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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32분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32분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건방진방랑자 2021. 7. 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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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32-1.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져다가 보시를 한다 해도,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의 마음을 발하고, 이 경 내지 그 사구게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 복이 저 칠보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須菩堤! 若有人以滿無量阿僧祈世界七寶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發菩薩心者, 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爲人演說, 其福勝彼.

수보리! 약유인이만무량아승기세계칠보지용보시. 약유선남자선여인발보살심자, 지어차경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위인연설, 기복승피.

 

32-2.

그리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한단 말인가? 상을 취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운하위인연설? 불취어상, 여여부동.

 

 

응화비진(應化非眞)’의 응화(應化)는 응신(應身)과 화신(化身)을 가리킨다. 이 모두 색신(色身)의 이명(異名)이다. ()ㆍ화신(化身)이 모두 참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응()ㆍ화신(化身)법신(法身)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번역하면 너무 얕은 이원론적 부정의 논리의 인상을 주기 때문에 나는 색신은 모습이 없어라로 번역하였다.

 

아승기(阿僧祇)’는 반드시 아승기로 읽어야 한다. ‘아승지로 읽지 말 것이다.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낸다. 16분에 기출(旣出).

 

그리고 세조본, 명본(明本), 우리나라 통용본들은 발보살심자(發菩薩心者)’발보리심자(發菩提心者)’로 되어 있다. 해인사본은 보살심(菩薩心)’으로 되어 있고 대정(大正)은 이에 따랐다. 여기 이 마지막 분(), 다시 말해서 금강경을 총결 짓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보리심이라고 하는 일반명사가 아닌 보살심이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금강경자체가 바로 보살운동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이 부분에서 명료하게 발보살심(發菩薩心)’이라고 하는 논리적 초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곧 라집(羅什)이라고 하는 탁월한 번역자의 의도적 연출인 것이다. 금강경은 보살의 마음을 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헌시인 것이다.

 

2절의 연설(演說)’이라는 말은 이미 불교 이전의 문헌(文獻)에 보이는 말인데 한역불전에서 불타의 가르침을 남에게 설한다는 의미로 잘썼다. ‘연설(演說)’이란 ()하여 설()한다는 뜻으로, ()이란, ‘물흐르는 대로 그 물가를 따라서 자세히의 뜻이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위하여 이 가르침을 말하여 들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말하여 들려줄려고 하지 말라! 그래야 비로소 말하여 들려준다고 말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이 논지를 라집(羅什)은 아름다웁게 바꾸었다.

 

 

不取於相
불취어상
상을 취하려 하지 말라
如如不動
여여부동
여여하게, 부동하게!!

 

 

노자(老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모습 없는 큰 모습을 잡아라!

천하가 스스로 간다.

執大象! 天下往..

집대상! 천하왕.

 

 

이제 눈물겨웠던 우리의 금강경강해도 아쉬운 고별을 말하게 되었다. 나는 금강경에 나오는 이 마지막 게송과 더불어 너무도 절박했던 색신(色身)의 노고를 풀려 한다.

 

 

 

 

32-3.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하이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32-4.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시었다. 장로 수보리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색과 우바이, 그리고 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믿고 받아 들이고, 받들어 행하더라.

佛說是經已. 長老須菩堤及諸比丘比丘尼優婆色優婆夷,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金剛般若波羅密經.

불설시경이. 장로수보리급제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 일체세간천인아수라, 문불소설, 개대환희, 신수봉행금강반야바라밀경.

 

 

모든 초기불교경전이 끝나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끝나고 있다. ‘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11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초기 불교승가를 구성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사중四衆, 사부중四部衆)을 말하고 있다. 비구(比丘, bhikṣu)와 비구니(比丘尼, bhikṣuṇī)는 출가이중(出家二衆)으로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사람들이 우바색(優婆塞, upāsaka, ‘우바새로 읽기도 한다)과 우바이(優婆夷, upāsikā)는 재가이중(在家二衆)으로 불()ㆍ법()ㆍ승()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오계(五戒)를 받는다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婬)ㆍ불망어(不妄語)ㆍ불음주(不飮酒). 우바색(優婆塞)은 남성으로, 청신사(淸信士), 근사남(近事男), 선숙남(善宿男) 등으로 의역되고, 우바이(優婆夷)는 여성으로, 청신녀(淸信女), 근사녀(近事女), 선숙녀(善宿女) 등으로 의역된다.

 

우바색(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근사남(近事男) 근사녀(近事女)
선숙남(善宿男) 선숙녀(善宿女)

 

 

통용본에는 제일 마지막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라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그러나 라집본(羅什本)의 유일한 정통 텍스트인 우리 해인사고려대장경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 들어 있으므로 반드시 이 경()의 이름으로 이 경을 끝내야 한다. 대정(大正)도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본도 마지막에 이 경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통용본들이 금강경신수봉행(信受奉行)’에서 끝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의 진언(眞言)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더 중요한 판본의 문제는 바로 라집본(羅什本)에 유일하게 그 뒤로 진언(眞言)이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금강경의 모든 한역본 중에서 진언이 있는 것은 라집역본(羅什譯本) 하나밖에 없다. 보뎨류지(菩提流支, 류지留支), 진체(眞諦), 달마급다(達摩笈多), 현장(玄奘), 의정(義淨)의 역본이 모두 이 진언을 결()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존()하는 산스크리트본에도 진언이 빠져 있는데 그렇다고 라집이 이 진언을 창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라집이 저본으로 쓴 산스크리트 텍스트에는 이 진언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티벹본에는 보다 자세한 진언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라집역본(羅什譯本) 외의 모든 다른 판본, ()ㆍ원()ㆍ명() 3, 세조본 이하 우리나라의 모든 통용본이 의도적으로 이 진언을 빼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진언을 빼버린 것은 금강경의 이해가 선종화禪宗化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진언을 빼버릴 수는 없다. 우리 해인사대장경판의 소중함은 바로 이 금강경의 경우만 해도, 라집역(羅什譯) 금강경(金剛經)의 제 모습을 온전하게 전하고 있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고본(孤本)이요, 고본(古本)이라는 사실에 있다. 라집역(羅什譯) 금강경판본 중에서도 온전한 진언이 텍스트로 붙어 있는 판본은 우리나라 해인사 고려판본 단 하나뿐인 것이다. 대정(大正)본만이 우리 해인사본에 따라 진언을 붙여놓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금강경을 말할 때 그것이 라집본(羅什本)인 이상에는 반드시 이 진언으로써 경()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금강경이요, 참다운 우리 금강경이요, 고려제국 사람들의 섬세하고 위대한 손길이 담긴 세계적인 금강경인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라는 진언을 빼먹으면 반야심경의 맛은 반감된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의 그 모든 것의 실제적인 종교적 의미는 그 진언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금강경의 지혜도 이 진언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진언이란 나의 육신의 발성기관의 진동이 아닌 우주의 소리요 신의 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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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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