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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2부, 4장 사상의 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2부, 4장 사상의 시대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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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사상의 시대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

 

 

서양의 역사가들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간주한다. 그 이전의 크레타와 더 이전의 오리엔트에서 발달한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선구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서양 문명의 골격이 갖추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스가 오늘날 유럽에 속하기 때문일까? 천박한 유럽 중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더 충실한 근거를 든다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의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그리스 고전 시대의 사상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로 부활했으며,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정치사상은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이전까지 세계의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민주주의 비슷한 게 발달한 경우는 없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발달시킬 만한 특별한 능력이라도 지녔다는 걸까?

 

물론 그것은 특별한 능력따위가 결코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폴리스 체제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중심지도 없고 지형상 항구 중심의 도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탓에 폴리스가 발달했다. 폴리스 체제는 제국체제처럼 중앙집권을 우선시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것을 지향하지도 않았다정치만이 아니라 그리스의 종교도 중앙 집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의 종교는 대표적인 다신교다. 하지만 같은 다신교라해도 이집트나 페르시아, 인도의 경우 최소한 신들의 서열은 정해져 있고, 최고신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를 본받아 그리스인들도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최고신으로 제우스를 설정했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보듯이 제우스는 엄숙한 최고신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신이다. 걸핏하면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 데다 신들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존재도 아니다(심지어 그는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형이 아니라 동생이다). 더욱이 그리스 종교에서는 신화만 있을 뿐 경전이 없고, 신탁을 주관하는 무녀 외에는 별다른 사제도 없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세상에 율법을 강요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스스럼없이 뒤섞여 살아가는 존재다. 이와 같은 느슨한종교 역시 그리스 민주주의의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리스 민주주의는 결코 시대를 앞서간 제도도 아니었고, 같은 시대의 다른 체제들에 비해 선진적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왕정이나 제정이 더 선진적인 정치제도였다(아테네가 제국으로 발돋움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인데, 결국 그리스를 뒤이은 로마시대에 제정이 성립한다). 문명이 어느 정도 발달하면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집중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테네를 제외한 다른 폴리스들에서는 특별히 민주주의라 할 만한 제도가 없었고 왕정이나 다름없었다.

 

민주주의의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물론 시민층을 기반으로 한 체제였으나 시민주권’(오늘날의 국민주권)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우선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의 비율이 너무 적었을 뿐만 아니라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에서 참정권을 가진 시민은 약 4만 명이었는데, 이는 3만 명의 외국인과 20만 명의 노예를 제외하더라도 시민 총수의 4분의 1을 밑도는 수치였다, 당시 아테네는 여전히 가문과 신분이 중시되는 사회였다. 다만 미케네 시대에 뿌리를 둔 전통적 지주 귀족 대신 해상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은 재력가의 발언권이 커졌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종래의 귀족정(과두정)이 변질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러 세력 가문이 돌아가며 정치를 담당하는 제도는 사실상 임기가 정해진 왕정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아테네의 민주정은 왕정과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제도의 면에서 본다면 그리스 민주주의는 후대의 서양 역사가들에 의해 다소 과대하게 평가된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 민주주의의 진보적인 성과는 제도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찾아야 할까? 바로 자유로운 개인주의다. 평민층이 성장하면서 아테네 사회는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는 기풍으로 흘렀다. 게다가 참정권이 폭넓게 인정되면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수사학이 발달했다. 그 소산물이 그리스 사상이다. 종교적 권위의 부재가 개인주의를 낳았고, 정치적 권위의 부재가 논리를 낳았으니, 그리스는 결국 있어야 할 게 없었던 덕분에서양 문명의 모태가 된 것이다.

 

 

민주 선거 아테네의 시민들이 조약돌로 투표를 하는 모습이다. 지금은 시민이라고 하면 일반 국민을 지칭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유권자는 일반 평민이 아니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 귀족과 재력가였다.

 

 

 이오니아에서 탄생한 철학

 

 

탈레스

 

다른 모든 것이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철학만큼은 순전히 그리스인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이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의 부재를 틈타 탄생한 것이라면 가장 권위가 약한 곳에서 가장 먼저 철학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리스 본토보다 앞서 이오니아에서 싹트게 된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밀레투스는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하는 국제 도시였다. 이 밀레투스에서 최초의 서양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Thales(기원전 625/624년경~기원전 547/546년경)가 처음으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진다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 고전 철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마침 중국에서도 제자백가의 시대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탈레스(기원전 6세기), 소크라테스(기원전 5세기),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 등의 활동 기간은 공자(기원전 6세기), 맹자(기원전 4세기), 장자(기원전 4세기) 등과 거의 일치한다. 향후 수천 년 동안 영향력을 미치게 될 동서양 사상의 기본 골격이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만물의 근본 요소를 물은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에서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리스 철학은 인간 외부의 자연에 대해 의문을 던진 반면, 중국 철학은 철학적 의문이 인간 자신을 향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서양철학은 주체가 대상을 탐구하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를 발달시킨 반면, 동양철학은 도덕이나 인생론, 국가 경영론과 밀접히 결부되었다.

 

최초의 철학자답게 탈레스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물었다. “세상 만물을 이루는 원질(arche)은 무엇인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주요 질문들은 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문제 제기로 이루어지는데, 그 시초는 탈레스였다. 물론 그는 그 물음에 대한 답도 마련했다. 그것은 바로 물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의 사물들은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 물로 되어 있다. 물은 특정한 형태가 없고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므로 가변성이 뛰어나다. 그래서 탈레스는 물이 원질의 좋은 후보라고 본 것이다.

 

지금이야 물은 수소와 산소로 되어 있다는 것을 다 아니까 탈레스의 대답이 옳을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답보다 물음 자체다. 그는 적어도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 만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탈레스도 해와 달, 책상 같은 것들을 그대로 물로 보았을 리는 없다. 그는 모든 사물의 근원에 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며, 이렇게 근원을 묻는 사고방식이 바로 철학임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가 제기한 물음에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기원전 546년경)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만물의 원질을 경험할 수 있는 것, 즉 현실에 존재하는 것에서 찾을 수는 없다. 만약 경험에서 찾는다면 그것이 반드시 물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불은 왜 안 되고 흙과 나무는 왜 안 되는가? 따라서 그는 원질이란 경험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보고 그것에 아페이론(apeiron, 무한한 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세상 만물의 다양한 형태가 아페이론의 네 가지 성질, 즉 뜨겁고 차고 마르고 젖은 성질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그의 철학 이론이 아니라 원질을 비경험적인 것에서 찾고자 한 그의 철학적 사고방식이다.

 

 

아낙시만드로스 그는 탈레스처럼 밀레투스 사람이었고, 탈레스의 제자이자 동료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이루는 원질을 추상적인 것에서 찾음으로써 탈레스보다 진일보한 철학을 전개했다. 지구를 평면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도 그가 경험의 한계에 갇혀 사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지구를 공처럼 둥근 것으로 여기지 않고 원통 모양으로 보았다.

 

 

아낙시메네스

 

두 사람보다 약간 후배인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기원전 585년경~기원전 528년경)에게서 원질은 다시 경험적인 것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것을 공기라고 주장했다. 세상 만물은 이제 공기의 농도에 따라 형태가 결정되는 것으로 바뀌었다(세상은 그대로인데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푸코는 이것을 사물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규정하는 말이 달라질 뿐이라고 표현했다. 지식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둘러싼 담론이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는 모두 밀레투스에서 활동했으므로 밀레투스학파라고 불리며, 자연에서 원질을 찾았기에 자연철학을 정립한 것으로 분류된다.

 

 

피타고라스

 

그들과 다른 이색적인 인물이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0년경~기원전 500년경). 그는 밀레투스의 바로 앞바다에 위치한 사모스 섬 출신이었지만 밀레투스학파와는 다른 독자적인 학파를 세웠다. 출발점부터 달라서 그는 종교적인 관심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그는 사모스의 참주인 폴리크라테스를 싫어한 탓에 멀리 이탈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오리페우스교에 빠지게 된다오르페우스교는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가장 특이한 존재인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에서는 바쿠스)를 숭배하는 신비 종교다. 원래 디오니소스 숭배는 종교적 광란의 제례로 유명하지만 트라키아의 시인 오르페우스가 이것을 순화시켜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현세에서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의 교리에는 반드시 영생과 초월의 관념이 있다. 피타고라스가 찾은 원질도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었는데, 바로 수(). 그는 만물의 근원에 수가 있고 우주는 수에 기초한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가 수학과 천문학의 연구에 몰두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무리수의 개념을 얻었고,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밖에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도 제각기 만물의 근원을 나름대로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오니아나 이탈리아, 트라키아 출신으로 그리스 본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발생한 최초의 철학자는 바로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리스로 옮겨온 철학

 

 

소피스트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정이 발달한 아테네에서는 토론과 설득의 기술이 중요했다.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물론 전통적인 신분이나 재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이제는 평민층의 발언권이 커졌으므로 누구든 논리와 수사에 능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회나 법정에서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공직자로 발탁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이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이 지혜(sophia)를 사랑한다(phailos)’는 뜻이듯이, 훗날 궤변가(詭辯家)’라는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소피스트도 원래는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었다. 지혜를 쌓으려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많이 해야 했다. 그래서 소피스트들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관습과 문화를 두루 익혔다. 민주정이 꽃을 피운 아테네야말로 그들의 장기를 써먹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도 사상가들이 자신의 이론을 써먹을 수 있는 제후국을 찾아다녔다. 공자도 자신의 정치사상을 받아줄 나라를 찾아 천하를 주유했는데, 그리스식으로 말하면 소피스트에 속한다고 하겠다. 프로타고라스, 고르디우스, 프로디코스 등 주요한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아테네인이 아니고 떠돌이 교사나 외교관으로 아테네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었다소피스트들은 이오니아 철학자들과 달리 ……란 무엇인가?”라는 방식의 질문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철학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목적을 지닌 탓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크게 격하되었고, 후대에도 중시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연에서 인간으로 철학적 대상을 바꾸어놓은 소피스트의 철학적 공헌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실용적인 기술을 주 무기로 한 만큼 소피스트들이 철학에 직접적으로 공헌한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오니아의 철학자들과 달리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로 요약되듯이, 소피스트들은 (자연) 세계를 분석하는 대신 (인간) 세계를 움직이는 기술을 철학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적 기준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모든 지식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오니아에서 발생한 철학의 품격을 크게 떨어뜨렸다.

 

 

소크라테스

 

더구나 소피스트의 활동이 광범위해지자 그렇잖아도 혼란스런 아테네의 지성계는 더욱 혼탁해졌다. 이때부터 소피스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궤변을 일삼는 자가 되었으며, 아테네 사회에 심각한 윤리적 타락마저 조장했다. 이런 소피스트들에 맞서 다시금 도덕을 강조하고 철학에 학문적 기초를 놓으려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아테네 출신이었고, 철학은 탄생한 뒤 내내 아테네 외곽을 돌다가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아테네에 입성한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폐해를 반대하는 데서 출발했으므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바로 지식 장사꾼인 소피스트를 겨냥한 것이다(원래 그 말은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문구지만 소크라테스가 애용해 후대에 유명해졌다). 소피스트들의 지식 상대론에 대항해 그는 절대적인 지식의 추구를 철학의 목표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애초부터 통일된 결론을 낳을 수 없었던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문제 제기와 달리,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지식이었다. 더구나 절대적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법은 다분히 상대적이었다. 독단적인 관념을 주입하거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산파술인데(그의 어머니는 실제로 산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대화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철학의 내용보다 철학의 방법으로 더 큰 철학적 업적을 남겼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최초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의 황금기에 산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만년은 불행했다. 늦은 나이에 후대에 악처로 유명해진 크산티페와 결혼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참전해 고초를 겪었다. 결국 그는 제자가 스파르타의 첩자였다는 모함을 받아 독약을 마시고 죽었으니, 아테네가 전쟁에 패배한 것은 엉뚱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그러나 앞서의 철학자들이 가죽을 남긴 데 그친 것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하나의 뛰어난 사상이 열 명의 제자를 당해내지 못하는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보다도 더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다(그가 제자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대화를 통한 토론 방식을 즐겨 사용한 덕분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사상을 계승한 것은 물론 직접 글을 쓴 일이 없는 스승을 대신해 많은 저술까지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내려진 독배를 받아 들고 있는 장면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뒤 불과 5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여기서도 아테네의 몰락은 뚜렷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인데,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던 화가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계몽주의의 죽음을 경고하고 있다.

 

 

 서양 사상의 골격이 생기다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명사였던 만큼 그를 계승한다고 자처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각기 소크라테스의 이론’(도덕)이나 방법’(산파술)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일면만을 부각시키거나 형식적 측면을 계승한 데 불과했다. 모든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제자는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기원전 348/347)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철학 방식을 계승해 대화체로 많은 책을 썼다. 그러므로 그의 책에는 당대의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죽은 소크라테스는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때까지의 모든 사상을 한 데 통합하려는 웅대한 뜻을 품었다. 이오니아 철학의 자연과 그 근원에 대한 관심,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합치면 무엇이 나올까? 이 내용이 그의 이데아론을 이룬다.

 

원질은 영원불변한 것이므로 수시로 변하는 세상 만물에서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세상 만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따로 있다. 그게 바로 이데아(idea).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모두 이데아를 복제한 사본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원본인 이데아를 직접 볼 수 없으므로 사물을 통해 이데아를 인식한다. 이데아는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실체이며, 사물은 이데아를 인식하게 해주는 창문과 같다. 이데아와 사물, 본질과 현상의 이 변증법적 관계는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 사상을 관류해온 이원론의 토대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전형답게 플라톤은 사상에서만이 아니라 제자 양성에서도 스승을 능가했다. 기원전 387년 그는 아테네에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해 제자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이 아카데미아 출신 가운데 소크라테스-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서양 사상의 초기 계보를 완성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

 

추상적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구체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형상(form)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 형상은 질료를 통해 나타난다. 플라톤이 이데아와 사물의 관계를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논한다. 하지만 형상은 이데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 개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도의 실체인 반면, 형상은 질료와 함께 사물 개체를 이룬다. 이를테면 아폴론이라는 형상과 대리석이라는 질료가 합쳐져 아폴론 석상을 이루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기보다 새롭게 구성한 별개의 체계에 가깝다. 플라톤의 이원론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과 개념을 이어받아 스승과 다른 일원론을 펼쳤다. 이렇게 대립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철학의 양대축을 이루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철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데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사회적인 이유도 있다. 개인적으로 그는 철학자에 그치지 않고 고대 그리스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같은 인물이었다. 철학과 정치학을 비롯해 논리학, 생물학, 천문, 심리학, 윤리, 기술과학 등등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학문들 가운데 그와 관계없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다. 이렇게 세상 만물을 직접 탐구한 그로서는 세상 만물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식 이데아의 개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사회적인 배경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아테네의 황금기는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스승들과 달리 정치적인 후원자가 있었다. 스승인 플라톤처럼 지중해 세계를 두루 여행하던 그는 기원전 343년부터 8년간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기원전 356~기원전 323)를 가르치게 되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에서 흥기한 신흥 강국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의 지원으로 리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성공에 반비례해 그의 조국 아테네, 나아가 그리스 전체는 점차 마케도니아의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가 바티칸 서명실에 그린 벽화 <아테네 학당>이다. 한가운데 걷고 있는 두 사람이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이 작품에는 그 밖에도 많은 그리스 철학자가 등장한다. 두 사람의 왼쪽에서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소크라테스, 계단 가운데 퍼질러 앉아 있는 사람은 디오게네스, 앞줄 왼쪽에서 판에 뭔가를 쓰고 있는 사람은 피타고라스, 오른쪽에서 천구를 들고 있는 사람은 프톨레마이오스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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