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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2부, 2장 폴리스의 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2부, 2장 폴리스의 시대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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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폴리스의 시대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이오니아는 오리엔트와 가까운 만큼 그리스 본토보다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데 유리했으나, 원래 그리스 땅이 아니라 이민족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개척이 쉽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이오니아에 온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딜까? 바로 해안이다. 그리스인은 원래부터 바다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무슨 사태라도 벌어지면 언제든지 배를 타고 도피해야 했으므로 해안에 근거지를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피난 살림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거지 주변에 튼튼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다. 밀레투스와 에페소스 같은 도시들이 이 무렵에 건설된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인데, 특히 밀레투스는 예전부터 있던 도시였으나 그리스인의 이주로 활발한 해상무역 기지가 되었다(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가 바로 밀레투스 사람이다).

 

한편 아티카로 모여든 그리스 본토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도리스인들은 펠로폰네소스에 안주했으니, 그리스인들로서는 비록 안방을 내준 격이기는 해도 일단 큰 충돌의 위험은 넘긴 셈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민족 간의 갈등은 나중에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해외로 떠난 사람들처럼 남아 있는 사람들도 역시 폴리스를 건설했다. 하지만 배경이 다른 만큼 이오니아식 요새형폴리스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본토의 폴리스에도 성벽이 있었으나 그것은 방어의 역할보다는 주로 경계선의 역할이었다. 폴리스의 한가운데에 있는 아크로폴리스(광장)와 아고라(시장)는 정치ㆍ행정ㆍ여론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 등이 그리스 본토의 대표적인 폴리스들이다(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는 200여 개였고, 이오니아를 포함해 지중해 전역의 폴리스들을 모두 합하면 1000개가 넘었다).

 

본토의 폴리스들은 미케네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케네의 고대적 봉건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귀족 세력이 토지 확장에 나선 탓에 이미 암흑시대 후반기쯤 되면 그리스에서는 토지의 사유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의 힘이 커질 것은 당연한데, 이들이 바로 폴리스를 이루는 주축이 되었다. 그러므로 폴리스의 시민이란 그냥 주민들이 아니라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예는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도 폴리스의 시민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폴리스는 처음부터 귀족정치 체제로 출범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 그리스는 동쪽에서 생겨난 문명의 씨앗을 받아 뿌리로 키우기에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지형적 중심지가 없었다. 이 두 가지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그리스에는 오리엔트 문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폴리스들이 탄생하게 된다.

 

 

폴리스에도 왕은 존재했지만 왕권은 보잘것없었다(아테네에도 왕은 있었으나 점차 권력이 약해져 나중에는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에 불과했다.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게 남아 있던 곳은 그리스적 전통에서 이탈한 스파르타뿐이었다)원래 왕권과 귀족 세력은 항상 대립하게 마련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취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귀족이 지배하는 과두정에 가까웠다. 국민주권의 관념이 없 는 고대 민주주의는 진보적인 체제이기는커녕 오히려 왕정보다 후진적인 체제다. 그리스 이후에 고대적 왕정인 로마 제국이 성립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후 서양의 역사는 중세의 분권 시대를 거쳐 근대의 절대왕정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가 근대 민주주의로 넘어간다. 인류 역사에서 왕정, 귀족정(과두정), 민주정 이외의 정치제도는 출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루소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정치사상가들은 모두 그 세 가지 정치제도를 원형으로 삼았다. 더구나 미케네 시대의 공동체적 성격마저 사라졌으므로 귀족들은 마음대로 토지를 겸병했으며,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정치적 발언권도 컸다. 귀족들은 전차와 말 등 무기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사병들을 거느려 자기 땅에서는 군주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묘한 일은 귀족들이 지배하는 폴리스들 간의 다툼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리스의 귀족들은 서로 뭉쳐 집단 방위 체제를 구성했다.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3세기)에 제후국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도 국경선의 개념보다는 도시와 성곽 중심의 국가였으니 체제상으로는 그리스의 폴리스나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립한 비슷한 상황이었는데도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이 차이를 보인 이유는 중심의 유무로 설명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미 천자 사상이 확립되었고 주나라의 왕실이라는 권위의 중심이 있었다주나라를 받드는 정치 이념은 유학으로 체계화되어 이후 20세기 초반에까지 이르는 오랜 제국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 특히 한족 왕조들은 저마다 주나라의 계승을 이데올로기로 내걸었으며, 서양의 세력이 밀려오는 근대까지도 존주양이(尊周洋夷: 주나라를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를 구호로 내걸었다. 따라서 중국의 분열 시대는 수백 년에 달했어도 결국은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반면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애초부터 중심이 없었기에 통일을 지향하지 않았던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지리적 중심의 유무도 관계가 있다). 서양에서 중앙집권 체제가 첫선을 보이는 것은 로마 제국이지만, 로마 역시 중국만큼 중심이 강력한 체제는 아니었다.

 

 

 폴리스의 형질 변경

 

 

그리스 폴리스들 간의 관계가 마냥 목가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투키디데스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와 케르키라,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간에 전쟁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폴리스와 달리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정치적인 문제보다 경제적인 문제로 다투었다. 폴리스에 중요한 것은 영토 확장보다 무역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경제생활의 변화는 곧장 폴리스 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장악한 초기의 폴리스 체제는 애초부터 그리스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리스는 농경에 의존하는 지역이 아니라 무역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에서는 농경과 목축이 어느 정도 발달했으나 이내 그리스 경제는 무역 지향적으로 궤도를 선회했다.

 

여기에 큰 자극을 준 것이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이었다. 처음부터 해상무역에만 집중한 이 식민시들은 지중해 동부의 무역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쪽으로 진출해 지중해 전역을 무대로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들은 지중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더 서쪽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에스파냐까지 진출했다지브롤터 해협에까지 이른 이들은 이 해협의 아프리카 쪽에 있는 바위산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다. 지금과 같은 지브롤터라는 이름은 8세기 초반 이슬람이 에스파냐를 정복했을 때 생겼다. 당시 이슬람군의 지휘관인 타리크가 교두보로 삼았던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조그만 산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자발 알 타리크(타리크의 언덕)라고 불렸는데, 이 말에서 지브롤터라는 지명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이오니아 식민시가 건설한 다른 식민시들이 생겨났는데, 현재 프랑스의 마르세유(마실리아), 이탈리아의 나폴리(네아폴리스), 터키의 이스탄불(비잔티움) 등이 바로 그 무렵에 식민시로 출발한 도시들이다. 1차 식민시(이오니아의 폴리스)2차 식민시(지중해 중서부의 폴리스) 들은 말이 식민시였을 뿐 실제로는 모시(母市)로부터 정치적·경제적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체였다식민이라는 말도 동서양의 역사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의 경우 식민이라고 하면 정치적 지배를 연상하지만,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일 뿐 원래 식민은 단순히 사람들의 이주를 뜻하는 개념이다. 한자어 식민(植民)도 그렇고 영어의 colony도 그렇다. 식민이 예속의 의미라면 지금 독일의 쾰른은 도시 명칭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고대에 로마의 식민시로 탄생한 쾰른은 식민지를 뜻하는 라틴어 콜로니아에서 나왔으니까.

 

 

그리스의 수출품 그리스 땅에 이 혹투성이의 못생긴 올리브 나무가 아니라 날씬하고 매끈한 밀이나 쌀이 자랐다면 그리스 문명은 없었을 것이다. 곡식을 재배할 만한 토지와 토질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탓에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포도와 올리브유를 가지고 지중해 무역에 나서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이 성장하지 못하고 그리스 민주정이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무렵에는 문자, 종교와 더불어 오리엔트가 유럽에 준 마지막 선물인 화폐가 그리스에 전해졌다. 오리엔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화폐를 사용해왔는데, 이것이 리디아를 통해 그리스에 전해진 것이다. 오리엔트에서는 일찍부터 세금과 공납을 화폐로 받는 제도가 있었으나 화폐가 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오리엔트보다 그리스에서였다. 넓은 지중해 세계에 걸친 무역 활동을 위해서는 화폐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제적 변화는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그리스 내의 산업 구조가 크게 변했다. 예전에는 주로 소비를 위한 것이었던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이 이제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바뀌었다. ‘수출 입국정책에 힘입어 그리스의 주요 농산물이었던 포도와 올리브도 수출용 생산 시스템으로 재편되었다. 대규모 과수 재배를 통해 포도와 올리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포도주와 올리브유로 가공해 해외로 수출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 특산품인 도자기와 무기도 수출을 겨냥해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의 어느 방패 제조업자는 수백 명의 일꾼과 노예를 투입해 전문적 생산을 했다고한다. 이렇듯 농업과 수공업을 비롯한 산업 생산 시스템이 재편됨에 따라 조선업과 직물업, 금속 세공업 등의 연관 산업들도 크게 발달했다.

 

만약 당시에 자본주의 정신이 존재했더라면 자본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폴리스는 예전과 같은 체제로는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떵떵거리던 시절은 지났다.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에는 2000년 뒤에나 봄직한 자본주의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자본주의는 중국, 인도, 바빌론, 그리고 (유럽의 경우에도) 고대와 중세에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에는 근대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독특한 에토스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의 에토스, 즉 자본주의적 합리성도 역시 역사의 산물이므로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곧 폴리스의 형질 변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바로 평민들이었다.

 

 

지중해 경제권 화폐는 문자, 종교와 더불어 문명의 씨앗(오리엔트)이 뿌리(그리스)에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사진은 지중해의 그리스 식민시들이 만들어 사용한 화폐들이다. 당시 화폐의 도안은 주로 앞면에는 지배자의 얼굴을 새겼고, 뒷면에는 화폐의 가치를 동물의 수로 나타냈다.

 

 

 실패한 개혁은 독재를 부른다

 

 

귀족의 전성시대는 끝났다. 아직도 그리스에서 가장 힘센 세력을 꼽으라면 단연 귀족이겠지만, 이제는 그들도 과거처럼 토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정치권력도 함께 보장받기는 어려워졌다. 구태의연한 귀족은 몰락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시대적 감각에 눈뜬 귀족만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럼 새 시대의 귀족은 어떻게 했을까?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 그 역사가 상세히 전해지는 아테네의 상황에서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를 엿볼 수 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우선 전통적인 정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수용하기로 했다. 전통적인 귀족정치는 과두정, 즉 집단 지배 체제였다. 의사 결정 기관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회의를 여기서 열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라는 귀족 회의체였으며, 행정의 총책임자는 귀족들이 돌아가며 맡는 집정관(archon)이었다. 집정관은 행정·군사·종교·재판 등의 분야별로 모두 아홉명이 선임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그때까지 귀족들은 이 전통적 정치제도를 이용해 모든 일을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했다. 그러나 이제 평민들의 새로운 요구가 등장한 만큼 더 이상은 그런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명문화된 법전이었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걸린 사안을 귀족들의 자의적인 결정에 맡겨두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 요구에 굴복해 귀족들은 법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드라콘의 법전이다. 이 법전은 기원전 621년 드라콘이라는 사람(그는 전설에 전하는 인물로, 집정관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귀족이었을 것이다)이 당시까지 전해오던 관습법을 집대성해 만들었다. 그러나 이 법전은 사태를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드라콘의 법전은 아고라에 공시되어 그전까지 이루어지던 귀족들의 주먹구구식 판결을 금지하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이 점이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독한 악법이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지나친 중벌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제때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된다는 조항은 고대 세계에 흔한 징벌이었지만, 남의 물건을 훔치면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은 너무 가혹했다. 심지어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도 사형에 처해졌다. 후대의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년경~120년 경)는 드라콘의 법전을 잉크가 아니라 피로 쓴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아크로폴리스 아고라가 사람들의 법이 공시된 곳이라면, 아크로폴리스는 신들의 법이 관철되는 곳이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인데, 주변 지대보다 100미터가량 높은 언덕에 있다. 오른편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아테나 여신을 모신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한 사람은 솔론Solon(기원전 640년경~기원전 560년경)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 오리엔트 세계를 두루 여행했고, 많은 사람의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기원전 594년에 집정관이 되어 개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노예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일이었다.

 

드라콘의 법전에서 보듯이, 그리스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는 게 관습이었다.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 몸을 담보로 빚을 얻어 썼다. 그런 혹독한 조건의 빚을 쓸 정도라면 사실상 그 빚을 갚을 능력이 거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농민들은 걸핏하면 지주의 노예가 되었고, 심지어 해외에 노예로 팔려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는 유일한 조치는 부채 탕감밖에 없었다. 솔론은 일단 공적 채무와 사적 채무를 모두 말소시켜 노예가 계속 늘어나는 현상을 막았다.

 

채무 노예의 증가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면, 평민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도 하나밖에 없었다. 평민들에게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아레오파고스나 집정관을 선출하는 일은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종전까지 그리스의 정치는 무엇보다 신분을 우선시했다. 여기에 평민을 참여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정이라는 중대사에 아무나 끼워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솔론이 찾아낸 기준은 바로 재산이었다. 그는 시민들을 재산 소유에 따라 지주(대귀족), 기사(중소 귀족), 농민, 노동자의 네 계층으로 나누고, 이 구분에 따라 정치 참여의 자격을 부여했다이렇게 재산을 참정권의 기준으로 삼는 방식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의 역사에서 답습되었다. 재산과 무관하게 보편적인 참정권이 주어지는 보통선거권은 19세기부터 일부 실시되었고, 20세기 중반에야 유럽 전체에서 시행된다.

 

귀족정치의 골간을 잃지 않으면서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솔론의 개혁 조치는 시의적절하고 절묘한 타협책이었다. 그래서 솔론은 조정자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조치들이 과연 제대로 기능할 것이냐에 있었다.

 

솔론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중도적인 성격이었다. 전통적인 귀족들을 어르면서 떠오르는 평민층을 달랜다. 잘되면 일석이조가 될 수 있지만 잘못되면 양쪽에서 뺨을 얻어맞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의 결과는 후자였다. 솔론의 개혁은 불과 한 세대를 가지 못하고 좌초했다. 귀족도, 평민도 그 개혁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막 생겨난 민주정치의 싹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 판이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예전과 같은 귀족정치가 불가능해졌다면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 일부 귀족들은 평민 세력과 손을 잡고 권력 구도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민들의 힘을 등에 업고 권력에 복귀한 귀족들은 공교롭게도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왕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동안 실권은 잃었어도 왕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지배자를 왕으로 칭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귀족들은 새로 권좌에 등장한 사실상의 왕을 참주(僭主, tyrannos)참주라는 말에서 tyranny(전제정치), tyrant(독재자)라는 말이 나왔지만,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참주란 주인, 주군을 뜻하는 리디아어에서 나온 말로서,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왕이 된 자를 가리킬 뿐 압제를 일삼는 독재자라는 의미가 없었다. 초기의 참주들은 오히려 종래의 세습 군주들보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폴리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공헌했다. 이 말이 부정적인 색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좀 더 후대인 기원전 5세기부터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리하여 아테네는 참주정치(tyranny)의 시대로 접어들었다(아테네의 참주정치는 불과 50년 만에 끝나지만 그리스 전체로 보면 기원 전 1세기 무렵까지 참주정치가 지속되었다).

 

기원전 565년 아테네는 이웃 폴리스인 메가라와 최초의 대외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전공을 세워 명성을 쌓은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기원전 600년경~기원전 527)4년 뒤 평민의 지지와 군대의 무력을 기반으로 참주에 올랐다. 그는 솔론의 친척이기도 했지만 갓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숙제로 남아 있던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토지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권력 강화와 빈농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했으니 꿩 먹고 알 먹기인 셈이다. 또한 그는 농민들에 대한 세금을 생산물의 10분의 1로 줄이고 평민들의 생활 기반인 상공업을 장려했다. 특히 그는 트라키아의 은광을 접수하고 흑해 방면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등 대외적인 면에서도 큰 업적을 쌓았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한 데는 그의 공로가 컸다.

 

사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노선이 일관되게 유지되었더라면 이후 아테네와 그리스는 당시 오리엔트나 중국의 역사처럼 평범한 군주국의 역사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귀족들의 집단 지배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아테네의 귀족과 시민 들은 단일 군주의 권력을 용인하려 들지 않았다사실 그리스가 오리엔트나 중국처럼 문명의 중심지였다면 귀족 연합 정권이 그토록 오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귀족정치보다는 왕정이 더 발달한 정치 체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그리스가 오히려 (오리엔트에 비해) 문명의 후진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마치 동 시대의 다른 세계에 비해 앞선 것처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도 당대의 영웅이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 때는 그런대로 참고 지냈으나 그의 아들인 히피아스(Hippias, 기원전 560년경~기원전 490)가 참주 자리를 세습하자 귀족들은 입이 잔뜩 부었다. 왕정도 불만인데 왕위 세습까지 이루어졌으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히피아스는 집권 초반에 아버지의 개혁을 계승하고 귀족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잘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514년 동생인 히파르코스가 귀족들의 손에 암살되는 것을 계기로 그는 폭군으로 돌변했다. 그의 탄압을 피해 달아난 귀족들이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Kleomenes, ?~기원전 490)를 끌어들여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히피아스는 실각했으나 이 사건은 나중에 그리스 세계 전체의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귀족들의 도장 아테네는 귀족의 전통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지만, 평민들이 성장하면서 귀족들은 평민을 등에 업지 않으면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사진은 그리스 귀족들이 사용한 도장들이다. 모두 동물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스파르타가 아테네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그리스 국제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스파르타가 다른 폴리스들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으로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은 이래 최초로 국제 무대에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그리스 전체로 볼 때 더 중요한 사실은 아카이아 전통의 그리스에 처음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섞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파르타는 어떤 점에서 이질적이었을까?

 

스파르타는 스파르타 교육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 공식 명칭은 라케다이몬(Lacedemon)이다. 라케다이몬이란 신화 속의 인물인데,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에우로타스의 딸 스파르테와 결혼해 그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스파르타라는 이름은 스파르테에서 나온 것이니, 결국 남편의 이름은 공식 국호가 되고 아내의 이름은 별칭이 된 셈이다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에서 스파르타라는 이름을 썼지만, 그다음 세대 인물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스파르타를 라케다이몬이라고 불렀다. 이는 역사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더 공식적인 역사서였음을 보여주는 한 예다(사실 투키디데스의 책도 원래 제목은 그냥 역사였으나 후대의 학자들이 두 책을 구분하기 위해 나중에 나온 투키디데스의 책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기행문이나 박물지 같은 책인 데 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훨씬 더 엄정한 역사 서술을 보여준다.

 

지금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다. 그렇듯이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면서 그리스의 역사를 이끌어간 양대 축이었다. 단적으로 비교해 아테네는 아티카의 중심으로서 민주정치를 꽃피웠던 반면,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맹주로서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발달한 나라였다. 스파르타에 군국주의 전통이 생겨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도리스인이 남하한 직후 그리스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 과잉이었다. 사실 인구 과잉은 이미 미케네 시대부터 문제가 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일찍부터 해상 진출과 해외 식민을 시도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 형편에 북쪽에서 도리스인들까지 왔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그리스 전체의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통적인 해결책은 해외 식민을 더욱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코린토스와 칼키스 같은 나라들이 그런 방책을 구사했다. 새로운 해결책은 아테네처럼 무역을 활성화시켜 수출을 늘리는 방법이다. 그 때문에 앞서 본 것처럼 아테네에서는 평민층이 성장하는 새로운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둘 다 부작용이 없는 말끔한 해법은 아니다.

 

 

그리스의 이질적 요소 스파르타는 처음부터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이루어진 군사 국가였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맹주로 군림하는 동안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면서 아테네에 도전장을 내밀 만큼 성장한다. 사진은 스파르타의 유적인데, 군사 국가이기 때문인지 아테네에 비해 훨씬 단조로움이 느껴진다.

 

 

이 인구 과잉 문제에 대해 스파르타는 제3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힘만 있다면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인데, 무력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이 방법으로 꽤 재미를 보았다.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에 스파르타는 두 차례의 메세니아 전쟁을 일으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스파르타는 반도 남동부인 라코니아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남서부인 메세니아를 정복함으로써 반도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리스의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고대에 도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연결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부에 먼저 정착했다.

 

하지만 이 방법에도 문제는 있었다. 원래 라코니아를 정복할 때부터 스파르타는 피정복민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비교적 저항이 심하지 않고 스파르타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인 사람들을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렀고, 끝까지 저항한 골수 반대파를 헤일로타이라고 불렀다. 페리오이코이에게는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불이익을 주지 않았지만, 헤일로타이에게는 그 정도에 그칠 수 없었다. 그들은 복종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카이아인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도리스인인 스파르타와 민족적으로도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를 철저히 억압하는 정책을 취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의 지주들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했으며, 주거지도 제한되어 마음대로 이주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를 엄중히 감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헤일로타이의 힘센 젊은이를 밤에 몰래 살해하는 관습을 제도화하기까지 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감시하려면 온 국민이 사방을 경계하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군국주의화는 필연적이었다.

 

아테네에 드라콘이 있었듯이, 스파르타에도 전설적인 입법자인 리쿠르고스(Lycurgos)가 있었다. 기원전 9세기에 그는 군국주의를 아예 전 국민의 생활로 만들었다. “허약한 어린이는 버린다. 모든 남자는 7~30세까지 집단생활을 한다.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런 스파르타 특유의 기풍은 리쿠르고스가 만들었다고 전한다(심지어 우수한 남성은 우수한 유부녀를 그녀의 남편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제도도 있었다). 아테네에서 실패한 왕정(참주정치)이 스파르타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전통에 있었다스파르타의 왕은 대개 두 명이었는데,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상당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원하기만 하면 어떠한 나라에 대해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스파르타 시민은 누구도 이것을 방해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을 어기면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국외로 추방된다.”.

 

메세니아 전쟁 이후 헤일로타이의 수가 급증해 스파르타 시민보다 훨씬 많아지자 군국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당연하지만 그 결과로 스파르타는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중장보병(hoplites)은 바로 스파르타를 대표하는 육군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밀집대형 전술은 그리스 군대의 대표적인 전술로 발달했다. 기원전 5세기에 이 밀집대형 전술은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그리스를 구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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