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천궁녀’ 이야기의 진실, 부소산성은 알고 있다
부소산성은 산책하듯 걸으면 되는 곳이다. 어젠 둘러볼 곳이 많아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면, 오늘은 산책하듯 부여의 역사 속을 거닐기만 하면 된다.
누군 아무 것도 안 할 자유를 외쳤다는데, 우린 여행 와서 산책할 자유를 외치고 있다. 부소산성은 사비왕궁의 후원이다. 백제의 왕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산책길을 따라 올라 간다.
▲ 또 다른 하루의 시작. 오늘은 산책하러 가자.
삼충사
삼충사에는 세 분의 백제 충신이 모셔져 있다. 성충과 흥수라는 분은 잘 모르지만, 계백장군의 초상화가 있어서 반가웠다. 오천 결사대와 계백장군의 이미지는 ‘황산벌’이란 영화에서 나오는 계백장군의 카리스마가 연상되기에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데, 그러진 않았다. 하긴 이순신 장군이나 김유신 장군을 보더라도 당연한 건데, 그만큼 영화의 이미지가 강한 탓이겠지.
백제의 위상을 거의 회복한 직후부터 의자왕은 달라진다. 갑자기 왕궁을 화려하게 꾸민다든가. 대규모 주연을 베푼다든가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파트너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안도한 것일까? 656년 좌평이었던 성충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게 아니냐고 충언하자 의자왕은 그만 발끈해서 그를 옥에 가둬 죽여버린다. 성충은 옥에서 쓴 유서를 통해 장차 큰 전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며 그때가 되면 뭍에서는 탄현(현, 대덕)을 막고 바다에서는 기벌포(현, 장항)를 막으라는 최후의 충고를 한다. -『종횡무진 한국사』, 203쪽
성충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백제로서는 탄현과 기벌포를 막아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그 뻔한 방어책을 두고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간신들이 판치는 법이다. 의자왕은 일찍이 성충과 뜻을 같이 하다가 유배되어 있던 좌평 흥수에게 의견을 구해 다시금 탄현과 기벌포라는 해답을 얻었으나, 흥수를 시기하는 대신들은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온 다음에, 그리고 당군이 백강에 들어선 이후에 공격하자는 해괴한 해법을 내놓는다. - 『종횡무진 한국사』, 205쪽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삼충사에 모셔진 세 분의 충신은 백제가 멸망하기 바로 직전의 충신이라는 사실이다. 삼충사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백제의 비운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산책을 하듯 올라가는 길엔 투호가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던져봤다. 그런데 아무리 던져도 들어가지 않더라. 화살이 두꺼운 대나무였기에 넣을 수가 없었다.
▲ 백제의 멸망을 막고자 애를 쓴 세 명의 충신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계백이다.
낙화암, 만들어진 이야기가 과거를 재구성한다
드디어 낙화암에 왔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봐도 이곳에서 떨어진다 해도 죽을 만큼 높은 곳이 아니더라. 그리고 뛰어내릴만한 자리도 마땅히 없었다. 뛰어내린다 해도 바위에 부딪히거나 나뭇가지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낙화암 이야기의 진실은 무어란 말인가?
낙화암 전설은 ‘일연’이 지은 역사서 『삼국유사』에 나온다.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벼랑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과 닿는데 예전부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되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라 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속설에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의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이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다.”라고 쓰여 있다.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三國遺事』 卷1 「太宗春秋公」
고려 시대에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 부여를 돌아보고 ‘하루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 이름하여 낙화암이네(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 시를 짓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李存吾가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면 고려 후기에 이르러선 타사암보단 낙화암이란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백제의 멸망을 아파하는 조선의 시들).
▲ 낙화암에서 본 백마강.
그렇다면 3000명이란 숫자는 정말일까? 3000이란 숫자가 동양에선 많다는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진정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살았다면, 그녀들이 기숙했던 공간의 터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도 없으며 그렇게 많은 수의 궁녀를 유지할 만한 도성의 규모도 아니었다.
낙화암이란 이름이나 삼천 궁녀라는 것들이 모두 허구라 한다면, 이러한 픽션들이 모두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일연스님은 거짓말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비도성이 당군에 의해서 유린당할 즈음 위기감을 느낀 귀족이나 궁궐 식솔들, 장군 처자식 등은 부소산에 올랐을 것이며 상황이 더욱 급박해지자 강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와전되어 그와 같은 이야기가 된 게 아닐까.
과거의 진실이 어떻든 우리는 누군가가 퍼뜨린 이야기를 사실인양 받아들이며 역사 유적지를 찾고 그 이야기에 맞춰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셈이다. 이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족보를 사서라도 역사적인 당위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겠다. 꾸며진 역사라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장원 막국수
부여에서 1박 2일의 여행을 잘 마쳤다. 이쯤이면 알찬 여행을 한 듯하다. 여행이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무언가 느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듯 여러 번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부여에 발걸음을 옮길 날을 희망해본다.
재밌게 여행했으니, 마지막으로 맛집 탐방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갈 곳은 부소산성 근처에 있는 ‘장원막국수’다. 여긴 특이하게 편육을 막국수와 함께 먹는다고 해서 찾아왔다. 과연 어떤 맛일까?
막국수는 여러 야채를 메밀국수에 비벼 먹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국물이 한 가득 따라 있다. 국물엔 얼음도 동동 떠 있어 입맛을 자극한다. 편육은 노린내가 나지 않고 어찌나 부드러운지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 예술이다. 편육을 차가운 막국수로 돌돌 말아 먹으니 그 맛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든 끝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던가. 장원막국수에서 좋은 인상을 받으니 이번 부여 여행 전체가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장원막국수를 먹기 위해서라도 부여에 다시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부소산성 근처의 막국수집으로 왔다. 이곳에서 먹고 1박 2일의 부여여행은 잘 마쳤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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