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개고와 쇼펜하우어, 문명사적 맥락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은 ‘일체(一切)’가 다 ‘고(苦)’라는 뜻입니다. ‘고(苦)’ 즉 ‘두흐카(duḥkha)’라는 것은 아비달마 문헌에서는 ‘핍뇌(逼惱)’라고 번역했는데 ‘핍박하여 고뇌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하여튼 ‘괴롭다’는 뜻이지요. ‘일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은 ‘존재함’ 그 자체가 고라는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일체라고 한다면 우주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삼법인에 미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아~ 우주가 팽창하느라고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뿐만 아니지요. 우리 주변에 서있는 나무를 볼 때에도, 아~ 저 나무가 저기 저렇게 서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한다는 것, 탄소동화작용을 저토록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저것이 바로 고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고 아닌 것이 없겠지요. 내가 살아간다는 것도 고이고, 삼각산에 인수봉 바위가 저렇게 서있는 것도 고입니다. 이 고의 우주론적 의미를 서양사상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제대로 의식한 인물이 바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헤겔과 동시대의 독일철학자. 우주의 본체를 의지로 파악)입니다. 불교의 고에 본체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죠.
그러나 ‘고통스럽다’는 의미는 역시 인간의 삶과 연결될 때 그 핍진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죠. 그러나 우주의 제반현상 모든 것이 인간의 식(識)작용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苦)는 매우 우주론적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일체가 고다! 왜 이런 발상이 생겨났을까요? 아마도 각박한 풍토와 기후, 척박한 농업조건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고밀도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아대륙 인도, 너무도 다양한 고문명의 성과와 복잡다단한 정치사의 분규가 연이어진 인도의 민중들에게는 일체가 고라는 것, 산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인식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와 같이 기아로 인해 매년 대규모의 사망자가 발생하는(물론 지금은 사태가 매우 달라졌지만) 그런 문명 속에서는 인간존재의 덧없음(무상無常)을 보편적 명제로서 인식한다는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정원에 늘어진 버들이나 청송의 고매한 자태 속에서 우주의 창조적 기운을 감지하는 조선의 심미적 감각의 양반들에게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것, 그것이 곧 우주의 변화이다)’을 읊을지언정, ‘일체개고’라는 말은 결코 어필될 수가 없었겠지요. 삼천리 금수강산이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산수가 수려해 물맛이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인도와는 좀 상황이 다를 수 있겠지요. 물론 불합리한 정치ㆍ사회제도 하에서 핍박받는 민중의 애환 속에서는 불교적 명제가 공감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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