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투파와 무덤
매장이나 화장이나, 후대에 기념될 만한 훌륭한 인물의 경우, 봉분을 가진 분묘를 만든다고 하는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대로다. 다시 말해서 스투파란 단순히 화장의 결과로서 생기는 묘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시 묘는 지상의 봉분이 없었다. 봉분이 있는 묘는 산동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를 그 효시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파도 지상에 높고 큰 봉분을 만든다. 그런데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흙으로 만든 봉분은 그 형태를 유지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납작한 벽돌로 쌓아올린다. 그러나 그 외형적 형태는 우리나라 봉분의 묘와 대차 없다. 봉분(覆鉢, aṇḍa)을 기단(基壇, medhī) 위에 올려놓고, 봉분의 꼭대기에는 옛날에 귀인들에게 우산을 바쳐드렸던 습관이 있어서 사암(沙岩) 세 판으로 만든 산개(傘蓋, chatrāvali)를 윤간(輪竿)을 중심으로 꽂아놓는다. 그리고 기단 주변으로 난간(欄楯, vedikā)을 둘러쳐서 성ㆍ속의 구분을 짓는다. 이것이 산치대탑(the Great Stupa at Sanchi)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스투파의 기본 스트럭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흙과 떼장의 봉분묘나 인도의 벽돌 복발(覆鉢, 동그란 사발 엎어놓은 모양) 스투파나, 그 속에 살과 근육이 부식된 뼉다귀를 보관하고 있는 묘라는 의미에서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나라 묘의 경우는 시신을 통채로 넣어야 하기 때문에 묘가 하나 밖에 있을 수 없지만, 인도의 스투파는 뼉다귀만 넣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인의 묘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chatrāvali | ||||||||||
aṇḍa | ||||||||||
medhī | ||||||||||
vedikā |
▲ 산치대탑(Great Stupa of Sanchi)
스투파와 탑
원래 ‘탑’(塔)이라는 글자는 중국에 없었다. 선진(先秦)문헌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진(晉)나라 시대에 오직 ‘스투파’라는 말을 음사(音寫)하기 위하여 조자(造字)된 것이며, 남북조 시대의 제(齊)ㆍ양(梁) 간에 유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20세기 들어와서 ‘커피’라는 말 때문에 ‘가배’(咖啡, 카훼이)라는 요상한 글자가 쌩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포박자』(抱朴子)를 쓴 갈홍(葛洪, 283~343)의 『자원』(字苑)에 그 첫 용례가 보인다. 『설문신부』(說文新附)에 ‘탑이란 서역의 부도(浮屠, 무덤)를 말하는 것이다[塔, 西域浮屠也].’라고 명료히 규정되어 있다.
중국문헌에 스투파는 솔탑파(率塔婆) 등, 다양한 음사가 있다【卒塔婆, 率都婆, 率都波, 窣覩波, 窣堵波, 窣覩婆, 窣堵坡, 藪斗波, 蘇偸婆 등 무수히 다양한 음사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간략화되어 탑파(塔婆)가 되고, 더 간략화되어 탑(塔) 한 글자로 된 것이다【塔婆는 兜波, 偸婆 등으로도 쓰이는데, 그것은 산스크리트어의 ‘stūpa’에 대하여, 프라크리트어의 ‘thūva’의 음사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탑(塔)은 복성모의 글자일 수는 없고, 스투파가 줄어서 된 것이다. 그러니까 탑과 스투파는 전적으로 동일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불타의 화장무덤이 스투파이고, 스투파가 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에 직면하게 된다.
무덤 = 스투파 = 탑
무덤 = 탑
그런데 과연 우리는 탑을 무덤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탑이라 하면 절간에 있는 장식적 조형물로 생각할 뿐이지, 탑이 곧 불타의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깐에 공양을 드리러 가면, 반드시 절깐의 저 끝 높은 곳에 우뚝 서있는 대웅전을 찾게 되고, 대웅전에 의젓하게 앉아계신 본존불을 찾게 마련이다. 궁궐에 가도 반드시 임금이 앉아있던 근정전을 가봐야 지존무상의 센터에 왔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옆 한 구뎅이에 있는 후궁방에 가보고 궁궐을 봤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를 들어가도 푸른 개와지붕 속의 대통령을 만나야지 비서실에서 끼웃거리다 오면 청와대 갔다 왔다고 폼잡지는 못할 것이다. 대웅전에서 내려다 보면서 양옆으로 비켜 서 있는 아담한 쌍탑 건조물이야말로 본시 절깐이라는 승가, 즉 승가람(僧伽藍, samgharama)의 센터요, 대웅전의 본존불보다도 훨씬 더 본질적인 신앙이나 경배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 즉 사찰의 탑중심구조와 불상중심구조의 변화는 상전벽해의 기나긴 불교사의 문제, 즉 소승과 대승이라는 사상사적 문제, 승가의 성립을 둘러싼 제도사의 문제, 불교건축사ㆍ미술사의 제문제 전반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영역이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내가 이 자리에서 상술할 수가 없다.
▲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8세기 중엽에 성립되었다.
스투파와 사당
스투파에 대한 의역(意譯)은 없었는가? 물론 있다. 그 뜻을 풀어 뭐라 했는가? 스투파를 의역한 예로써 ‘방분’(方墳), ‘대취’(大聚), ‘취상’(聚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무덤의 형태와 관련된 것이다. ‘대취’(大衆)라는 것은 벽돌을 크게 쌓아올렸다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에 관한 의역 외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스투파의 의역이 바로 『법경경』(法鏡經)에 나오는 ‘묘’(廟)라는 표현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는 아예 ‘부처님의 종묘[佛之宗廟]’라고 표현하고 있다【이러한 문제에 관한 매우 상세하고도 중요한 논의로서 우리가 꼭 봐야 할 논문은 사계의 대석학인 히라카와 아키라의 하기서를 들 수 있다. 여기 그 자세한 내용을 다 소개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大乘佛敎と塔寺’ 平川彰著作集 第4卷, 『初期大乘佛敎の硏究Ⅱ』(東京 : 春秋社, 1997), pp.189~218.】.
한자문화권의 초기이해는 무덤과 관련된 원래의 의미와 모습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묘(廟)란 무엇인가? 묘(廟)라는 자형을 보면 ‘广’ 속에 ‘朝’가 들어가 있다. 묘라는 곳은 원래 조례(朝禮)를 행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정일치시대에는 무덤과 조례를 행하는 곳이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정분리가 일어나면서 조정과 종묘가 분리된 것이다. 『설문』(說文)에서는 묘(廟)를 쌍성첩운자(雙聲疊韻字)인 모(貌)로써 해설하고 있다. 즉 묘라는 것은 조상의 모습이 서린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스투파를 부처님의 묘로서 기리는 뜻은 『대반열반경』에서 죽어가는 싯달타 자신이 설파했듯이, 그곳에 싯달타의 모습이 서려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왜 한식날에 성묘를 가는가? 성묘(省墓)란 곧 묘를 살핀다는 의미며, 그것은 곧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버이의 모습이 서려있기 때문에 그 어버이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 삶에 실천하고자 하는 각오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에게도 탑(塔)은 묘(廟)이며 묘(墓)이었다.
그리고 원시불교의 승가의 형성이나, 가람의 형성, 그리고 신앙의 제형태는 모두 이 불타의 스투파와 관련된 것이다. 불교신앙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행위가 ‘탑돌이’(the circumambulation of the stūpa)였던 것이다. 우리도 지금 부모님 묘소를 가면 묘를 몇번 빙 둘러보고 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동일 것이다. 원시불교의 승가형성은 대부분 스투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가람의 배치도 물론 탑중심이었다. 산치대탑의 주변으로 형성된 산치승원의 구조는 가장 오리지날한 승가의 한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이런 문제에 관한 매우 훌륭한 논의는 다음의 논문을 보라. 佐和隆硏, ‘佛塔と佛舍利の信仰,’ 『佛敎敎團の硏究』, 芳村修基編(京都 : 百華苑, 1968), pp.589~615. 인도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가람배치에 관한 역사적 변천을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 산치대탑과 그 주변으로 형성된 가람의 배치를 잘 보라! 이것이 기원 전후 세기의 사원의 모습이다.
전탑, 목탑, 석탑
우리에게 친근한 예로써 이 스투파의 원형에 가장 가깝게 오는 것이 바로 경주 분황사(芬皇寺)탑이다. 우선 분황사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의 일반형태와는 달리 모전석(模塼石)이긴 하지만 작은 벽돌들을 쌓아올렸다는 것과, 그 형태가 중국에서 발전된 누각의 형태가 아닌 돌무덤 스투파의 원형에 가깝게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황사의 발굴터를 보면 그 전체 가람의 배치가 1탑중심이라는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되어야할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하는 것은 석탑이지만, 그것은 실상 순수한 석탑이 아니고 목탑의 형태를 돌로 옮겨놓은 것이다. 목탑이 석탑화되는 가장 초기의 장중한 실례가 바로 익산의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이며, 이 석탑의 발전적 형태로서의 단촐한 아키타입을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의 5층석탑, 경북 월성의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동ㆍ서 3층석탑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래 스투파와 다른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투파에 해당되는 부분이 완전히 퇴행된 장식으로서 우리 눈에 잘 안보이는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산치대탑의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면 그 후로 이미 인도에서 기단부분이 확장, 자꾸 계단식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기단부분이 2계, 3계, 4계로 점점 확장되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되는 복발이 상대적으로 작게 얹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단부분의 계단식 확장이 중국에 오면 아예 고층 누각의 형태로 바뀌면서 목조 건물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목조누각식탑(木造樓閣式塔)이 남북조시대의 사원건축의 중심에 배치되게 되었는데, 이러한 목조누각식탑의 가장 장중한 우리나라의 예가, 현존하지 않지만 황룡사(皇龍寺)의 9층탑이다. 그리고 익산의 미륵사 중앙의 9층목탑도 이 황룡사 9층탑을 계승한 비슷한 규모의 탑이다. 그 정확한 유지(遺址)의 주춧돌 모습의 정황에 미루어 그 원형을 상상속에 복원할 수가 있다. 그리고 출토된 치미의 거대함으로 보아 부속건물들의 장쾌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연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이며, 이것은 비록 후대에 재건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호오류우지(法隆寺)의 5중탑(五重塔)의 조형을 이루는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호오류우지(法隆寺)는 쇼오토쿠 타이시(聖德太子, 574~622)와 스이코 텐노오(推古天皇, r, 592~628)의 발원으로 607년에 완성되었고, 법주사(法住寺)는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팔상전 5층목탑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8년(1605)에 사명당ㆍ벽암 등에 의하여 중창이 시도되었다. 전후 폐허의 열악한 상황에서 스님 목수들의 22년간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1626년에 완공을 보았던 것이다. 황룡사(皇龍寺) 역시 553년에서부터 6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에 걸쳐 3금당1탑식의 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황룡사, 법주사, 호오류우지가 모두 일목탑구조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원형은 같은 시대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장중한 분황사 모습. 인도 스투파 개념에 가장 가깝게 오는 우리나라의 벽돌 탑이다. 634년 창건. 현장이 인도를 여행할 즈음.
부록 8.1. 미륵사에 세 개의 탑이 조성된 이유
익산의 미륵사는 멸망해가는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r, 600~641) 때 창건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결과가 일치되므로 조성연대는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유물이 미륵사 두 개의 석탑 중의 서탑이다. 그리고 최근 1992년에는 현존하는 서탑에 준하여 남아있는 부재들을 활용하면서 9층의 동탑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최근의 발굴결과, 서탑과 동탑 사이에 거대한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중앙 1목탑 양쪽 2석탑의 뒤쪽에는 각기 3개의 금당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금당 사이로 회랑이 있어 1탑1금당이 하나의 독립된 사원을 이루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1탑1금당을 하나의 독립된 사원의 유니트로 보면 3개의 사원 유니트가 합쳐진 모습이다. 이러한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의 삼원(三院)식 배치는 당대 어느 곳에도 유례가 없는 유니크한 것으로 미륵사상과 관련 있는 백제인의 창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배치의 심층구조는 황룡사의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의 체계를 계승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황룡사의 일목탑삼금당(一木塔三金堂) 체계에다가 양쪽으로 목탑(木塔)의 카피로서의 두 석탑(石塔)을 놓으면 그것은 곧 미륵사가 되기 때문이다.
금당 | 금당 | 금당 | ||
목탑 |
<황룡사>
↓
금당 | 금당 | 금당 | ||
석탑 | 목탑 | 석탑 |
<미륵사>
그러니까 미륵사의 전체구조는 어디까지나 금당중심구조라기 보다는 탑중심구조의 사찰배치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새로운 획을 긋는 미륵사의 역사적 의의는 목탑의 카피로서의 두 개의 석탑의 존재에 있다. 왜 그러한 발상을 했을까? 세 개의 탑을 조성해야만 할 필연성이 어디에 있었을까?
이것은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이(卷第二) 무왕조(武王條)에 나오는 기사에서 그 정해(正解)를 찾을 수밖에 없다. 절 자체의 이름이 미륵사(彌勒寺)라는 사실, 그리고 그 뒤의 산의 이름이 용화산(龍華山)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그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결정적 단서는 ‘乃法像彌勒三會,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라는 기사 그 자체에 이미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기존의 대부분의 번역이 ‘미륵삼회(彌勒三會)’를 ‘미륵삼존(彌勒三尊)’으로 잘못 교정해놓은 낭설에 근거하여 해석상의 오류를 발생시키고 있으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원문에 따라 정확하게 해석되어야 옳다. ‘미륵삼회(彌勒三會)’라는 것은 미륵이 도솔천에 올라간 지 56억7천만년 후에 다시 인간세로 내려올 때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세 번의 설법집회를 갖는다는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신앙과 관련있는 것이다. 첫 번째 집회[初會]에서 96억명의 사람을, 두 번째 집회[二會]에서 94억명의 사람을, 세 번째 집회[三會]에서 92억명의 사람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용화삼회(龍華三會)’혹은 ‘미륵삼회(彌勒三會)’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본문에 있어서 ‘법상(法像)’을 불상과 관련된 뜻으로 애매하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곧 사찰의 구조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으로 한 자 한 자 명료하게 해석해야 한다.
여기 ‘상(像)’은 불상의 뜻이 아니라, ‘본뜬다’(to model after)의 뜻이며, ‘법(法)’은 내면적으로는 사찰을 지은 법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보통의 용례로서는 상(像)과 함께 ‘본뜬다’는 동사로 해석되는 것이다.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그 절은 지은 법도는 미륵이 하생하여 베푸는 용화삼회를 본떠서 금당과 탑과 회랑을 각기 셋으로 하여 창건한 것이다. 그 편액은 미륵사라 하였다.’ 여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삼회(三會)와 삼소(三所)다. 즉 세 번 집회를 갖는 세 개의 다른 장소를 용화수 밑에 확보하기 위하여 삼원(三院)의 구조를 가진 미륵사를 용화산 밑에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부록 8.2. 미륵하생의 신앙이 박힌 익산 미륵사지
이러한 종교적 사상의 근원을 떠나 순수하게 건축학적으로 미륵사를 고찰하면, 황룡사의 일목탑삼금당(一木塔三金堂)의 체계를 일목탑이석탑삼금당(一木塔二石塔三金堂)의 체계로 변조시키면서 생기는 파격성을 회랑을 둘러침으로써 완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원(一院)의 구조는 탑일금당(塔一金堂)의 가장 보편적인 백제가람전통을 계승한 것이 된다(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정림사지가 모두 일탑일금당의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일목탑이석탑(一木塔二石塔)의 삼탑(三塔)체제는 매우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목탑이 석탑화되는 최초의 계기를 형성함으로써 향후의 탑의 새로운 운명을 결정지었다. 목탑의 의제(擬製)로서의 석탑의 출현은 곧 탑이 싯달타의 무덤이라는 오리지날한 의미에서 건축조형상의 한 디자인적 양식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이역에서 탑이 갖는 의미의 한계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즉 인도를 떠나게 되면 이미 탑의 가장 핵심부분인 석가모니의 뼉다귀 원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래적 의미는 점차 소실되어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중심자리를 불상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륵하생의 신앙은 삼시(三時)의 말법(末法)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무왕은 백제왕국의 말세적 상황을 미륵하생의 구원, 즉 종교적 메시아니즘을 통해 극복하여 보려고 발버둥쳤던 것이다. 고려말기에 몽골의 침입을 팔만대장경의 조판으로 물리치려고 한 것이나 백제말기에 미륵하생의 삼회삼소(三會三所)의 거대한 사찰을 창건한 것이나 모두 우리에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을지는 모르나 보다 근원적인 정치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을 도외시함으로써 패망의 골을 더욱 깊게 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동요의 주인공 맛똥 무왕과 선화공주는 민중의 사랑을 받은 로맨스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미륵사 근처 고도리(古都里)에 남아있는, 논이랑 한가운데 정겨웁게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민불(民佛) 석상의 모습이나, 소조한 송림사이로 말없이 잠들고 있는 쌍릉의 고적감은 무엇인가 그러한 흥망의 비애로움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라북도 익산지구 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학술총서 제1책, 『미륵사지석탑』(2001)을 참고하였다.
탑중심의 가람배치
속리산 법주사에 가서 팔상전 5층목탑을 보면서 누가 산치대탑 스투파를 연상할 것인가? 팔상전 5층누각 꼭대기를 잘 살펴보면 그 정수리에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복발(覆鉢)이 있으며 그 위에 보륜(寶輪)의 장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꼭대기의 눈꼽만한 장식품들이 산치대탑같은 스투파가 퇴화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 왼쪽 사진이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인데 이것이 곧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이다. 이 팔상전을 미루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알 수 있고, 황룡사 9층탑을 미루어 백제 미륵사지의 석탑의 원형인 9층 목탑의 구조를 알 수 있다.
황룡사(皇龍寺)의 가람배치를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9층목탑이 중심이고 그 위로 동(東)ㆍ서(西)ㆍ중(中)의 세 금당(金堂)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인들이 가서 지었다는 일본 최고(最古)의 절인 아스카데라(飛鳥寺)【아스카데라의 현재의 절 이름은 호오코오지(法興寺)이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588년부터 609년에 걸쳐, 백제인들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고 전하여지는 일본 최고(最古)의 절이다. 1956~57년의 조직적인 발굴에 의하여 가람배치가 명료하게 드러났는데 탑(塔)을 중심으로 동(東)ㆍ서(西)ㆍ북(北)의 삼방(三方)에 금당(金堂)이 자리잡고 있다. 중금당(中金堂)과 탑(塔)의 배치가 종적인 동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황룡사(皇龍寺)의 배치와 일치된다. 그러나 아스카데라의 배치는 황룡사에 최소한 1세기 이상을 앞서는 고구려 청암리(淸巖里)사지의 배치와 일치하므로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태어난 사찰로 간주되지만, 백제공인들의 참여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시되는 것이다. 기본설계는 고구려설계이며 와당 등 실제건축내용물은 백제의 영향이 뚜렷하다. 일본이라는 신세계에 있어서는 백제인과 고구려인의 협업체계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청암리사지의 절은 문자왕(文咨王) 때(497) 창건된 금강사(金剛寺)로 추정되고 있다. 윤장섭(尹張燮), 『한국건축사(韓國建築史)』(서울 : 東明社, 1994), p.58.】의 1탑3금당배치의 발전적 형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아스카데라의 1탑3금당 배치는 그보다 약 1세기 먼저 조성된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 사지인 청암리(淸岩里) 사지(평양 동북방 3Km, 대동강 북안)의 배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아스카데라의 규모에 비하면 청암리 사지의 규모가 더 크다. 그리고 청암리 사지의 목탑은 8각형인데 반하여 아스카데라의 목탑은 4각형으로 그 규모도 축소된 것이다. 청암리사지의 탑과 3금당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고구려 청암리사지(금강사), 일본 아스카데라, 신라 황룡사(皇龍寺)는, 모두 1목탑3금당 배치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탑중심의 가람배치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금당 | |||||
금당 | 목탑 | 금당 | |||
<고구려 청암리사지>
↓
금당 | ||||
금당 | 목탑 | 금당 |
<일본 아스카데라>
↓
금당 | 금당 | 금당 | ||
목탑 |
<황룡사>
▲ 황룡사 복원 모형. 1탑 3금당 배치 구조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탑중심 구도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목탑을 본뜬 석탑의 출현이 만든 변화
미륵사지, 뒤의 삼각산이 곧 미륵하강의 용화산 금당이란 후대의 권위주의적인 대웅전과는 대비되는 소박한 불당의 개념인데, 당시에는 금동부처를 금인(金人)이라 불렀고, 그 금인이 앉아있는 집이라 해서 금당(金堂)이라 이름한 것이다. 금당의 존재는 이미 불상중심의 대승불교 건축개념이 도입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가람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탑이며,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금당은 탑의 부속건물적 성격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원시불교의 탑중심의 체제가 아직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멸망해가는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지었다 하는 미륵사는,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목탑중심체제에다가 양옆에 목탑의 복제양식인 석탑을 세움으로써 스투파 개념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 3탑3원체제는 『삼국유사』의 기사가 말해주는 대로 용화3회(龍華三會)라는 미륵하생신앙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틀림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중앙 1목탑의 의제(擬製)로서의 쌍석탑의 출현은 이미 탑의 의미가 건축배치상의 조형적 요소로서 해석되는 소지를 갖게되어 순수 디자인 개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석탑의 장을 연 것이다. 석탑은 소실의 염려가 없으며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소재의 성격상 목탑보다는 소형화될 수 밖에 없다.
▲ 백제 미륵사의 복원모형, 전북 익산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제공, 박물관에 가면 이런 모형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세심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미륵사는 세계가람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유니크한 위치를 차지하는 위대한 조형물이다. 복합적인 요소와 창의적인 발상을 구현시킨 걸작이다. 이 미륵사의 프로토타입을 통해서 향후 모든 사찰의 발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3탑 3금당 3원의 구조를 잘 관찰해주기 바란다, 지금은 중앙의 목탑이 사라지고 양옆의 석탑만 남아 있다. 그리고 중문 앞에 있는 두개의 당간지주도 남아있어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있게 한다.
한국 탑문화의 발전과정
이러한 석탑의 성격과 의미의 변화는 가람배치 전체에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초기부터는 이미 쌍탑식 가람배치가 모든 사찰의 디프 스트럭쳐로 자리잡게 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망덕사(望德寺)의 쌍목탑체제를 거쳐 감은사(感恩寺)의 쌍석탑체제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쌍탑의 존재와 더불어 3금당체제 또한 1금당체제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1탑1금당의 구도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탑이 두개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 1탑의 구조에 비하여 그 탑중심 배치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금당이라는 사실은 곧 1탑의 중심구조자리에 금당이 환치되면서 쌍탑은 그 금당을 보좌하는 순수한 조형적 건조물로서 개념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륵사의 쌍석탑과 감은사의 쌍석탑(682년 신문왕 2년때 조성)은 약 반세기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멸망하고 통일신라는 전제왕권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람의 성격도 탑중심의 평등구조에서 불상중심의 권위구조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황룡사의 13금당체제와 감은사의 1금당2탑체제는 탑중심체제와 불상중심체제의 구조적 역전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금당 | 금당 | 금당 | ||
목탑 |
<황룡사 1탑3금당 탑중심 불교가람>
↓
금당 | ||||
석탑 | 석탑 |
<감은사 쌍탑1금당 불상중심 불교가람>
감은사의 심층구조를 우리가 육안으로 쉽게 확인해볼 수 있는 것이 약 70년후에 등장한 그 유명한 경주 불국사이다. 불국사의 가람배치는 기본적으로 감은사의 그것에서 변화가 없다. 그리고 불국사의 웅장한 대웅전(대웅전은 현재의 명칭일 뿐이다) 앞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화려한 다보탑(동탑)과 세련된 균형미를 자랑하는 단아한 석가탑(서탑)은 이미 탑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채, 이미 순수한 조형예술로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쌍탑의 대칭성을 무시해버린 것도 엄청난 파격이다. 미륵사지의 석탑과 감은사의 석탑을 비교해 보면, 미륵사지의 석탑은 목탑의 조형적 요소를 가급적이면 충실히 반영할려고 애쓴 반면, 감은사의 석탑은 신라고유의 전탑의 전통을 목탑의 조형성과 결합시켜 단순화시켰다. 그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함장한 채 한국의 탑문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보기힘든 독특한 조형미를 과시하면서 발전하여 나갔다.
▲ 위쪽의 사진은 감은사의 쌍탑과 1금당 배치이고 아래쪽 사진은 감은사의 탑에서 발전된 불국사의 구조로 쌍탑 대칭구조가 파괴된 배치이다.
탑중심구조와 불상중심구조
감은사지의 가람배치는 향후의 모든 가람의 심층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탑의 순수조형성으로서의 전환은 동아시아문명에 상륙한 스투파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우선 스투파를 스투파이게 하는 그 핵심적 의미체인 싯달타 육신의 뼉다귀 원품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과, 이미 대승불교 초기로부터 반야사상의 흥기는 스투파공양에만 집착하는 미신적 성향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켰다는 것, 그리고 중국인의 현실주의적 감각은 스투파라는 추상체보다는 인간중심적인 불상의 형상을 선호했다는 것,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권에 있어서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권과 결합이 불가피했다는 것, 등등의 이유로 스투파는 『대반열반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러한 원래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를 통해 쌍탑의 구도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잎으로 지속되었고, 쌍탑은 다이안지(大安寺)나 토오다이지(東大寺)의 경우처럼 회랑(the main enclosure)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다가, 고려조에 오면, 점차 쌍탑구도의 규정형식마저 상실되어 가게 되는 것이다. 경내에 아예 탑이 없기도 하고, 주동선에서 비켜 있기도 하고, 홀로 서 있기도 하고, 본당 뒤에 가 있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형태도 운주사에 남아 있는 것처럼 다양한 파격이 시도되기도 한다. 한편 1금당2탑의 구도에서 금당이 점점 높은 계단위에 올라 앉게되면서, 사찰양식이 탑중심의 평면적 승가 콤뮤니티의 성격에서 점점 사각에 둘러싸인 궁궐(宮闕)의 구조로 바뀌어져 간다. 본당은 대웅전(大雄殿)화 되어 가고 점점 권위주의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면서 관료주의적인 하이어라키를 반영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탑은 궁(宮)에 대한 궐(闕)적인 조형요소로 이해되어 가기도 하였던 것이다【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건축학계의 저술로서는 정인국(鄭寅國)의 『한국건축양식론(韓國建築樣式論)』, 서울 : 일지사(一志社), 1991, 장경호(張慶浩)의 『한국(韓國)의 전통건축(傳統建築)』, 서울 : 문예출판사(文藝出版社), 1994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김동욱(金東旭)의 『한국건축의 역사』, 서울 : 기문당(技文堂), 2002는 사찰건축의 사적 흐름을 비교적 평이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잘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적들이 모두 개괄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으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심층구조에 대한 이론적 틀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 패러다임적 변화의 정확한 의의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구조적 변천을 파헤치려고 노력한 보다 전문적인 논문으로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김성우(金聖雨)교수의 미시간대학 박사학위논문을 꼽을 수 있다. 가람의 배치를 5개의 패턴으로 분류하여 시대적 변천을 동아시아 전체 사찰의 비교론적 시각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Sung-woo Kim, History and Design of the Early Buddhist Architecture in Korea, Ph.D. dissertation, Architecture and History of Art in the University of Michigan, 1985.】.
아이콘과 비아이콘
2002년 1월 8일밤, 나는 마하보디사원의 스투파(stūpa)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기나긴 논의의 결론은 이러하다. 소승ㆍ대승을 막론하고 원시불교의 모든 종교운동은 스투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투파란 무엇인가? 스투파는 탑이다. 탑이란 무엇인가? 탑이란 부처님의 무덤이다. 부처님의 무덤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향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스투파는 원시불교에 있어서 비아이콘적인 형상(aniconic imagery)으로서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물론 스투파 외로도 부처님 발자국(footprint)이라든가, 보리수나무(the Bodhi Tree)라든가, 부처님이 앉아 계셨던 금강보좌(the Adamantine Seat, vajrāsana) 등등을 들 수 있지만 이것은 모두 법신(法身, dharma-kāya)사상에 의한 것으로, 인간 싯달타의 인간적인 형상 즉 등신불 (anthropomorphic image)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것이다. 스투파는 부처님의 법신의 현현이며, 마치 그가 그곳에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가 구현하려 했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곳의 상징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유골(사리)은 당시의 부처님과 관계 있었던 8종족에게 분배되었고, 그들에 의하여 부처님 생애 중에서 우리 후대의 사람들에게 기념이 될만한 인상깊은 곳에 스투파(stūpa)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부처님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곳에 끊이질 않았다. 이 발길들로 구성되는 모종의 유대감이 바로 최초의 승가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며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로써 입증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투파의 신앙(stūpa worship)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사람이 바로 전륜성왕 아쇼카였다. 아쇼카는 최초의 부처유골이 들어간 8개의 스투파를 다시 개봉하여 그것을 모아 가루로 빻아서 다시 분배하여 8만 4천개의 스투파를 건립하였다【이 기록은 『阿育王傳」(Aśokarājāvadāna, 『大正』 50-102)과 『阿育王經』(Aśokarāja Sūtra?, 『大正』50-135)에 나오고 있다. 아쇼카왕(阿育王)의 팔만사천탑(八萬四千塔)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삼(卷第三) 탑상제사(塔像第四) 요동성육왕탑조(遼東城育王塔條)에도 매우 명료하게 기술되어 있다.】. 8만 4천개라는 숫자가 정확한 숫자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엄청난 숫자의 스투파가 아쇼카시대에 인도전역에 건립된 것은 고고학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이 아쇼카의 8만 4천탑 조립의 설화는, 중국ㆍ한국ㆍ일본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모두가 8만 4천탑 중의 하나가 자기네 땅 어느 곳에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진신사리’의 설화의 배경인 것이다. 『유사』에 나오는 자장법사의 사리설화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태어난 것이다(『삼국유사』 卷第三, 塔像第四, 前後所將舍利). 그러나 이 ‘사리’라는 것은 실제로 지극히 극소량의 ‘뼈가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광물결정체였다면 8만 4천의 배분은 꿈도 못 꿀 일인 것이다. 부처님과 관련된 뼈ㆍ항아리ㆍ재, 이렇게 직ㆍ간접으로 관련된 모든 물증을 그 상징으로 담아 스투파(stūpa)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쇼카시대에 스투파신앙이 성행하게 되면서 이 스투파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모이는 일반신도들(lay believers) 중심으로 대승불교의 보살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이 문제는 대승불교운동의 기원에 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방대한 주제이다. 나는 이 주제를 매우 요약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선생의 논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석학의 통찰이다. Hirakawa Akira, ‘Stupa Worship,’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ed. by Mircea Eliade (New York : Macmillan, 1987), vol.14, pp.92~5.】.
▲ 보드가야에 있는 부처님 발자국
스투파와 차이띠야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33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다.
부처님 뼈가 들어있으면 그것을 스투파라 부르고, 부처님 뼈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차이띠야라고 부른다.
有舍利者名塔, 無舍利者名枝提. 『大正』22-498.
이러한 『마하상기카 비나야』(Mahāsāṃghika Vinaya, 摩訶僧祗律)의 언급이 정확한 구분기준으로 지켜졌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부처님의 뼉다귀를 얻지 못한 많은 탑들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방증해 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탑의 성격이 부처님의 무덤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의미로부터 점점 추상화되고 형식화되고 상징화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시 스투파(stūpa)는 승가와 특별한 관련이 없이,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독자적으로 유지된 오픈 스페이스였다. 그런데 이 스투파신앙이 보편화되고 성행하게 되자 스투파를 승가(출가자집단 생활공간)내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차이띠야(caitya, 法堂)다【차이띠야(caitya, 法堂)는 중국문헌에서 支提, 枝提, 制多, 制底, 脂帝 등으로 음역된다.】.
차이띠야는 우리 감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상 대신 부처님의 부도(浮屠)【부도(浮屠)는 부도(浮圖), 부도(浮都)라고도 음사된다. 부도(浮屠)는 본시 ‘붓다’(Buddha)에서 와전(訛轉)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승들의 사리탑을 특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부도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스투파(stūpa)를 이해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개념이다. 스투파는 곧 부처님의 부도인 것이다. 즉 탑을 부처님의 부도라고 생각하면 가장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를 모신 법당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영묘(靈廟), 사당(祠堂) 등으로 의역되는 것만 보아도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이 초기 차이띠야의 원형들은 아잔타의 석굴사원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차이띠야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비하라(vihāra, 僧坊. 僧房, 精舍, 寮舍)와의 접합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가람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인도의 석굴사원에는 한 공간 안에 차이띠야(caitya, 法堂)와 비하라가 융합되어 있는 형식도 발견되지만, 우리나라에도 법당과 요사채는 구분되듯이 차이띠야(법당)와 비하라(승방)는 공간적으로 분할되며, 양자는 다른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큰 토지를 기증받게 되면서 각기 분할되는 건물군을 형성하면서 가람(saṃghārāma)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람의 형성은 또 다시 승가의 역사에 있어서 비상주 걸식(遊行)과 상주(常住)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 아잔타의 차이띠야. 19번 석굴, 통돌을 파들어간 것이지만 그 구조는 목재 돔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말 초기 차이띠야는 목재의 공포형식으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홀의 끝에 스투파가 있다. 그리고 스투파(stūpa)에 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조각으로 미루어 이 차이띠야는 대승시대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다. 19번 석굴 차이띠야의 17개의 석주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부처의 화려한 생애와 득도의 고행(苦行)이 감실과 주변에 묘사되어 있다. AD 500~550년 경으로 추정.
아쇼카의 석주
인도는 역사를 쓰기가 매우 어렵다. 소위 연대, 크로놀로지(chronology)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가치관은 세속에 있질 않았다. 항상 이 세간을 벗어나는 해탈(解脫, mokṣa)에 있었으며 그것은 시간의 초월이었다. 따라서 세속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자기의 생애를 무한한 억겁년의 윤회의 한 고리로 파악하기 때문에 지금 현 생애의 정확한 시점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연대나 저자(author)의 개념이 박약했다. 진리는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특정적으로 독점하여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거지들이 계속 따라붙으면 “다음에 보자!” “다음에 주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이라니, 언제 또 다시?”하고 묻는 거지에겐 이와 같이 대답했다.
“기나긴 윤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데 뭘 다시 만날 것을 걱정하오?”
억겁년 안에 다시 만날 기회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뜻이다.
아쇼카대왕은 고맙게도 중요한 성지들에 모두 명문이 새겨진 석주를 세웠다. 아쇼카석주(Ashoka Pillar)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아쇼카석주는 반드시 불교의 성지와 관련있는 것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은 명문이 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아쇼카의 칙령(Edicts)의 상징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비문은 181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가에 세워졌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각 지방의 토속어로 쓰여졌다. 사실 토속어의 유실로 판독이 어려운 것도 많다. 현재 45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데칸고원, 간지스강 유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비문은 바위형태(the Rock Edicts)와 돌기둥형태(the Pillar Edicts)의 두 형태가 있는데, 현재 중요한 것은 바위 형태 14기와 석주형태 7기가 남아있다. 나머지는 사소하고 별 중요한 내용이 없는 것들이다. 석주형태는 주로 간지스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통돌을 동그랗고 밋밋하게 깎아 세운 것인데 어느 것은 20미터 높이나 된다. 참으로 늠름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꼭대기에는 보통 사자 등, 동물이 안치되어 있다. 사르나트에 있는 네 마리 사자석두의 석주는 1950년 마하트마 간디에 의하여 새로 탄생된 인도공화국의 상징(state emblem)으로 채택되었다.
▲ 바이샬리 아쇼카 석주가 있는 꼴후아 라뜨(Kolhua Lat) 전경, 이곳은 부처님이 오셨을 때 원숭이가 꿀을 봉양했다는 원후봉밀터이다. 부처님께서 걸식을 위하여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 것과 같이 섞어 늘어놓았는데 원숭이가 부처님 것만 골라내어 꿀을 가득채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천마리의 원숭이들이 흙을 파서 부처님께서 목욕하실 수 있는 연못을 만들었다. 이 연못을 람쿤드(Ram-Kund)라 부른다. 아쇼카왕은 이를 기념하여 스투파(stūpa)와 석주를 세웠다.
나는 사실 역사적 유적지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탐탁치않게 생각한다.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유적지라고 가보면 모든 것이 관광상품화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후대의 조작 때문에 본래의 모습이 완전히 상실되어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마하보디 사원 안에 있는 보리수를 보느니 차라리 어느 이름없는 인도 농촌의 어귀, 시원한 냇물이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공간에서 홀로 숨쉬고 있는 보리수를 보고, 그곳에 앉아 담배 한 대 말아 피우고 있는 농부의 모습에서 싯달타의 가부좌 튼 보좌를 연상하는 것이 훨씬 더 리얼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수나무는 인도사람의 ‘느티나무’일 뿐이다. 동네어귀에서 그늘을 제공하는, 긴 담뱃대를 툭툭치는 할아버지들이 바람 솔솔 부는 평상에 태평스럽게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 느티나무의 인도판에 불과한 것이다.
▲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 높은 석주위의 주두(柱頭)부분. 4마리의 사자 밑에 4개의 법륜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황소ㆍ말ㆍ사자ㆍ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사르나트 박물관 소장.
싯달타의 체취를 간직한 아쇼카
나를 감동시킨 것은 4대성지 그 자체가 아니라 우뚝 우뚝 서 있는 아쇼카석주였다. 그것은 너무도 리얼했다. 그것은 너무도 생동하는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런데 또 경악할 만한 사실은 이 생동하는 역사의 증인조차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우리가 붓다의 생애의 연대를 고증할 때 현재 쓰고 있는 자료가 모두 아쇼카를 기준으로 해서 역산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디파왕사』(Dīpavaṃsa)와 마하왕사』 (Mahāvaṃsa)에 의하면, 붓다는 아쇼카왕의 대관식해보다 298년 먼저 태어났고 218년 먼저 서거했다는 것이다. 아쇼카왕의 대관식해는 326 BC로 되어 있으므로 붓다의 생몰은 624~544 BC가 된다. 그런데 희랍측의 자료에 의하면 아쇼카왕의 대관식은 268이나 267 BC의 사건이 된다. 이 자료에 근거하여 역산하면 붓다의 생몰은 566~486 BC가 된다. 유럽의 학자들은 모두 이 연대를 신빙성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도자료와 그 번역서인 중국ㆍ티벹 자료에 의하면 붓다의 출생은 아쇼카 대관식보다 180년 빠르며, 죽음은 100년 빠르다고 한다. 희랍 측의 아쇼카대관식 연대를 전제로 하여 계산하게 되면 붓다의 생몰은 448~368 BC가 된다. 일본학자들과 독일학자 하인츠 베케르트(Heinz Bechert)는 이 설을 신봉한다. 그리고 혹설은 463~383 BC를 주장한다. 현재 고타마 싯달타의 생몰연대는 이렇게 다양하다.
남방전승 | 624 ~ 544 BC |
희랍전승 | 566 ~ 486 BC |
인도ㆍ중국ㆍ티벹ㆍ일본 | 463 ~ 383 BC |
448 ~ 368 BC |
한 인간의 생몰에 대한 추정이 아직도 200년 이상의 불확정성 영역을 헤매고 있다면 과연 그 역사성을 우리는 어디까지 신빙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도 유명한 왕, 너무도 고고학적으로 정확한 사실이 입증되는 그러한 인도 최고의 통치자의 연대도 아직까지 1세기의 불확정영역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이 사실이 역사의 기록을 생명같이 여겨온 황하문명권에서 본다면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도의 역사는 대충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싯달타는 나에게 예수보다는 더 리얼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나자렛에서 예수가 목수노릇했던 목공소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싯달타의 유적지에서는 그러한 냄새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주변의 산하의 모습이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아직도 그 당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도는 고조선의 푸른 이끼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문명이다. 그러한 인간 싯달타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바로 아쇼카인 것이다. 싯달타와 아쇼카의 생몰연대가 다 같이 유동적이든 말든지 간에 이 두 사람의 상대적 관계는 너무도 확실한 것이다. 아쇼카가 발견하려고 했던 역사적 붓다는 불과 그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200년이라는 시간 밖에는 떨어져 있질 않았다. 아쇼카는 분명 역사적 붓다의 체취를 몸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석주를 박아놓았던 것이다. 이 석주가 없으면 모든 것은 망각의 잿더미로 흘러가버렸을 것이다. 아쇼카 만세!
아쇼카와 마하보디 스투파
싯달타가 앉아 있었던 그 보리수나무가 지금도 있는가? 아쇼카왕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분명 그 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아쇼카는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자기 아들 마힌다(Mahinda 혹은 Mahendra)와 사랑하는 딸 상가밋타(Saṅghamitta)를 팔리어삼장을 외우는 법사들과 함께 보낸다. 아쇼카는 이 보리수나무가 박해받을 운명을 직감하고 그 사랑하는 딸 상가밋타의 손에 이 보리수나무 묘목을 하나 쥐어주었다. 보리수나무에 담긴 지혜도 함께 전파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이곳 보드가야 보리수가 이교도들의 박해로 잘려나가자, 상가밋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심은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또 다시 이 곳으로 옮겨다가 심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보리수는 붓다가 앉았던 보리수의 적계 손자인 셈이다. 지금도 마하보디 스투파(stūpa) 곁에서 그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는 정말일까? 그런데 정말이 아니라면 또 어쩔 것인가?
그 보리수나무 옆으로는 거대한 스투파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스투파가 아니다. 언뜻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결코 불교성지의 오리지날한 유물일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보드가야의 정각대탑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마하보디 스투파는 실제로 불교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보드가야대탑의 조성연대는 팔라왕조시대(Pala Dynasty)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현재의 사원은 12세기경에 건립된 것이며 그것도 힌두사원의 양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건물양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원시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AD 637년에 이곳을 방문했던 현장은 그 『대당서역기』에 보리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사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 정사의 모습과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대탑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기원전 250년경 아쇼카는 분명 이 지역에 스투파(stūpa)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스투파의 흔적은 지금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고 오늘의 이 사원 건물이 언제 어떻게 지어진 것인지는 아무도 그 정확한 유래를 알 길이 없다. 그리고 후대에는 힌두사원으로서 기능하여 왔다. 이곳이 원래 힌두사원의 자리가 아니고 부처님의 대각성지임을 알린 것은 1880년에 이곳을 발굴한 인도주재의 영국 군인이었으며 탁월한 고고학자였던 커닝햄(Sir Alexander Cunningham, 1814~1893)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곳은 이슬람의 침공이후 모래와 밀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미얀마의 왕이 이곳의 힌두왕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이 탑을 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나서 많은 사람을 보내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정부는 이곳 사원 및 주변유적지를 샤이비테 마한타(Shaivite Mahanta)라는 힌두교도 지방영주에게 넘겨줘 버리고 말았다. 그 후 60여년에 걸친 법적 소송 끝에 대보리사원(Mahabodhi Temple)이 불교도의 소유라는 것이 부분적으로 인정되었고, 1953년에는 보드가야 사원 경영위원회(Bodhgaya Temple Management Committee)가 발족되어 오늘까지 운영을 맡고 있다. 그러나 경영위원회는 힌두교 4명, 불교도 4명, 정부관리 1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부관리가 반드시 힌두교인이어야 한다니 아직도 힌두교의 입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드가야는 결코 매력있는 곳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붓다의 숨결의 순결성이 없다. 단지 옆에 우뚝 서있는 아쇼카석주만 대각지의 진실성을 웅변해주고 있을 뿐이다.
▲ 보리수 곁의 마하보디 스투파
혜초스님의 감회
탑 주변으로 높게 쌓아올린 탑돌이를 할 수 있는 4각형의 길이 있었다. 달라이라마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해서였는지 어느 린포체가 무제한 촛불공양을 했다고 했다. 밤에 오는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양초를 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초에 불을 붙여 사방에 켜놓는다. 영롱한 촛불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즉상입의 장엄한 인드라망의 화장세계(華藏世界)였다. 나는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을 방문했던 우리의 선조 혜초스님께서 남기신 5언 싯귀가 생각이 났다.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 마하보리사를 내 이역만리가 멀다하지 않고 왔노라! 이제 저 카시에 있는 녹야원을 어찌 멀다 하리오? |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 단지 걸린 길들이 험한 것이 근심일 뿐, 가고자 하는 내 뜻은 바람에 휘날린 적이 없노라. |
八塔難誠見 參差經劫燒 | 아~아~ 팔성지의 스투파(stūpa)는 정말 보기 어렵구나! 이미 겁탈 당하고 불타버려 온전한 모습이 없네! |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 어찌 계림에서 온 이 사람의 바램이 다 성취되기를 바랄 것이랴마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모습이 그대로 부처님 모습이 아니겠누! 慧超, 『往五天竺國傳』 |
저 금강보좌 옆에는 유럽ㆍ미국에서 모여든 서양인들이 수백명이 몰려 앉아 어느 티벹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티벹스님이 영어로 강의하면 또 한 서양인이 옆에서 불어로 통역했다. 어둠을 통해 퍼져나가는 불어의 액센트는 정말 상큼하고 경쾌했다. 그리고 서양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은 참 근엄하고 진지했다. 그들은 무얼 하나 믿으면 아주 진실하게 믿는다. 그만큼 마음이 순결한 것 같다. 그런데 그 금강보좌 옆의 설법은 매우 재미난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설교자가 한 2ㆍ3분 정도 설법하고 나면, 반드시 한 5분 정도 청중들이 다 함께 독경의 챈팅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설교와 주문이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매우 현명한 방식이라 생각했다.
우리나라 절간에서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님들의 설법이란 필연적으로 졸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앉아있는 보살님들은 귀로 듣는 것보다 입으로 독경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지적인 설법과 감성적인 주문을 섞는 방식의 티벹승의 설교는 매우 좋았다. 듣기 좋게 아름다운 불어의 내용은 주로 밀교수행법의 기초이론을 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울려 퍼지는 대중들의 챈팅소리는 장엄하기 그지 없었다. 수없는 순례객들이 쌓아올린 작은 부도탑들 사이로 높이 솟은 마하보디 스투파(stūpa)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티벹불교의 세계화의 현장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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