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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1부 씨앗 -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최초의 국제사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1부 씨앗 -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최초의 국제사회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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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국제사회

 

 

힉소스가 이집트를 공략하려고 준비하던 무렵, 그때까지 혼란과 분열을 겪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서서히 안정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수메르의 우르 왕조가 쇠퇴하자 서쪽의 아모리인들이 그들 세력을 대신했다. 아카드와 수메르의 중간 지점인 바빌론(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을 중심으로 흥기한 이들은 점차 세력을 키워 메소포타미아 고대사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나라로 기록되는 바빌로니아를 세웠다기원전 7세기에 등장하는 신바빌로니아와 구분해 이때의 바빌로니아를 고()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불과 수십 년밖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 고바빌로니아가 후대에까지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바빌론의 슈퍼스타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기원전 1750)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 그의 이름이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역사에는 법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 함무라비의 업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바빌론과 패권을 다투던 도시들인 이신과 라르사를 차례로 물리치고 사르곤 이래 600년 만에 다시금 시리아에서 엘람에 이르는 커다

란 통일 제국을 수립했다. 이때부터 바빌론은 오리엔트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아카드어는 오리엔트 세계의 국제 공용어가 되었다. 그 밖에 함무라비는 달력을 만들고 운하를 건설하고 관료제를 정비하는 등 내치에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당시 도시마다 받들던 여러 신을 정리하고 신흥 신이던 마르두크를 최고신으로 정함으로써 지상의 질서만이 아니라 천상의 질서마저도 안정시켰다.

 

그러나 사르곤이 그랬듯이, 걸출한 군주 개인에게 의존하는 고대적 전제 체제는 그 군주가 사라지면 체제도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다. 600년 전 사르곤이 죽자 일시에 메소포타미아의 통일이 무너졌던 것처럼, 함무라비가 죽자 바빌로니아는 급격히 쇠퇴했다. 물론 주변 상황은 600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비옥한 초승달은 크게 부풀어 보름달이 되었고, 이제는 서남아시아 전체가 문명의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로니아라는 강력한 힘의 중심이 무너진 것은 오히려 수많은 대권 후보가 약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오리엔트 국제 질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새겨진 조각이다.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에게서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를 받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조항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판결에 적용된 게 아니라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용된 법전이므로 오늘날의 법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우선 주목할 것은 이집트의 환골탈태다. 이집트인들은 약 100년간의 이민족 지배를 받으며 크게 각성했다. 힘이 있어야 평화와 안정을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힉소스의 군대에서 전차의 위력을 눈여겨본 이집트인들은 전차와 이중굴곡의 활을 비롯해 첨단의 신무기들을 적극 도입했다. 어차피 희소스는 군사력에서만 앞선 야만족일 뿐 국가의 운영이나 문화의 측면에서 찬란한 역사를 가진 이집트와는 도저히 견줄 수 없었다. 이렇게 단점을 보강하고 나니 두려울 게 없었다. 테베의 왕 아모세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기원전 1580년에 마침내 힉소스를 이집트 땅에서 쫓아내고 신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100년 동안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다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아모세는 힉소스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귀족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영토를 몰수해 중앙집권을 도모했다. 또한 지긋지긋한 식민지 경험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이집트를 군사 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집트답지 않게 역사상 처음으로 상비군이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으려고 군사력을 키웠어도 막상 군사 강국이 되고 나면 남는 힘을 놀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기원전 15세기 말에 아멘호테프 1세는 남쪽의 누비아와 서쪽의 리비아를 정복해 후방을 다진 다음 숙원인 북벌에 나섰다. 시나이 반도는 진작부터 이집트의 영향권이었으니 무사통과다. 계속해서 이집트군은 시리아를 거쳐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진출했다.

 

드디어 초승달 양편의 두 고대 문명은 처음으로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이미 바빌로니아가 무너진 이후부터 복잡한 국제 질서를 이루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무대에 이집트가 가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오리엔트 국제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환골탈태한 이집트 이집트의 공성을 방어하는 병사들, 리비아나 누비아의 성일 것이다. 힉소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선진 문명을 지키는 데도 물리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은 이집트는 이렇게 정복 국가로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신국의 역사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최초의 국제사회

아리아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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