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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3장 통일의 무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3장 통일의 무대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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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행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위 초기 빛나는 대외 전과를 올린 것과 달리 후기에 가서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방탕해지는 것이다. 전쟁보다는 주로 외교에 주력하던 아버지 무왕(武王)과 달리 그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신라 공략에 나서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대야성 정복으로 기세가 최대로 올랐을 때 원래부터의 목표였던 한강 하류 수복을 시도했다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SOS를 치는 바람에 물러서긴 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으로 손이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시 신라의 일곱 성을 획득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곳곳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게 발목을 잡히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마 의자왕은 그 참에 한강 하류는 물론 신라 본토까지 상당히 잠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한동안 끊어졌던 일본과의 수교도 새로 강화해서 예전의 화려했던 백제의 위상을 거의 회복했다.

 

655년에 의자왕은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3개 성을 함락시켜 여제동맹의 위력을 시위하면서 이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된 김춘추에게 또 한 번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직후부터 의자왕(義慈王)은 달라진다. 갑자기 왕궁을 화려하게 꾸민다든가, 대규모 주연을 베푼다든가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파트너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안도한 것일까? 656년 좌평이었던 성충(成忠)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게 아니냐고 충언하자 의자왕은 그만 발끈해서 그를 옥에 가둬 죽여 버린다. 성충은 옥에서 쓴 유서를 통해 장차 큰 전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며 그때가 되면 뭍에서는 탄현(지금의 대덕)을 막고 바다에서는 기벌포(지금의 장항)를 막으라는 최후의 충고를 한다. 그러나 삼페인에 취한 의자왕의 귀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삼국사기에는 그 시기에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는 둥,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는 둥,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둥, 땅 속에서 거북이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가 멸망한다고 씌어 있었다는 둥 온갖 ‘X파일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백제의 멸망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려는 김부식의 잔머리에 불과하다.

 

당과 신라의 통일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음에도 의자왕(義慈王)이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의문이지만, 어쨌든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곧 닥쳐올 위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아마 그는 설사 당나라가 다시 한반도를 공략한다 해도 예전처럼 고구려가 일차 타깃이 되리라고만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해동증자라는 닉네임을 버려야 했다. 고구려가 강한 고리라면 백제는 약한 고리, 한반도라는 시슬을 제거하려는 중국이 약한 고리를 먼저 끊으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의 아홉째 아들이었으나 효심이 지극하다는 이유로 제위를 계승한 당 고종, 그는 즉위 후 첫 사업(?)으로 홀몸이 된 아버지의 애첩(측천무후)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으니 과연 대단한 효자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고종은 비록 아버지의 여자를 취했을망정 아버지의 숙제마저 잊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661년 서른세 살이던 한창 나이에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고 측천무후에게 국정 운영의 전권을 내맡겨 버리는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이룬 업적이 바로 한반도의 약한 고리를 끊는 일이었다.

 

 

660년 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 595~667)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13만의 대군을 배에 실어 인천 앞바다로 보냈다. 거기서 당군은 신라군과 접선한다(여기서도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한 것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제 원정의 기본 방침은 이미 태종 때 세워져 있었으니 필요한 건 세부 계획뿐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신라와의 분업이다. 백제 정벌이야말로 신라가 바라마지 않던 꿈, 따라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분업 구도에서 신라가 맡은 임무는 그다지 적극적인 게 아니다. 신라의 가장 큰 임무는 전투보다 보급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군이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는 동안 신라군은 동쪽의 공략을 담당하겠지만, 전투의 주력은 아무래도 당군이었고, 무엇보다 작전의 모든 지휘권은 소정방을 비롯한 당군 지휘관들에게 있었다.

 

일찍이 고구려 정벌에서도 중국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장성의 북변에서 랴오둥까지 천 리가 넘는 길을 원정하면서도 출발할 때부터 군량을 가지고 가야 했으니 당연히 대규모의 보급 병력이 필요했으며, 오히려 그들이 정작 필요한 전투 병력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앞서 본 것처럼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는 보급 병력이 전투 병력의 두 배를 넘었다). 현지에 있는 신라가 보급을 맡았으니 이젠 그런 곤란을 겪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전투군으로만 이루어진 13만의 병력은 홀가분하게 산둥에서 배를 타고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상륙한다.

 

보급대장격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자리잡고 태자인 김법민을 보내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가 소정방을 맞게 했다. 여기서 신라 측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은 다음 당군은 다시 배에 올라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를 향했고 신라군은 예정대로 동쪽의 물길로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으로 향하기로 한다. 그러니 사실 성충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백제로서는 탄현과 기벌포를 막아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의자왕(義慈王)은 그 뻔한 방어책을 두고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간신들이 판치는 법이다. 의자왕은 일찍이 성충과 뜻을 같이 하다가 유배되어 있던 좌평 흥수(興首)에게 의견을 구해 다시금 탄현과 기벌포라는 해답을 얻었으나, 홍수를 시기하는 대신들은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온 다음에, 그리고 당군이 백강에 들어선 이후에 공격하자는 해괴한 해법을 내놓는다. 분별력을 잃은 의자왕은 그들의 의견을 좇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어도 달라질 건 없다. 백제 왕실에서 논의가 분분하던 그 무렵에 이미 5만의 신라군이 탄현을 넘었고 당군을 실은 함대는 백강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백제의 세 충신 부여 삼충사에 소장된 계백의 영정이다. 이곳에 모셔진 백제의 3대 충신(계백, 성충, 흥수)이 하필이면 모두 나라가 멸망할 무렵의 인물이라는 게 백제의 비운을 말해준다. 계백은 세 충신 가운데서도 가장 비장한 죽음을 맞았기에 이후에도 충절의 표본으로 널리 존경받았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그제서야 비로소 다급해진 의자왕(義慈王)은 달솔(백제 16관등중 제2관등.)인 계백(階伯)에게 5천 결사대를 주어 신라군을 막게 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계백이 전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가족을 모두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은 그런 백제의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각오 덕분에 그는 황산벌(지금의 논산군 연산읍)에서 백제 병력의 열 배인 신라 병력을 상대로 네 차례 싸워 모두 이기는 탁월한 전과를 올리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백제에 대한 신라군의 두려움만 없앤다면 승산은 단연 신라 측에 있다. 이 점을 감지한 김유신의 부관 김흠순은 아들 반굴을 전사시켜 사기를 고취하려 했고, 그에 뒤질세라 또 다른 부관 김품일도 열여섯 살의 아들 관창을 윽박질러 단기로 돌입하게 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김유신의 따가운 시선을 돌려놓았다. 두 젊은이의 피로 사기를 회복한 신라군에게 백제의 결사대가 무너지면서 백제의 동쪽 전선은 붕괴했다그러나 이 전투가 끝나고 서둘러 당군과 합류한 김유신은 소정방에게 예정된 기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부터 들어야 했다. 김유신이 황산벌의 처절한 전투를 보고하지만, 101의 병력으로 고전했다는 것 자체가 소정방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까탈스럽게 나오는 소정방과 발끈한 김유신, 그러나 자칫 분업이 깨어질까 걱정한 소정방의 부관이 서둘러 중재에 나서서 무마시킨다. 소정방은 아마 실제로 그런 불만도 있긴 했겠지만, 트집을 잡아 신라 길들이기를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를 상대하는 서부 전선은 더 엉망이다. 백강에 들어온 뒤 당군은 신라가 황산벌에서 질척대고 있는 동안 거칠 것 없이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의자왕(義慈王)은 남은 병력을 모두 웅진강(백강의 지류)에 집결시켰지만 그건 적군이 백강에 들어오기 전에 했어야 할 일이었다. 무난히 강변 상륙에 성공한 당군에게 백제군은 첫 도전을 해보았으나 무려 1만 명 이상이 도륙당한다. 참혹한 패전 소식에 넋을 잃을 새도 없이 의자왕이 태자인 부여효(扶餘孝, 백제 왕실의 성은 부여씨다)를 데리고 옛 도성인 웅진성으로 도망치자 둘째 아들 부여태가 멋대로 왕을 자칭하며 도성 수비에 나선다. 하지만 나라 잃은 왕실이 존재할 수는 없다. 결국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615~682)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고 며칠 뒤인 660718일에 의자왕(義慈王)이 태자와 함께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하니, 이것이 백제의 공식적인 멸망이다.

 

 

꽃이 떨어진 절벽 의자왕(義慈王)3천 궁녀가 빠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모습이다. 물론 그것은 백제의 멸망이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 때문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진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이 절벽에서 몸을 날린 궁인들이 상당수 있었을 법하다.

 

 

두 번째 멸망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했던가? 항복한 부여융에게 더 가혹하게 군 사람은 실제 정복자인 소정방이 아니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金法敏)이었다. 승자인 신라의 왕자는 패자인 백제의 왕자를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이다. “20년 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인 일이 있는데, 이제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는 642년의 대야성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항복을 받은 뒤 첫 마디가 20년 전의 이야기라면 김춘추 부자가 백제에 얼마나 큰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김법민은 정복자가 아니므로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부여융의 목숨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다. 따라서 그는 따로 화풀이 대상을 찾는데, 백제군 포로 중에는 바로 대야성에서 백제에 투항한 검일이 있었다. 김법민은 검일을 죽이고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져 버림으로써 다소나마 원한을 달랜다.

 

하지만 부여융이 당한 수모는 아버지가 겪은 굴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의자왕(義慈王)은 승리 축하연에서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라야 했다(그 광경을 보고 백제의 뭇 신하들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런 굴욕을 당한 뒤 의자왕은 곧바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었다가 얼마 못 가 죽었다.

 

그러나 왕실은 사라졌어도 나라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무리들이 있었다. 백제는 중앙집권적 국가면서도 지방자치제의 성격을 가진 담로(擔魯)의 전통이 있었으므로 도읍과 왕실을 잃었어도 지방 세력들은 건재했다담로는 성()이라는 뜻의 백제어로서, 백제의 지방 지배 조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백제의 강역이 크게 확장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지방 지배를 위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측 사서인 양서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백제의 성곽들 중에서 요처에 위치해 있거나 도시를 이룰 만큼 주민이 많은 곳이 담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담로는 중앙정부의 관할을 받았지만 비교적 자치의 폭이 넓었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담로를 일종의 봉건 영지로 보기도 하는데,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권을 강화시킨 성왕(聖王) 때 담로가 약화된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소정방은 신속하게 백제의 영토를 다섯 개의 도독부로 나누고 점령지 지배를 위한 일종의 군정청을 설치한 다음 귀국했으나, 그는 20세기 중반 한반도에서 미군정청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현지 정치세력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해방 직후 남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미 군정청에 온갖 추파를 던졌다). 백제의 지방 지도자들은 당 군정청의 권위를 무시하고 방금 역사의 뒷장으로 넘겨진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리더로 떠오른 인물은 무왕(武王)의 조카인 복신(福信)이었다. 일단 그는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지금의 서천 부근)을 근거지로 부활의 기치를 높이 세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시급한 과제가 있다. 하나는 외부의 지원을 끌어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왕을 옹립하는 문제다. 마침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한 가지다. 일찍이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의자왕(義慈王)의 또 다른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맞아들이면 자연히 일본의 지원군도 따라오게 될 것이다. 태자의 신분도 못 되었던 부여풍은 위기의 조국을 재건한다는 명분에다. 왕위계승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당연히 대환영이다.

 

 

 

 

일본에서 출발할 새 왕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기 위해설까? 아니면 오히려 부여풍을 이름만의 왕으로 제한하려는 예비 공작일까? 자신을 얻은 복신은 수도 탈환을 계획한다. 이미 백제의 유민들이 속속들이 합류해 오면서 백제 부흥군은 3만의 병력으로 늘어났다. 한편 당과 신라 입장에서는 사비성까지 내주면 그동안 공들인 백제 정벌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터이다. 그래서 웅진도독(‘당 군정청의 장관격이다)인 유인궤(劉仁軌)는 일단 다른 곳들은 제쳐두고 전 병력을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사비성으로 집결시켜 방어에 나선다. 이쯤 되면 누가 정벌군이고 누가 방어군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도성을 포위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함락시킬 힘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유인궤가 이끄는 지원군이 후방을 공략하자 사비성 탈환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해 임존성(지금의 예산 부근)으로 갔다. 마침 임존성은 백제의 달솔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근거지로 삼고 이미 독자적인 부흥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비록 옛 도성을 수복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부흥군은 옛 백제의 북서 방면에 자리잡고 200여 개의 성을 장악함으로써 반란군이 아니라 어엿한 정부군이 되었다. 게다가 662년에는 드디어 부여풍이 170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일본에서 금의환향했다. 백제가 부활했다! 그런 자신감에서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을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돌려보내는 여유까지 보인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 부활한 백제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 싶더니 곧바로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복신은 도침이 왕처럼 구는 게 영 못마땅하다. 게다가 그는 도침과 달리 유인궤와 타협해야만 부활한 백제가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사적인 권력욕이 명분과 손을 잡자 그는 거리낌없이 동지였던 도침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애시당초 백제에게 겁을 주고 복속시키는 선에서 만족할 심산이었다면 굳이 13만의 당나라 대군이 황해를 건너올 필요도 없었다. 즉 그들의 임무는 백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부흥군에게 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라측과 연결된 보급로가 끊겼기 때문이었다(백제 부흥 세력은 백제의 북서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복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보급로의 요지인 진현성(眞峴城)의 수비를 보강했으나 이미 그의 마음 속에 뚫려 있는 허점까지 보강하지는 못했다. 유인궤는 집요한 공격으로 진현성을 함락시켜 마침내 군량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제는 역공에 나설 차례다.

 

자신의 판단미스로 결정적인 실패를 겪고서도 복신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될 것만을 걱정한다. 그래서 그는 병이 든 것처럼 가장하고 대권 도전자인 부여풍(명목상으로는 대권 소유자였지만)이 문병을 오면 죽일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속셈을 알아챈 부여풍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복신을 죽이고 이름만의 왕에서 벗어난다. 이래저래 백제의 부활은 물거품이 될 조짐이 짙어졌다.

 

당군이 총공세로 나오자 부여풍은 고구려와 일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으나 구원투수는 마운드에 오르기도 전에 가로막혀 버렸다. 믿을 것은 오로지 일본에서 온 400척의 함선이었는데, 그들 역시 백강 하구에서 당군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침몰해 버린 것이다(삼국사기에는 당시 하늘과 바닷물이 모두 빨개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쓴 부여풍은 도망쳤으며(이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3년 만에 또 다시 왕을 잃은 부흥군은 이제 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약삭빠른 흑치상지는 홀로 남은 임존성(任存城)을 지킬 자신도 없고 또 지켜봤자 얼마 못 가리라는 판단에서 당군에 투항했고, 홀로 남은 임존성에 홀로 남아 저항하던 지수신(遲受信)은 동료인 흑치상지가 공격해 오자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663년에 백제는 다시 한번 멸망하는 얄궂은 운명을 겪었다.

 

 

영욕의 산성 700년에 가까운 백제의 사직은 왕실이 항복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사진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항전 장소였던 충남 예산의 임존성이다. 흑치상지가 거병했고, 나중에는 배반한 흑치상지를 맞아 지수신이 항거했던 이곳은 백제의 영욕을 상징하듯이 지금은 풀만 무성하고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

 

 

김춘추 부자는 의자왕(義慈王)이 따르는 술을 마시고 매국노를 잡아죽인 것에 만족할 수 있었으나 소정방은 달랐다. 신라에게는 백제가 사슬이지만 당나라에게는 한반도 전체가 사슬이므로 백제는 그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정방은 또 하나의 더 튼튼한 고리를 끊어야 사슬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었다. 그래서 6608월 그는 의자왕의 술을 마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선 의자왕과 왕자들을 비롯하여 88명에 이르는 백제의 대신들과 장군들, 게다가 무려 12807명의 백제 백성들까지 장안으로 압송한 다음에 소정방은 곧바로 고구려 공략 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해 11월에 고구려 원정군이 출발했으니 그는 가히 초인적인 체력의 소유자였던 듯하다(게다가 당시 그는 65세의 노인이었다).

 

영웅의 시대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소정방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맞아 다시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한 사람은 고구려의 늙은 영웅 연개소문이다. 6618월 당의 노슈퍼맨이 대동강으로 들어와 평양을 포위하자 고구려의 노영웅은 긴급히 수성에 나서는 한편 맡아 들인 연남생을 보내 압록강 쪽에서 오는 당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역시 영웅의 유전자라는 건 없는 모양이다. 못난 아들은 3만이나 되는 병력을 죽이고 제 몸만 살아 돌아온다. 결국 이듬해 1월에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방효태(龐孝太)가 이끄는 당군과 일대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면서 당의 기세를 꺾었다. 때마침 내린 폭설에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철군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고구려는 위기에서 벗어났다고구려 원정에서 당과 신라의 분업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백제 정벌 때는 그런 대로 전투 역할도 수행했던 신라는 고구려 정벌에서는 완전히 보급부대로 전락했다. 당은 원정군이 출발하기 직전에 신라에 명을 내려 군량을 평양으로 수송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보급대장이 김유신이다. 그는 2천 대의 수레에 쌀 26천 석을 싣고 북행길에 올랐는데, 황해도 남부에서 폭설을 만났다. 결국 그 자신은 평양까지 가지 못하고 부하들을 시켜 군랑을 소정방에게 전달했으나, 역시 폭설로 고생하고 있던 소정방은 보급품을 받자마자 평양성에서 철수했으니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신라 최고의 장수가 보급대의 지휘관을 맡았다면, 당시 당과 신라의 분업 구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50년 전 수 양제의 침략부터 셈하면 무려 몇 차례의 선방일까? 그러나 한 사람의 최종 수비수에 국운을 맡기고 있다는 데서 아무래도 고구려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할 조짐이 충분하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맏이인 연남생이 대막리지를 계승하자 그 조짐은 순식간에 현실화된다. 가장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집안은 그 가장이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더 빨리 해체되게 마련이다. 못난 맏아들 남생은 두 동생(남산과 남건)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역시 못난 두 동생은 형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눈치를 챈 형은 어이없게도 당나라로 도망쳐 도움을 호소한다. 500년 전 동생 산상왕(山上王)에게 쫓겨나 랴오둥으로 도망친 발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 과연 발기가 그랬듯 남생도 당 고종이 내리는 직함을 받고 오히려 조국을 정벌하기 위한 전쟁에 한몫 거들게 된다.

 

문제는 500년 전과 달리 중국의 원정군은 그 옛날 공손탁의 랴오둥군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66612월 당 고종(아마도 측천무후가 아니었을까?)은 다시 고구려 원정을 명한다. 과연 이번 원정은 과거 그 어느 때와도 다르다. 우선 신라를 완전히 복속시킨 데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 세력까지도 완전히 제거했으므로 적은 고구려 하나밖에 없다. 이번 원정을 고구려 원정의 최종판, 나아가 한반도 정복의 최종 사업으로 삼겠다는 각오는 총사령관의 임명에서도 보인다. 원정군 총사령관은 일찍이 당을 건국하는 데서도 일등 공신이었으며, 대적인 돌궐을 물리쳤고, 20년 전에도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이적이라는 인물이었다. 비록 팔십 노구의 몸이었으나, 경력에서나 경험에서나 슈퍼맨 소정방보다 한 급 위의 하이퍼맨이다.

 

 

 

 

과연 이적은 초장부터 전술 운용에서 한 수 위의 기량을 과시한다. 과거의 원정들이 모두 실패한 이유는 랴오둥을 방기하고 조급히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시일이 걸리더라도 랴오둥을 완전히 정복하고 나서 고구려 본토로 치고 들어가겠다는 기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랴오둥의 판세를 읽은 다음 요처인 신성을 함락시키는 데 전력을 집중한다. 이적의 명성과 당의 대군에 겁을 먹은 성주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서전(緖戰)은 손쉽게 승리한다. 게다가 신성이 함락되자 인근 16개의 고구려 성이 와르르 무너지니 부수입도 짭짤하다. 하지만 이적은 서둘지 않는다. 667년 한 해 내내 그는 랴오둥을 차근차근 먹어들어 가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려고는 시도하지도 않았다.

 

고구려에게는 불행한 일이나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졸은 아니지만 이적의 휘하에는 설인귀(薛仁貴)라는 또 다른 명장이 있었다. 신성으로 급파된 고구려 지원군을 거뜬히 물리쳐 첫 전공을 세운 그는 곧이어 5만의 고구려 대군을 몰살시키고 여러 성을 빼앗았으며, 이듬해인 668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부여성(현재 중국 지린성의 눙안)마저 함락시켰다. 그것을 계기로 40여 성이 항복하면서 압록강 이북은 완전히 당나라의 수중으로 넘어갔다설인귀는 불과 3천 명의 병력으로 부여성을 공략했는데, 당시 다른 지휘관들이 중과부적이라며 말렸으나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어떻게 병력을 운용하는가가 중요하다면서 작전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 정복의 선봉장이었던 설인귀는 후대에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큰 인기를 누린다. 우리 무속 신앙에서 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현재 경기도 양주의 감악산의 산신이 바로 설인귀다.

 

이제 압록강을 건너 며칠만 행군하면 평양, 그러나 고구려의 명맥을 완전히 틀어쥐고서도 이적은 여전히 조급하게 굴지 않고 전군이 압록강 북변에 모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최종적으로 평양성을 점령한 것은 6689월이었으니, 그는 그때까지 7개월에 걸쳐 천천히 남하하는 압박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도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한 달 가량 버티던 보장왕은 결국 연남산을 보내 이적 앞에 항복의 뜻을 표시하게 했다. 이것으로 당의 동아시아 통일 전략은 완수되었고, 고구려는 705년의 사직을 뒤로 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퇴장했다부여성이 함락된 직후 당 고종은 전선에서 온 특파원에게서 전황 보고를 받는데, 그 내용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특파원은 필승의 이유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고구려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연개소문 사후에 고구려의 정정이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이유로 특파원은 고구려의 비밀 기록을 근거로 든다. 그게 어떤 문헌인지 알 수 없으나 그에 따르면 고구려 역사는 900년을 넘지 못하며 팔순 노장의 손에 의해 멸망한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팔순 노장은 물론 이적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900년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주몽이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37년으로 이에 따라 고구려의 공식 역사는 705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비록 900년을 넘지 못한다고는 했지만 705년과 900년은 격차가 크다. 그렇다면 중국은 김부식과 달리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이전에 성립한 국가라고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김부식(金富軾)은 고구려의 탄생을 박혁거세보다 이르게 잡고 싶지 않았을 테고.

 

 

베스트셀러의 주인공 당의 장수 설인귀는 조선시대까지도 큰 인기와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전기를 다룬 중국 소설 번역본 설인귀전은 18세기 조선의 베스트셀러였다. 중국의 장군이 어떻게 한반도에서 신격화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신라가 설인귀를 감악산의 산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신라 정부가 설인귀를 무척 존경했던 듯하다.

 

 

삼국에서 일군으로

 

 

연개소문의 삼형제 중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둘째인 연남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기개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형 남생을 쫓아내고 대막리지가 된 그였으니, 항복한다고 해서 고구려 원정군으로 온 형의 용서를 받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성에 점령군이 들어오자 남건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했는데, 나중에 형과 아우는 당의 직책을 받은 반면 그는 혼자 유배형을 받아 줄을 잘못 선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백제의 선례를 좇아 고구려에도 즉각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한때 중국의 화북 왕조와 맞설 만큼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영토는 아홉 개의 도독부로 나뉘어 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당 군정청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20세기의 미 군정청3년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해체되었지만, 당은 애초에 괴뢰정권조차 세워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당 군정청은 상설기구였다(주한미군사령관 하지에 해딩하는 직책은 고구려 정복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설인귀가 맡았다). 이 기관이 계속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한반도는 신라까지 전역이 중국의 직접 지배하에 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675년에 안동도호부는 한반도에서 나와 랴오둥의 랴오양으로 이사하게 된다. 명장 설인귀가 지키는 도독부가 왜 밀려났을까?

 

우선 백제의 경우처럼 고구려에도 부흥운동을 도모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670년 고구려의 장수였던 검모잠(劍牟岑)은 당의 관리를 죽이고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옹립한 다음 고구려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에 곤욕을 치렀던 당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신속하게 대응한다. 이 신속한 대응에 탈이 난 것은 부흥 세력이다. 백제의 경우에는 그래도 부활한 나라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내분이 일어났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은 당에서 진압군이 파견되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는 것으로 사실상 끝나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이북으로 내몬 주체는 고구려 부흥 세력이라기보다 신라였다. 안승이 신라로 달아난 이유도 그 무렵 신라와 당의 사이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이 된 김법민은 당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승을 환영하고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다. 황금의 분업이요 찰떡궁합이었던 두 나라 사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되었을까? 아버지 김춘추와 달리 문무왕은 대중국 강경 노선으로 되돌아설 만큼 기백이 있는 인물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사실 백제 왕자 부여융에게 침을 뱉을 때만 해도 문무왕(文武王)은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여겼다. 가문의 원수와 나라의 원한을 다 갚았으니 이제 신라는 왕실이나 백성들이나 두루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고구려 원정에서 당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할 때도 그는 군말없이 동생 김인문(金仁問, 629~694)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험한 북행길에 오르게 했다비록 당에게는 꼬리치는 개의 노릇을 한 김춘추였으나 그래도 그는 지락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둘째 아들 김인문의 역할에서 김춘추의 탁월한 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사후에 자신이 했던 역할을 둘로 나누어 대내 정치는 태자인 법민에게, 외교는 둘째인 인문에게 분담시키려 했던 듯하다. 651년 아버지의 명으로 당에 파견된 (사대주의 원년부터 가 있던 형제와 교대했다) 김인문은 장안에 머물면서 당과 신라의 관계를 다지는 외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춘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해서 (654) 신라에 머물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뒤에 당 고종이 백제 정벌에 나서도록 구워삶은 인물은 바로 김인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잠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내내 당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에 관한 그와 당 고종의 구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통일전선은 여기까지다.

 

신라는 백제의 영토를 가져야 하고 당은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해야 한다. 물론 신라는 당을 상국으로 섬기겠지만 적어도 영토는 그렇게 나누어져야 한다. 문무왕(文武王)은 그렇게 생각했으며, 애초에 당과 신라가 분업을 이룬 목적도 그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당은 애초부터 신라에게 독자적인 지배권을 할당한다는 계획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당 제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영원한 변방일 뿐이니까. 따라서 동서남북의 다른 변방들처럼 신라는 당의 번진(藩鎭, 당은 변방의 수비를 위해 번진을 설치했는데, 예전의 전통에 따르면 일종의 제후국인 셈이다)이 되어야 했다. 당이 원하는 번진과 신라가 바라는 조공국, 관점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번진이나 조공국이나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관할하고 왕을 임명하는 나라[]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자치의 정도에서는 차이가 컸다.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다음 두 나라를 도독부의 형태로 되살리려는 당의 구도는 신라에게 다시금 백제에게 시달리는 악몽을 꿈꾸게 하기에 족했다.

 

백제에 다섯 개의 도독부가 설치되었을 때 문무왕(文武王)은 비로소 관점의 차이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고구려가 남아 있었으므로 참았지만 고구려마저 정복하고 난 뒤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빌미로 파견된 당의 진압군이 황해도까지 내려오자 그는 다소의 무력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발언권을 높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674년 고구려의 적극적으로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영토에 신라의 관리와 군대를 파견한 것은 바로 그런 생각에서였다.

 

 

 

 

물론 문제 해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 고종은 크게 화를 냈고 문무왕(文武王)의 관직을 박탈하면서 정식으로 신라 정벌군을 편성해서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애초 통일전선의 목표였던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진 이상 양측 모두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관점의 차이는 번진과 조공국의 차이였던 만큼 양측의 모순은 비적대적인 것이었다. 과연 왕은 재빨리 황제에게 사과했고, 황제는 짐짓 물러서며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군대를 거둬들였다(당시 고종은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책봉했으나 물론 그건 제스처다). 이후 양측 간에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그건 제국과 왕국의 새로운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문무왕은 한편으로 당의 파견군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674년에 당의 달력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그런 양면 전술의 일환이다(당에 유학가 있던 덕복전德福傳이라는 자가 역법을 배우고 돌아와 역법을 개정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중국 달력을 쓰기 시작한 시기다).

 

어쨌든 문무왕(文武王)은 의도를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675년 가을 주한당군사령관(駐韓唐軍司令官)’ 설인귀가 신라 공략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신라는 당의 본격적인 테스트를 받았다. 테스트치고는 치열했고 어려운 시기도 있었으나 신라는 자립입시에 그런 대로 좋은 성적을 냈다. 결국 67611월 기벌포로 들어온 설인귀 군을 접전 끝에 물리침으로써 신라는 백제의 옛 영토를 관리하는 능력에 관해 당의 승인을 얻었다. 이것이 공식적인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과연 통일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적어도 한반도에 국호를 가진 나라가 신라만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삼국통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통일이 아니다. 우선 영토를 보면, 당시 신라가 확보한 영토는 지금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에 그쳤으니 고구려의 영토까지 포함하면 삼국의 영토 가운데 절반이 되지 못한다(애초에 신라는 백제만을 병합하고자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또한 정치적으로 신라는 당에 조공하면서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완전한 독립 왕국이라 할 수 없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한반도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 왕국에서 하나의 중국 군현으로, ‘삼국에서 일군(一郡)으로전락한 셈이 될 것이다.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오늘의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전한 통일이냐 불완전한 통일이냐로 가름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7세기의 그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정식 사대관계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 관계가 장차 19세기에 이르기까지 1300년 동안 한반도와 중국 간의 기본 관계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변방의 하나이지만, 다른 변방과는 달리 비교적 자치권이 보장된 조공국이다. 이 기묘한 관계는 점차 외교와 군사 측면에선 중국이 관할하고 내정 측면에선 한반도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이중적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매국노 공덕비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의 묘비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는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동생들과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나라로 도망가서 고구려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 셈이지만, 그는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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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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