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과 동학사 야간법회
경허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설 속에서 시비ㆍ포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포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경허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죠.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경허라는 한 인간의 개별적 이야기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표하는 시대정신(Zeitgeist), 한국불교의 새로운 분위기, 그 심오한 선풍(禪風)의 클라이막스를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공이 동학사에서 진암 스님을 모시고 행자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이때 경하는 동학사를 떠나 천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허는 진암 노스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어린 만공은 9척 거구의 경허 스님을 처음 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동학사에서 야간법회가 있었습니다. 본방 강주스님인 진암이 먼저 설법했습니다.
“나무도 삐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은 그릇이라야 쓸모가 있을 것이며, 사람도 마음이 불량치 말고 착하고 곧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는 다음에 경허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본방 강주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듯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며, 불량하고 성실치 못한 사람은 그대로 착하고 성실함이 있느니라.”
어려운 한문 문구를 현란하게 활용하지 않아도 아주 소박하게 그 명료한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 경허의 법문은, 그가 조선왕조를 지배하고 있었던 주자학의 권위주의, 그리고 유교에 아주 깊게 배어 있는 윤리적 엄격주의(moral rigorism),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불교의 경직된 계율주의를 얼마나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잘 말해줍니다. 이것은 그가 선의 경지를 말하기 전에 이미 철저한 근대정신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구가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경허의 정신세계는 차라리 유교 이전의, 불교 이전의, 우리민족 고유의 발랄한 정신세계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운 최치원이 말한 ‘풍류(風流)’라고나 할까요.
더욱이 재미있는 사실은 이 법문을 들은 진암 스님이 오히려 자기의 행자 만공을 이 나라 불교계를 위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될 만한 재목이니 나보다는 당신 밑으로 가야한다고 하면서 경허에게 만공의 지도를 부탁했다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자기를 그 자리에서 묵사발 낸 스님을 존경하여 애제자의 미래를 부탁하는 그런 큰 아량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만공은 1884년 12월 8일, 천장사에서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화상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고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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