님에게도 사랑을 표현한 것 외에는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명진은 다음의 작전을 전개합니다. 명진은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잡화상을 하고 있는 친척집에 가서 석유통을 구해 가득 석유를 채워 담고, 그것을 멜빵으로 등에 지었습니다. 석유통을 멘 채 교장선생님 방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선생님, 저는 무례를 범했을지는 모르나 따귀를 맞을 정도로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체육선생님이 저를 전후 사정 없이 다짜고짜 때린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저를 퇴학시키시겠다면 저는 이 석유로 모든 것을 불사르겠습니다. 저는 어차피 인생을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와 같이 불타 죽을지언정, 이런 징계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는 시골에 씨씨티비도 없고 파출소 인력도 없고, 밤에 누가 학교에 혼자 와서 무슨 짓을 한다면 그것을 막을 길은 없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 교장선생님은 매우 합리적이고 여유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는 결코 폭력적인 처벌로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는 교육자적 양심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학교가 불타는 사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명진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명진은 어렸지만 삶의 비애를 너무 깊게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명진을 다독였습니다.

 

그래! 너를 일방적으로 체벌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어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고 체육선생님께 대든 것 또한 무례한 행동이며,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너도 응분의 벌을 받아야겠지.”

 

결국 퇴학은 취소되었고, 정학 3일의 가벼운 벌로써 이 일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명진은 계속해서 학교를 잘 다녔고 무사히 졸업을 했습니다.

 

명진과 얘기를 하다 보면, 하루종일 이런 얘기가 그의 입에서 쏟아집니다. 어떤 때는 다 들어주기가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얘기를 그에게 처음 들었을 때, “~ 이거야말로 우리의 비근한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진짜 공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의식의 흐름에는 경허 선사의 슬픔이랄까, 그 우환의식이 가물가물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명진이 19세 때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하기 이전의, 불교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명진과 같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닥친 실존적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자세의 비범성이나 과단성 같은 것에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

 

 

 ▲ 중학교 시절의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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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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