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통일의 바람
중국의 질서가 변한 것은 삼국 중 가장 후발주자인 신라에게 찬스를 제공한다.
백제와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의 영토를 손에 넣은 신라는 자연히 두 나라의 타깃이 된다. 신라를 이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중국의 새로운 통일제국인 수와 당이다. 변방 정리의 일환으로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고구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중국적 질서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신라가 한반도의 단독 정권으로 발돋움한다.
1장 역전되는 역사
밀월의 끝
지증왕과 법흥왕의 2대에 걸쳐 급속히 진행된 신라의 ‘재건국’ 과정을 보면 후발주자의 이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구려와 백제가 수백 년 동안 서서히 이룬 선진화 프로젝트를 신라는 불과 50년도 못되는 기간에 완수했다. 이것으로 새 나라의 하드웨어 정비는 끝났다.
뒤이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초기에 신라는 소프트웨어 분야까지 손을 댄다. 544년에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가 완공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최초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했다【지금까지 나온 삼국시대 인물들의 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이사부와 거칠부라는 희한한 이름도 역시 이두 이름이다. 한자로는 異斯夫, 居柒夫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자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거칠부는 황종(荒宗)이라고도 쓰며, 이사부는 태종(苔宗)이라고도 쓴다. 전혀 닮지 않은 거칠부와 황종, 이사부와 태종이 어떻게 같은 이름이 될까? 이 의문은 거칠부, 이사부가 음(진짜 이름)이고, 황종, 태종이 뜻(표기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면 해결된다. ‘황(荒)’은 거칠다는 뜻이고 ‘종(宗)’은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의 보, 즉 부(夫)와 같은 뜻이다(먹보나 울보를 생각하면 되겠다). 또 ‘태(苔)’는 이끼라는 뜻이며 이끼는 옛말로 ‘잇’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황종(荒宗)’과 ‘태종(苔宗)’은 각각 거칠부(터프가이?)와 이사부(이끼 사나이?)를 뜻으로 옮긴 이름이 된다(김부식은 이두를 알지 못했으므로 거칠부 옆에 ‘혹은 황종이라고도 한다’는 주석을 붙여 놓았다)】. 이미 고구려에는 『유기(留記)』라는 역사서가 있었고(600년에 『신집新集』으로 증보, 개수되었다),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말년인 375년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했으니 그에 비하면 시기적으로 크게 늦은 것이었지만, 이제 신라는 공인 종교와 역사서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아쉽게도 그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지금 모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흥왕(眞興王)의 의도는 신라를 문화 대국으로 만들려는 데 있지 않았고, 당시 신라의 사정도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신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법흥왕 때 길이 트인 중국과의 외교 루트를 확보하는 일이다. 50년간 중국 문물의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 안정적인 수입 개방이 이루어진다면 신라의 미래는 장밋빛이 될 것이다. 때마침 신라 최초로 양나라에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이 549년에 부처의 사리를 가지고 돌아온 일은 선진국에 대한 선망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당시 신라의 모든 관리들이 흥륜사 앞에 나와 각덕의 금의환향을 환영했다).
그동안 백제와의 동맹은 신라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백제만 해도 신라로선 배울 게 많은 선진국이었지만, 백제를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한 경험은 신라에게 크나큰 자극제가 되었다. 더구나 고구려는 엄연히 나제동맹(羅濟同盟)이 맺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상대하려 하지 않고 주로 백제만 공격했다. 따라서 신라는 늘 있어 왔던 왜구의 침략을 견디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전란의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상황이 오로지 신라의 도약을 위해 편제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다. 이 시기에 장기적인 국가 발전의 초석을 놓지 않으면 도약의 계기를 놓칠 수도 있으리라.
551년 아직 소년왕의 티를 벗지 못한 열일곱 살의 진흥왕(眞興王)은 어머니의 섭정이 끝나고 친정(親政) 체제를 시작하자마자 중대한 결심을 굳힌다. 120여 년 동안 신라의 성장에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했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기로 한 것이다. 새는 알을 부수고 나온다. 그 새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했던가? 원래 껍질이란 자신이 연약할 때는 보호막이 되어주지만 더 이상의 성장을 위해서는 깨어져야 하는 법이다. 진흥왕은 기꺼이 아프락사스가 되려 한다.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꾼 것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아직 나이 어린 진흥왕(眞興王)이 그렇게까지 노회한 구상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 동맹으로 이득을 본 것은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왕(東城王) 때 재건된 백제는 무령왕 대에 다시금 고구려와 맞설 만한 전력을 갖추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잃은 반도 중부, 한강 하류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한다. 백제가 출발한 곳이자 400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던 그 고향이 아직도 적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는 것은, 백제의 국왕이라면 당연히 가장 가슴 아픈 일일 수밖에 없다. 538년 성왕은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긴다. 60년 전 고구려의 남침으로 천도한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계획적인 천도다. 무엇을 위한 계획일지는 뻔하다. 때마침 고구려는 최전성기인 장수왕 시대를 정점으로 서서히 약화되고 있는 데다가 북방에 돌궐이라는 새로운 강적의 출현으로 남부 전선이 흐트러져 있었다. 백제에겐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다.
드디어 550년 성왕은 1만의 군대를 주력으로 삼고 신라군과 가야군을 보조로 삼아 북진길에 오른다. 도살성(道薩城, 지금의 천안)을 빼앗아 서전(緖戰)을 성공적으로 장식했으나 그것도 잠시, 고구려는 즉각 역공에 나서서 백제의 금현성(金峴城, 지금의 조치원 부근)을 빼앗으니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방어하는 측은 고구려 하나지만 공격하는 측은 연합군이라는 이점이 있다. 조연들이 이렇게 오프닝을 장식하니 이제는 이 드라마의 주연이 나설 차례다. 진흥왕(眞興王)은 양측 군대가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를 시켜 기습으로 두 성을 모두 빼앗고 수비병력까지 두어 두 나라의 넋을 빼놓는다. 문제는 백제의 성왕이 여전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차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수복하는 데 필요한 전초기지를 확보했을 뿐이라는 진흥왕의 발뺌에 성왕은 쉽게 속아 넘어간다. 어차피 성왕으로서는 그 두 성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으니 동맹국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과연 그 기지를 발판으로 성왕(聖王)은 이윽고 그 이듬해에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참에 신라는 거칠부를 시켜 죽령 이북에서 철령 이남까지 고구려의 군 10개를 손에 넣었다(죽령은 오늘날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이고 철령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니까 당시 신라는 강원도 전체를 차지했다고 보면 된다. 이것으로 신라의 영토는 무려 두배로 늘어났다). 백제는 원하던 한강 하류를 수복했고, 신라는 그 동쪽 한반도 중부의 넓은 땅을 새로 얻었다. 동맹의 완벽한 합작이다. 성왕은 이렇게 여겼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진흥왕(眞興王)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십대의 청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흥왕은 교활했다. 강적인 고구려를 물리쳤으니 이제 더 이상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다. Now or never!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성왕(聖王)이 손에 든 축배를 미처 다 마시기도 전인 553년에 진흥왕은 한강 상류 주둔군을 곧장 하류로 진격시킨다. 말할 것도 없이 백제에 대한 기습이다. 진흥왕의 새가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자 100여 년 동안 반도 남부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한강 하류를 장악한 뒤 진흥왕은 백제의 옛 도읍이 있던 곳 바로 동쪽인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신주(新州)라는 기지를 설치하고 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무력에게 수비를 맡겼다【백제를 기습하기 직전 진흥왕은 도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황룡 한 마리가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을 보고 궁궐 대신 절을 지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절의 이름은 당연히 황룡사다. 그러나 하필 백제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기습 작전을 계획할 즈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뭘까? 혹시 그건 진흥왕이 동맹의 배신을 미리 염두에 두고 연막삼아 꾸민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건립되기 시작한 황룡사는 17년간의 공사 끝에 569년에 완공되어 한반도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여기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무게 20톤의 거대한 장육상이 안치되었으며, 선덕여왕 때(645년) 높이 80미터로 추정되는 목탑이 보태졌고, 경덕왕(景德王) 때(754년) 무게 300톤의 대종이 추가되었다. 고려시대까지 황룡사는 전국민의 관광지이자 학생들이 즐겨 찾는 수학여행 코스로 애용되었겠지만, 아쉽게도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목탑까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물론 장육상은 몽골 병사들이 녹여 금만 채취해갔다. 목탑과 장육상은 진평왕(眞平王)의 옥대와 함께 신라 3보였으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백제 성왕(聖王)은 어안이 벙벙하다. 오죽했으면 그 사건이 있고서도 3개월 뒤 진흥왕(眞興王)에게 딸을 후궁으로 내주기까지 했을까? 한동안 동맹이 깨졌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던 그가 비로소 닭 쫓던 개의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때는 이듬해인 554년이다. 그제야 분노한 그는 잃어버린 닭을 찾아 닭의 꼬리격인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을 대가야와 함께 공격하는데, 결국 그것은 최악의 사태를 낳고 만다. 그를 막은 것은 신주에서 내려온 김무력, 금관가야의 정통 후손이었으니 곁가지인 대가야가 당할 수 없다. 더구나 금관가야와 신라는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고 백제와 대가야는 각각 신라와 금관가야의 배신에 대한 울분에 차 있다. 애초에 승부는 결정되어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성왕(聖王)은 패배를 넘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한다.
마음놓고 있다가 배신을 당했고 섣불리 보복에 나섰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성왕으로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동맹이 깨진 것도 그렇거니와 국왕이 전사한 비극은 두 나라의 관계를 급전직하로 몰았다. 나중에도 보겠지만 이 문제는 두고두고 두 나라 간의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게 된다.
▲ 배신의 기념비 100여 년이나 이어져오던 나제동맹은 진흥왕(眞興王)의 기습으로 일순간에 허무하게 깨어졌다. 사진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서 세운 네 개의 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북한산 순수비다. 어떤 면에서는 ‘배신의 기념비’라고 해야겠지만, 사실 진흥왕의 배신을 탓하기 이전에 백제가 지나치게 신라를 얕보았던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당시 백제 성왕은 오로지 고구려 전선에만 집중했고, 신라를 보조 세력으로만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흥왕(眞興王)은 이제 마음껏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 대가야가 참여한 것은 그에게 좋은 빌미를 주었다. 이 참에 선왕이 남긴 숙제를 해결하자! 그래서 이듬해부터 그는 본격적인 가야 정벌에 나선다. 그렇잖아도 그는 4년 전 가야 출신의 우륵(于勒)이라는 음악가가 들려준 가야금의 매혹적인 선율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창녕을 정복하고 여기에 완산주를 설치하니 이제 가야는 거의 손 안에 들어왔다【풍부한 철광산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가야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신라보다 확실히 강국이었다. 한창 때 가야는 백제와 일본의 중계 무역에다 철을 주요 수출품으로 삼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도약의 계기를 맞아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게 우선 결정적인 결함이었고, 게다가 4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침략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이후 가야는 5세기 후반에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재기에 성공했으나 끝내 연맹체라는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가 스스로 신라에 복속된 것도 그 때문이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새 가야연맹이 생겨났으나 알맹이가 빠진 연맹의 운명은 이미 멸망이 예고되어 있었다】. 결국 562년에 가야는 신라에 최후의 도전을 감행했다가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가야 정벌전에서 신라군 사령관은 이사부였으나 일등공신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었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역시 어린 열아홉의 나이에 반도 중부까지 장악했다. 그런 진흥왕이었으니 열여섯의 어린 사다함이 높은 전공을 세운 것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든 게 화랑(花郞)이다. 576년에 진흥왕(眞興王)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화랑의 전통을 제도화해서 일종의 사관학교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일세의 간웅이었던 그도 젊은 시절 백제를 배신한 게 늘 마음에 걸렸던 걸까? 화랑을 만든 것을 마지막 치적으로 남기고 진흥왕은 승복을 입고 불교에 심취하다가 마흔두 살의 한창 나이로 죽는다. 그가 재위했던 36년 동안 신라는 그 전까지 600년 동안 겪은 변화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었다.
▲ 가야 철갑 중세 유럽 기병의 갑옷을 연상시키지만 가야의 철갑이다. 유럽의 갑옷보다는 간소하므로 아마 말이 없어도 이 갑옷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
6세기 중반 한반도에 신문이 있었다면 남부일보」의 톱기사는 단연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파괴와 백제 성왕(聖王)의 죽음,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이었겠지만, 북부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장수왕(長壽王) 시대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조공해 왔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북위가 534년에 동서로 분열된 소식이 일면 톱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150년 동안 중국 화북의 패자로 군림했던 북위가 사라진 것은 곧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크게 변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북위는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동위와 서위로 분리되었지만 더 이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으로 역할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위는 곧 북제로 명패를 바꾸었다가(이 때문에 남조의 제를 남제라고 부르게 된다) 서위에게 멸망되었고 서위도 얼마 못 가 557년에 북주로 바뀌었다. 또한 같은 해에 남조의 양나라도 무너지고 진(陳)이 들어섰으나 건국자인 진패선(陳覇先)이 하급 무장의 신분이었던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안정적이고 오래갈 만한 왕조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고구려의 현실 인식이다. 바야흐로 중국 대륙 전체가 다시금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으나 고구려 왕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북위에게서 랴오둥 소유를 공인받은 이래 고구려는 대중국 관계에서는 오로지 조공으로 일관하면서 한반도 문제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조공의 대상이 사라지자 고구려는 한 순간 긴장했으나 곧 동위, 북제, 북주에게 차례로 조공하기 시작했고 남조의 양과 진에게도 마찬가지로 조공과 책봉을 교환했다. 결국 고구려는 이미 사라져 버린 기존의 질서에만 집착하면서 대륙의 정세 변화를 무시하려 애쓴 것이다.
차라리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의 패자라도 되었더라면 고구려의 느슨한 현실 인식은 면죄부라도 받았으리라. 그러나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백제와 신라가 부쩍 커버린 지금에는 그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수왕을 뒤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492~519)부터 안장왕,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수시로 백제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매번 됐다 싶을 때마다 끼어드는 신라 때문에 나제동맹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면서 물러나야 했다【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는 늘 직접 타깃이 아니었지만, 설사 그럴 마음이 있다해도 신라를 직접 공격하는 루트는 강원도의 험한 지세 때문에 대규모 병력 이동이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신라가 훗날 고구려, 백제를 제치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 데는 지형적 요건도 중요하게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초기 신라는 오히려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접하지 못하고 문명의 오지에 머물러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바로 그런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즉 신라는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던 광개토왕(廣開土王) -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존망의 고비를 넘기면서부터는 장밋빛 미래가 약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진흥왕(眞興王)의 영악한 행위는 그 미래를 앞당긴 결과를 낳았지만】.
그렇다면 553년 나제동맹이 깨졌을 때 당연히 고구려는 찬스라고 여겼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백제와 신라가 성장했다 해도 1대1 대결이라면 충분히 각개격파할 수 있다. 더구나 554년에는 신라의 한강 하류 주둔군이 관산성으로 내려가 백제와 대가야를 맞아 싸우고 있었으니 그 참에 고구려가 한강 하류를 탈환하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 찬스가 순수한 가정으로만 남은 이유는 당시 고구려의 사정 때문이다. 장차 중국 대륙에 격변이 있을 것임을 하늘이 고구려에 예고해 주기라도 하듯이 북위가 멸망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고구려에는 홍수와 지진, 전염병, 태풍, 가뭄, 기근 등이 차례로 덮치며 전국을 재앙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안원왕 말기에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귀족들이 치열한 파워게임을 벌이기까지 한다. 두 왕비의 소생을 둘러싸고 귀족 세력이 추군과 세군의 두 파로 나뉘어 무력 충돌까지 빚었으니 나라 밖의 정세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 추군 귀족의 지원으로 545년에 어렵사리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이 즉위했으니 당연히 귀족들의 입김이 거세어지고 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신라에게 강원도 일대의 10개 군을 빼앗긴 것은 바로 그런 내부 문제 때문이다【당시 신라군의 사령관이었던 거칠부는 젊은 시절 승복을 입고 고구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냉전시대의 용어로 말하면 간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혜량이라는 고구려 승려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밀약을 맺었다. 장차 거칠부가 고구려를 공격할 경우 혜량은 그에 호응하는 대신 일신의 안위를 약속받았으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주역인 이완용의 까마득한 선배에 해당한다. 강원도를 정복한 거칠부가 혜량을 다시 만나 제자의 예를 올리자 혜랑은 ‘지금 우리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 곧 망할 것 같으니 나를 신라로 데려가달라’고 말한다. 비록 매국노의 눈치 빠른 판단이지만 혜량의 그 말은 당시 고구려의 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게다가 551년부터는 북부의 돌궐이 신흥 세력으로 등장해서 고구려 북변을 침공하기 시작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양원왕은 백제 성왕(聖王)이 죽은 것을 알고 뒤늦게 소규모 병력을 배에 실어보내 웅천(지금의 안성 부근)을 공략하지만 뭍의 지원군이 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엉성한 상륙작전이 성공할 리 없다.
밖에서 죄어오고 안에서 곪아가는 고구려의 내외 사정은 양원왕 다음에 즉위한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때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무렵부터 다시 남진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느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때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장수왕(長壽王) 시대와는 다른 이유에서다. 그 시대에 남진은 영토 확장을 위한 선택과목이었으나 이제는 생존을 위한 필수과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정세가 워낙 급속히 바뀌는 탓으로 고구려는 지속적인 조공 외교를 맺을 중국의 적절한 왕조를 찾기에도 바쁠 지경이다. 아마 이 무렵 평원왕은 장차 랴오둥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는 것 밖에는 없다. 일단 평원왕은 북조의 북주와 더불어 남조의 신흥 제국인 진나라에 조공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외교라기보다는 관행에 불과하다. 오히려 북주는 고구려에게 랴오둥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면서 무력 침공까지 해온다. 이래저래 고구려는 한반도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586년 장안성(長安城,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심기일전의 계기다(그 이전의 평양성은 오늘날 평양의 북변 외곽에 자리잡았으나 이때부터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 되었다). 그런 왕의 심정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신하들보다 사위였다. 평강공주의 탁월한 안목으로 바보 거지에서 일약 용맹스런 부마가 된 온달(溫達)은 북주의 공략에서도 빛나는 전과를 세워 대형(大兄)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 출신의 비천함을 만회하려는 노력에서였을까? 사냥 솜씨만큼 전장에서도 자신있다는 심정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스승이자 아내인 평강공주에게 보은하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온달은 590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하류를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노라는 각오를 다지며 남진에 나선다.
그러나 고구려 병사들은 이미 최근 50년 동안 별다른 전과를 올려본 적이 없는 약졸들로 전락해 있다. 용맹한 장수와 나약한 병졸은 전쟁에 임하는 최악의 조합이다. 결국 온달은 지금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을 공략하던 중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마침 그 해에 평원왕도 죽자 이후 고구려는 다시금 남진을 획책하지 못하게 된다.
▲ 사람 잡는 아차산 아차산을 위험 지역으로 본 500년 전 비류는 과연 혜안이 있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죽은 곳도 이곳이고, 바보였다가 부마가 된 고구려의 장군 온달이 죽은 곳도 여기다(관산성에서 전사한 성왕(聖王)도 실은 이곳을 빼앗겼기에 죽은 셈이다). 사진은 서울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이다. 한강을 굽어보는 이 산성을 점령하면 최소한 한강 이북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극히 중요한 요처였다.
대륙 통일의 먹구름
사위가 남부 전선에서 고군분투할 즈음 평원왕은 서쪽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중국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소식이다. 북주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隋)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9년 전에 들은 바 있었고, 그때 평원왕은 즉각 수 문제(文帝)가 된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과 책봉을 교환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수 문제가 진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워낙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수나라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왕조려니 생각했었다. 당시 대륙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50년이 채 못 되었고 북주 같은 경우는 그 절반도 못 되었으니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싶은 게 평원왕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달랐다. 북주가 간신히 통일해놓은 화북을 꿀꺽 집어삼키더니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강남까지 노리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589년에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정복하고 오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켰다.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무려 369년 만에 천하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평원왕(平原王)으로서는 그동안 수나라에 형식적인 조공으로 체면치레만을 해온 게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병기를 수리하고 군량을 비축하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시작했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답게 수 문제는 눈치도 빠른 위인이었다. 그는 즉각 평원왕에게 사신을 보내 입으로는 중국을 받든다면서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하며 함부로 처신하면 고구려 국왕을 폐위하고 자기 측근을 왕으로 보내겠다고 노골적으로 을러댄다. 형식적으로 고구려 왕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중국 황제가 고구려의 왕을 바꾸려는 시도는 전에도 없었고 실제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남부의 전황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평원왕은 그만 기 싸움에서부터 밀려 버렸다. 그는 결국 사과의 답신을 준비하던 도중에 죽었는데, 실은 서신을 보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미 수 문제는 고구려의 랴오둥 소유를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고구려를 정벌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었으니까.
사실 중국은 분열시대가 워낙 오래 지속되었던 탓에, 한편으로는 오래 전부터 통일이 예고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항아리 속에 있으면서 항아리의 모양을 알기는 어렵다.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었을 때도 아마 당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통일이 오래 가리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남중국과 북중국이 합쳐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나 특별한 후각을 지닌 정세분석가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러다가 곧 다시 남북으로 나뉘겠거니 여겼을 것이다.
아마 남중국의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런 예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족 왕조들이 꾸려 온 남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남북조시대 내내 물리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세운 호전적인 북중국의 왕조들은 북위가 지배하던 안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따라서 새 통일제국인 수나라가 북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 정치적 통일이 예상 외로 강력하리라는 점을 말해주는 하나의 증거였다【그 가운데서 남조의 왕조들은 후대에 ‘육조(六朝) 르네상스’라 불리는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오, 동진, 송, 제, 양, 진 등 남조의 여섯 왕조를 육조라고 부른다). 화가 도연명(陶淵明), 고개지, 서예가 왕희지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반면 북조의 왕조들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균전제(均田制)와 과거제(科擧制) 등 사회 제도를 만들었으니 분열시대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마치 분업처럼 각기 중국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중국 역사는 분열기에 성장ㆍ발전하고 통일기에 안정ㆍ퇴조하는 현상을 반복한다】.
게다가 한반도 왕조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북중국이 통일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기도 했다. 지난번의 통일제국인 한나라, 그리고 분열시대 초기의 위나라는 모두 화북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였다(사실 중국은 늘 화북에 정치적 중심을 두고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삼는 게 기본 공식이다. 이 점에서는 오늘날의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고조선과 고구려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제 수나라가 어떻게 나올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런 걸 가리켜 바로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한나라가 진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했을 때 한반도 북부에는 한의 군현이 설치되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목 안의 가시 같은 한4군을 제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마침내 끝났나 싶었을 때 한나라가 멸망했고 이어 화북은 위나라가 장악했다. 고구려는 다시 위나라의 변방 다지기에 주요 타깃이 되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했다. 이후 중국에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면서 고구려는 한편으로는 힘을 바탕으로 화북 왕조들과 맞싸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랴오둥까지만 진출하겠다는 약속을 바탕으로 조공 외교를 벌였다. 그 약속을 받아들인 게 바로 북위였으며, 북위가 화북을 지배하는 동안 고구려는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북위는 강남까지 아우르지 못한 반쪽 제국이라는 결함을 지닌 탓에 고구려와 타협해야 했고, 고구려는 어차피 중원을 목표로 하는 중국형 왕조가 아니었으므로 서열을 인정하는 선에서 북위와 타협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렇게 보면 고구려의 평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언제든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설 경우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한반도의 삼국이 서로 다투면서도 성장과 번영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수 문제의 대륙 통일이 곧바로 한반도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원왕(平原王)은 죽으면서 답신을 보내지 못한 것을 무척 걱정했겠지만 그 답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 오랜만의 통일 천자 비록 길기는 했으나 중국의 분열은 결국 새로운 통일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무려 400년 가까이 지나서 다시 대륙 통일을 이룬 수 문제 양견(楊堅)의 모습이다. 그림에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오랑캐로 취급되는 선비족의 혈통이었고, 북주의 외척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소인배였다. 중국이 통일되면서 한반도 삼국이 그간 누려왔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다툼은 끝나게 된다.
고구려의 육탄 방어
같은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와 대책이 달라지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한반도 땅에서 서로 접경하고 있는 처지에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은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뜸 수나라의 침략을 걱정했으나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즉각 수나라의 천하통일을 치하하는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나아가 598년에 위덕왕(威德王)은 수 문제가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꺼이 길잡이가 되겠다고 나서기까지 한다. 지리적으로 백제가 중국의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를 맡을 수는 없는 데다 그 자신도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으니 위덕왕은 그냥 제스처를 취해본 데 지나지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고구려에 대해 원한이 사무쳤던 걸까?
아무튼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위덕왕의 길안내를 받을 마음은 없었고 시기도 아직 일렀다. 수 문제가 분노한 것은 고구려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평원왕에 이어 즉위한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은 아버지의 숙제였던 수나라의 책봉을 받아내면서 처음에는 매끄럽게 출발했다. 그런데 그 후에도 매년 수나라에 조공하던 영양왕은 갑자기 598년에 랴오시를 침략한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광개토왕(廣開土王) 이래 고구려군이 랴오허를 넘어 서쪽으로 진군한 것은 그게 처음이다. 이에 격노한 수 문제는 영양왕의 관직을 박탈하는데, 이것은 이제부터 고구려를 신하국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태도다.
영양왕은 왜 그랬을까? 혹시 그는 어차피 수나라와 평화로이 지내기는 글렀다고 판단했던 게 아닐까? 일찍이 진과 한이 그랬듯이 중국에 통일제국이 들어선다면 당연히 변방 정리를 최우선 사업으로 삼을 테고, 동북 변방의 고구려는 그 타깃이 될 것이다. 고구려에게 랴오둥을 계속 소유하게 해주지 않는 것은 기본일 테고 아마 고구려를 아예 멸망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통일제국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했을 때 선제 공격을 하는 편이 낫다. 영양왕의 생각은 이랬던 게 아닐까? 그러나 영양왕은 그럴 만큼 탁월한 정세분석력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장마와 전염병에 폭풍까지 만나 병력 수송이 여의치 못하자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수 문제에게 사죄의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위덕왕의 처사를 괘씸히 여겨 백제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방향을 돌렸다.
수 문제는 영양왕(嬰陽王)의 일탈(?)을 용서했으나 그의 아들로 수나라 2대 황제가 된 양제(煬帝, 재위 604~618)의 생각은 달랐다【아버지와 형을 살해할 만큼 잔혹한 인물이긴 해도 양제는 통일제국의 황제답게 스케일이 큰 군주였다. 특히 대외적 안정에만 힘쓴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제국을 제국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래서 벌인 게 대운하 건설이다. 이것은 정치적 중심인 화북의 황허와 경제적 중심인 강남의 양쯔강을 남북으로 잇는 엄청난 규모의 운하인데, 당대의 백성들은 그 대역사 때문에 죽어나야 했고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 양제는 큰 욕을 얻어 먹어야 했지만 이 운하는 오늘날까지도 잘 사용되고 있으니 지금의 중국인들은 오히려 양제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이집트를 관광대국으로 만든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 시황제가 남긴 방대한 시황릉,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지던 로마의 콜로세움 등은 모두 당대에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은 건설 사업이지만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 인류의 문화유산은 보잘 것 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역사적 평가란 없는 걸까?】. 먼저 아버지가 시작한 정복사업을 이어받아 북쪽의 돌궐과 서쪽의 토욕혼(Tuyuhun, 吐谷渾)을 물리친 다음 그는 고구려를 2차 작전 대상으로 선포한다(앞서 한 무제에게 쫓겨난 흉노의 경우처럼 돌궐도 둘로 나뉘어 동돌궐은 고구려 북변을 침략했고 서돌궐은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동 도미노를 낳게 된다. 607년 고구려 사신이 있는 자리에서 양제는 고구려 왕이 직접 황궁으로 와서 예를 올리지 않으면 장차 응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제 발로 적지에 들어가 죽을 왕은 없으니 그건 명백한 선전포고다.
그로부터 4년 뒤인 611년 드디어 수 양제는 일정을 확정하고 제국 전체의 군대를 베이징 북쪽의 탁현(涿縣)으로 소집했다. 그가 발표한 출사의 변은 상당히 장황한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고구려는 오랑캐 나라다.
둘째, 오랑캐임에도 중국에 제대로 조공하지 않는다.
셋째, 조공하기는커녕 중국의 달력과 연호도 사용하지 않는다.
넷째, 백제와 신라가 중국에 조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다섯째, 고구려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주목할 것은 셋째다.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때부터 북위에 조공하며 상국의 예우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양제의 말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중국을 섬기면서도 중국의 연호를 쓰지는 않았다. 고대국가에서 연호란 독립국의 상징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위에 사대하되 속국화되지는 않았고, 북위 역시 고구려의 상국이라고 자처하는 정도에서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분열기에는 이렇게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가능해도 통일기에는 그럴 수 없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하리라는 점은 이것으로도 증명된다.
이듬해인 612년 정월에 출발한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군은 우선 규모에서부터 엄청났다. 전투 병력만 113만 3천 800명에 보급 병력이 그 두 배였으니 아마 크세르크세스 시대(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군 이래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가 아닐까 싶다(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 다국적군은 528만 3천 220명이라고 하는데,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좌우간 어지간히 많았던 모양이다). 매일 한 부대씩 출발시켰는데 다 보내는 데만도 4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수 양제로서는 총력을 기울일 만도 한 것이, 그에게 고구려는 마지막 정복 대상이었다. 즉위하고 얼마 뒤에 북방의 돌궐과 서역의 토욕혼을 정복했으니 이제 유일한 적은 동북방의 고구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세를 몰아 고구려마저 제거하고 아직도 불안정한 신생 통일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게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는 토욕혼이나 돌궐과 다른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유목 민족이었으므로 적을 당해낼 수 없을 경우에는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면 그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늘 서쪽이 열려 있었으므로 언제든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달아날 수 있었고, 실제로 수나라에 밀려나게 되자 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농경 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었으니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이 심한 데다 달아나고자 해도 달아날 데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있을 뿐 아니라 설사 그곳으로 도망쳐봤자 곧 바다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만 나올 뿐이다. 따라서 어차피 고구려는 백만이 아니라 천만의 병력이 쳐들어온다 해도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또 한 가지, 고구려는 돌궐이나 토욕혼과 달리 일정한 강역과 성곽을 지닌 국가였다(이것 역시 농경문명의 붙박이 성격 때문이다). 중국처럼 국경 주변에 장성을 두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요처마다 산성을 쌓아 방어했으므로 수비 병력에 비해 훨씬 많은 공격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격하는 수나라 군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야만 앞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당시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은 대중국 수비를 위해 남북으로 포진해 있었는데, 오늘날 만주의 하얼빈 – 창춘 - 쓰핑 – 푸순 – 선양 – 안산 – 다롄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시들은 그 성곽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이 점이 전면전으로는 최초로 맞붙은 중국 고구려 대전의 승부를 갈랐다.
▲ 빛과 그늘 100만이 넘었다는 수나라의 병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부풀리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습관일지도 모르지만 중국이 이긴 전쟁도 아닌데 과장할까 싶기도 하다. 살수대첩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을지문덕은 사진에서처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으로뿐 아니라 을지로라는 서울 중심가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일등공신인 건무는 잊힌 채 그늘 속의 영웅으로 남았다.
수 양제(煬帝)는 대담하게도 고구려의 주요 성곽인 요동성(지금의 랴오양) 서쪽 부근에 자신이 머물 진을 차렸다. 그의 전략은 본군으로 랴오둥의 고구려 성들을 하나씩 부수는 한편 선박에 병력을 나눠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런 공격측의 전략에 따라 방어하는 고구려도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이 두 전선에서 위기의 고구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 두 명이 등장한다.
수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내호아(來護兒)는 거칠 게 없다. 비록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다지만 함선들의 길이만도 수백 리나 뻗을 정도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수나라의 수군이 대동강 입구로 들어오는 동안 고구려의 선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순조롭게 대군을 상륙시킨 내호아는 곧바로 평양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비로소 고구려군의 한 무리가 저항하는데 달걀로 바위치기가 따로 없다. 손쉽게 달걀을 깨버린 뒤 내호아는 내친 김에 후속부대들이 오기 전에 평양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측근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정예군 수만 명을 추려 평양으로 진격했다. 정예군은 도중에 맞부딪친 고구려군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며 평양성 안에 들어섰다. 그러나 너무 싱겁다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들은 이미 매복에 걸려 있었다.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建武)가 지휘하는 고구려 정예군은 그들이 약탈에 전념할 때를 기다려 동시에 덮쳤다. 혼비백산한 내호아가 겨우 몸을 추슬러 성 밖으로 나왔을 때 뒤따라 온 병사들은 수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고구려군의 거센 추격으로 그들은 불과 얼마 전에 호기롭게 진격하던 길을 거슬러 배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런 양상은 북부 전선, 즉 랴오둥에서도 되풀이된다. 요동성은 수나라 본군의 집요한 공략을 받고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다른 성들도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돌궐과 위구르를 상대할 때처럼 벌판에서 먼지 날리며 한바탕 붙을 생각에 전의를 불태웠던 수나라 지휘관들은 속이 탔지만, 고구려군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성에 전념하고 있으니 도리가 없다. 결국 그들은 본군을 둘로 나누어 선발대를 고구려 영토 깊숙이 전진시키기로 한다. 선발대의 병력만 해도 무려 30만 5천 명이니 사실 그걸로도 고구려 정복은 충분하다. 문제는 지쳐 버린 병사들이었다. 압록강변에 도착한 뒤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100일분의 식량과 각종 무기에 천막까지 주었으나 병사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조차 짊어질 힘이 없었다. 식량을 버리는 자는 죽이겠다고 을러대자 병사들은 남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기까지 했다.
사기는 이미 최저인 상태였으나 워낙 병력의 규모에서 앞선 탓으로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건너 기세좋게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고구려군 사령관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단신으로 적진 깊숙이 잠입해서 돌아보고 온 터라 적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평양성까지 중간이나 왔을까, 예상했던 대로 수나라 군은 식량이 떨어졌다. 그래도 고구려군은 싸우다 퇴각하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정면으로 맞붙어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평양성까지는 왔으나 우중문과 우문술은 도저히 성을 함락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들에게 묘한 제의를 해온다. 여기서 군대를 돌려준다면 영양왕(嬰陽王)을 모시고 양제가 있는 곳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준다면야 오죽 좋으랴. 심신이 피곤한 탓에 그들은 분별력을 잃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나라 병사들이 등을 보이자 곧바로 고구려군의 화살이 빗발쳤다.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어 수나라 정예군이 싸우다 퇴각하기를 반복하는 식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결국 청천강에 이르러 수나라 병사들은 고구려군에게 덜미가 잡혔다. 절반은 강물에 빠져죽고 절반은 화살에 맞아 죽으니 이것이 우리 역사에 살수대첩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청천강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만에 450리를 도망쳐 간신히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그 수는 불과 2천 700명이었다.
▲ 유물을 품은 강 살수대첩의 전적지인 청천강의 모습이다. 1300년 전 수나라 군사들이 퇴각하다가 몰살당했을 정확한 전적지는 알 수 없다. 워낙 많은 병사들이 죽었으니까 이 부근 어딘가를 파보면 아마도 당시의 부장품이 상당수 발굴될 것이다. 이곳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명들은 대부분 아직까지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살수는 보통명사였고 청천강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수나라의 대군은 수륙 양면에서 완벽히 패했다. 그러나 수 양제는 좌절 대신 분노와 복수심을 불태운다. 이듬해인 613년, 그는 측근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사실 1차전에서 건무와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구국의 영웅으로 활약했다지만, 고구려가 승리했다기보다는 수나라가 자멸했다고 봐야 한다.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그냥 지나친 것은 하루라도 빨리 고구려의 수도로 진격하겠다는 조급증의 발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요동성부터 확실히 정복하고 천천히 진격하는 작전이 채택된다. 요동성은 랴오둥 방어망의 핵심, 따라서 이곳이 무너지면 랴오둥도 넘어간다. 새로운 전략은 과연 효험이 있었다. 요동성 수비대는 악착같이 버텼으나 워낙 병력의 차이가 큰 탓에 점차 힘에 부친다는 게 명백해졌다. 수나라 군은 성벽보다도 높은 누대를 지어놓고 화살과 돌을 퍼부어댔다. 풍전등화의 위기, 그러나 먼저 국운이 다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수나라였다.
요동성 함락을 눈앞에 둔 양제에게 본국으로부터 급전이 전해졌다. 평소에도 양제의 전횡에 반대하던 양현감(楊玄感)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지만 죽 쒀서 개 주는 격이라면 밥도 죽도 아니다. 더구나 양현감과 친분이 있는 곡사정(斛斯政)이라는 지휘관이 고구려 측으로 투항하는 사태가 생기자 양제는 할 수 없이 철군을 명령한다.
집요한 양제는 그래도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고 사태를 추스른 다음 614년에 다시 그는 3차전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먼 랴오둥 땅에서 헛고생만 한 장수들은 묵묵부답이다. 어쨌든 황명을 받은 내호아가 수군을 거느리고 해안쪽에서 랴오둥을 공략해 들어가는데, 지친 건 양측이 마찬가지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는 영양왕은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곡사정을 수나라에 돌려보냈고 역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은 다시 철수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직접 입조하라는 양제의 명에는 따를 생각이 없다. 양제는 또 분노해서 4차전을 계획하지만 이제는 그 자신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3년간의 접전 끝에 종합 전적 1승 1무 1패로 무승부를 기록한 양제와 영양왕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618년)에 죽었는데, 양제는 부하인 우문화급(于文化及)에게 살해당했으니 아마 더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주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은 심각했다. 대규모 전란으로 국력이 탕진된 두 나라는 이후 급속한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고구려 원정에서도 늘 조급함 때문에 일을 그르쳤던 수나라는 명을 재촉하는 데서도 조급했다. 양제가 암살되자 그의 이종사촌인 이연(李淵)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의 명패를 당(唐)으로 바꾸었다【양제의 성인 양(楊)씨, 그를 살해한 우문(宇文)씨, 그리고 당을 건국한 이(李)씨는 모두 고향이 같으므로 일가붙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한족의 성씨가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화북을 지배하던 북방 민족의 성씨들이다(아마 선비족의 성씨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목할 것은 나중에 이씨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이성계도 그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지만 그의 조상은 대대로 몽골의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므로 북방 혈통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씨 하나로 모든 혈통을 추적할 수는 없지만 혹시 이성계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면 당나라의 건국 세력, 나아가 남북조시대 선비족에게까지 연결될지도 모른다】. 결국 수나라는 불과 30년도 존속하지 못하고 새 통일 왕조로 교체되었으니 일찍이 진ㆍ한 교체기와 너무도 닮은꼴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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