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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소정방, 계백)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소정방, 계백)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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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행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위 초기 빛나는 대외 전과를 올린 것과 달리 후기에 가서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방탕해지는 것이다. 전쟁보다는 주로 외교에 주력하던 아버지 무왕(武王)과 달리 그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신라 공략에 나서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대야성 정복으로 기세가 최대로 올랐을 때 원래부터의 목표였던 한강 하류 수복을 시도했다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SOS를 치는 바람에 물러서긴 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으로 손이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시 신라의 일곱 성을 획득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곳곳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게 발목을 잡히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마 의자왕은 그 참에 한강 하류는 물론 신라 본토까지 상당히 잠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한동안 끊어졌던 일본과의 수교도 새로 강화해서 예전의 화려했던 백제의 위상을 거의 회복했다.

 

655년에 의자왕은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3개 성을 함락시켜 여제동맹의 위력을 시위하면서 이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된 김춘추에게 또 한 번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직후부터 의자왕(義慈王)은 달라진다. 갑자기 왕궁을 화려하게 꾸민다든가, 대규모 주연을 베푼다든가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파트너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안도한 것일까? 656년 좌평이었던 성충(成忠)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게 아니냐고 충언하자 의자왕은 그만 발끈해서 그를 옥에 가둬 죽여 버린다. 성충은 옥에서 쓴 유서를 통해 장차 큰 전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며 그때가 되면 뭍에서는 탄현(지금의 대덕)을 막고 바다에서는 기벌포(지금의 장항)를 막으라는 최후의 충고를 한다. 그러나 삼페인에 취한 의자왕의 귀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삼국사기에는 그 시기에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는 둥,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는 둥,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둥, 땅 속에서 거북이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가 멸망한다고 씌어 있었다는 둥 온갖 ‘X파일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백제의 멸망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려는 김부식의 잔머리에 불과하다.

 

당과 신라의 통일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음에도 의자왕(義慈王)이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의문이지만, 어쨌든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곧 닥쳐올 위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아마 그는 설사 당나라가 다시 한반도를 공략한다 해도 예전처럼 고구려가 일차 타깃이 되리라고만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해동증자라는 닉네임을 버려야 했다. 고구려가 강한 고리라면 백제는 약한 고리, 한반도라는 시슬을 제거하려는 중국이 약한 고리를 먼저 끊으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의 아홉째 아들이었으나 효심이 지극하다는 이유로 제위를 계승한 당 고종, 그는 즉위 후 첫 사업(?)으로 홀몸이 된 아버지의 애첩(측천무후)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으니 과연 대단한 효자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고종은 비록 아버지의 여자를 취했을망정 아버지의 숙제마저 잊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661년 서른세 살이던 한창 나이에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고 측천무후에게 국정 운영의 전권을 내맡겨 버리는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이룬 업적이 바로 한반도의 약한 고리를 끊는 일이었다.

 

 

660년 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 595~667)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13만의 대군을 배에 실어 인천 앞바다로 보냈다. 거기서 당군은 신라군과 접선한다(여기서도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한 것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제 원정의 기본 방침은 이미 태종 때 세워져 있었으니 필요한 건 세부 계획뿐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신라와의 분업이다. 백제 정벌이야말로 신라가 바라마지 않던 꿈, 따라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분업 구도에서 신라가 맡은 임무는 그다지 적극적인 게 아니다. 신라의 가장 큰 임무는 전투보다 보급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군이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는 동안 신라군은 동쪽의 공략을 담당하겠지만, 전투의 주력은 아무래도 당군이었고, 무엇보다 작전의 모든 지휘권은 소정방을 비롯한 당군 지휘관들에게 있었다.

 

일찍이 고구려 정벌에서도 중국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장성의 북변에서 랴오둥까지 천 리가 넘는 길을 원정하면서도 출발할 때부터 군량을 가지고 가야 했으니 당연히 대규모의 보급 병력이 필요했으며, 오히려 그들이 정작 필요한 전투 병력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앞서 본 것처럼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는 보급 병력이 전투 병력의 두 배를 넘었다). 현지에 있는 신라가 보급을 맡았으니 이젠 그런 곤란을 겪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전투군으로만 이루어진 13만의 병력은 홀가분하게 산둥에서 배를 타고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상륙한다.

 

보급대장격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자리잡고 태자인 김법민을 보내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가 소정방을 맞게 했다. 여기서 신라 측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은 다음 당군은 다시 배에 올라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를 향했고 신라군은 예정대로 동쪽의 물길로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으로 향하기로 한다. 그러니 사실 성충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백제로서는 탄현과 기벌포를 막아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의자왕(義慈王)은 그 뻔한 방어책을 두고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간신들이 판치는 법이다. 의자왕은 일찍이 성충과 뜻을 같이 하다가 유배되어 있던 좌평 흥수(興首)에게 의견을 구해 다시금 탄현과 기벌포라는 해답을 얻었으나, 홍수를 시기하는 대신들은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온 다음에, 그리고 당군이 백강에 들어선 이후에 공격하자는 해괴한 해법을 내놓는다. 분별력을 잃은 의자왕은 그들의 의견을 좇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어도 달라질 건 없다. 백제 왕실에서 논의가 분분하던 그 무렵에 이미 5만의 신라군이 탄현을 넘었고 당군을 실은 함대는 백강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백제의 세 충신 부여 삼충사에 소장된 계백의 영정이다. 이곳에 모셔진 백제의 3대 충신(계백, 성충, 흥수)이 하필이면 모두 나라가 멸망할 무렵의 인물이라는 게 백제의 비운을 말해준다. 계백은 세 충신 가운데서도 가장 비장한 죽음을 맞았기에 이후에도 충절의 표본으로 널리 존경받았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그제서야 비로소 다급해진 의자왕(義慈王)은 달솔(백제 16관등중 제2관등.)인 계백(階伯)에게 5천 결사대를 주어 신라군을 막게 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계백이 전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가족을 모두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은 그런 백제의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각오 덕분에 그는 황산벌(지금의 논산군 연산읍)에서 백제 병력의 열 배인 신라 병력을 상대로 네 차례 싸워 모두 이기는 탁월한 전과를 올리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백제에 대한 신라군의 두려움만 없앤다면 승산은 단연 신라 측에 있다. 이 점을 감지한 김유신의 부관 김흠순은 아들 반굴을 전사시켜 사기를 고취하려 했고, 그에 뒤질세라 또 다른 부관 김품일도 열여섯 살의 아들 관창을 윽박질러 단기로 돌입하게 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김유신의 따가운 시선을 돌려놓았다. 두 젊은이의 피로 사기를 회복한 신라군에게 백제의 결사대가 무너지면서 백제의 동쪽 전선은 붕괴했다그러나 이 전투가 끝나고 서둘러 당군과 합류한 김유신은 소정방에게 예정된 기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부터 들어야 했다. 김유신이 황산벌의 처절한 전투를 보고하지만, 101의 병력으로 고전했다는 것 자체가 소정방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까탈스럽게 나오는 소정방과 발끈한 김유신, 그러나 자칫 분업이 깨어질까 걱정한 소정방의 부관이 서둘러 중재에 나서서 무마시킨다. 소정방은 아마 실제로 그런 불만도 있긴 했겠지만, 트집을 잡아 신라 길들이기를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를 상대하는 서부 전선은 더 엉망이다. 백강에 들어온 뒤 당군은 신라가 황산벌에서 질척대고 있는 동안 거칠 것 없이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의자왕(義慈王)은 남은 병력을 모두 웅진강(백강의 지류)에 집결시켰지만 그건 적군이 백강에 들어오기 전에 했어야 할 일이었다. 무난히 강변 상륙에 성공한 당군에게 백제군은 첫 도전을 해보았으나 무려 1만 명 이상이 도륙당한다. 참혹한 패전 소식에 넋을 잃을 새도 없이 의자왕이 태자인 부여효(扶餘孝, 백제 왕실의 성은 부여씨다)를 데리고 옛 도성인 웅진성으로 도망치자 둘째 아들 부여태가 멋대로 왕을 자칭하며 도성 수비에 나선다. 하지만 나라 잃은 왕실이 존재할 수는 없다. 결국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615~682)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고 며칠 뒤인 660718일에 의자왕(義慈王)이 태자와 함께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하니, 이것이 백제의 공식적인 멸망이다.

 

 

꽃이 떨어진 절벽 의자왕(義慈王)3천 궁녀가 빠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모습이다. 물론 그것은 백제의 멸망이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 때문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진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이 절벽에서 몸을 날린 궁인들이 상당수 있었을 법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시나리오1 약한 고리 끊기

두 번째 멸망

시나리오2 사슬을 해체한다

삼국에서 일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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