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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1부, 4장 통일, 그리고 중심이동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1부, 4장 통일, 그리고 중심이동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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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 그리고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오리엔트 세계를 다시금 여러 세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여전히 존재했으나 건재하지는 않았다.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오히려 기원전 10세기~기원전 7세기까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스라엘 왕국과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났고, 히타이트의 잔존 세력은 옛 고향 근처인 아나톨리아 동남부로 돌아가 카르케미시, 밀리드, 타발 등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이루고 근근이 살아갔다.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서쪽의 유럽에서 온 프리지아와 새로 통일을 이룬 우라르투가 터를 잡았다. 또한 요르단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한창 대립하던 시기에 이를 피해 이동해온 셈족의 아람인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 엘람 북부는 인도·유럽계의 신흥 세력인 메디아가 지배했다.

 

다시 분열기일까? 하지만 분열 상태이기는 해도 이 시기는 혼란기라기보다 전환기였다. 오리엔트는 바야흐로 통일을 눈앞에 둔 진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의 주체로 등장한 세력은 아시리아라는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

 

사실 아시리아는 신흥 국가가 아니었다. 아시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민족적 기원은 셈족이었으나 정치적 통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도·유럽계와 혼혈을 이루었다. 그래선지 아시리아인들은 기질이 사납고 체격도 건장했다. 그러나 그런 기질과 체격에 걸맞지 않게 아시리아는 기원전 12세기까지 오리엔트 역사 무대의 주역은커녕 조역으로도 등장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아시리아는 미탄니에 눌려 지내다가, 미탄니가 히타이트의 압력으로 쇠퇴한 틈을 타 슬슬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위축되어 힘의 공백이 성립한 덕분에 동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경제와 무역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군사적으로 가장 성장한 나라는 아시리아였다. 기원전 12세기 후반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는 재빨리 히타이트의 옛 영토를 손에 넣고 세력을 확장했다이집트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런대로 국가를 보존한 데 비해 히타이트가 그러지 못한 것은 이 지역에 아시리아가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리아의 강역은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 북쪽으로는 흑해, 동남쪽으로는 바빌론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그런데 왜 앞에서 살펴본 기원 전 10세기 무렵의 세력 판도에서는 아시리아가 서열에서 빠졌을까? 그것은 잦은 내란과 아람인의 견제 때문에 아시리아가 200년 가까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첨단 무기 고대의 군사 강국 아시리아는 최초로 기병을 전투에 활용했다. 게다가 병사들은 그림에서처럼 쇠미늘 갑옷까지 입었으니 당시로서는 최첨단 신무기를 지녔던 셈이다. 히타이트에서 전수받은 철기 문화를 오로지 무기 개발에 이용한 그들의 호전성은 오랜 세월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시리아가 다시 오리엔트의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 전 9세기 초반이다. 오랜 침묵의 기간 동안 아시리아는 히타이트로부터 전수받은 철기 문화를 주로 무기 제작에 이용하면서 힘을 키웠다. 9세기 초반부터 아시리아는 그 힘을 써먹기로 한다. 아시리아의 정복 활동은 오리엔트 세계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잔인하고 파괴적인 과정이었다.

 

아시리아는 정복지를 철저히 약탈하고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러고는 거의 잿더미가 된 폐허에 자국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피정복민의 저항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아슈르라는 전쟁의 신을 섬겼으므로 정복과 파괴는 그들의 종교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다. 이러한 파괴성은 어쩌면 티그리스 강 상류의 척박한 곳을 고향으로 하는 아시리아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정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그 지역에서 강대국들에 눌려 명맥을 존속하던 그들에게는 힘의 공백이 가져다준 기회를 이용해 지역의 패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호랑이들이 사라진 숲이라고 해도 힘깨나 쓰는 늑대들은 남아 있었으므로 통일은 말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영웅을 낳았다. 아시리아의 정복 영웅인 티글라트필레세르 3(재위 기원전 746~기원전 727)는 기병과 전차를 결합한 전술을 내세워 누구도 이루지 못한 오리엔트 전역의 정복에 나섰다. 먼저 북부의 우라르투를 제압해 후방을 다지고 나서 동쪽의 메디아를 정복하고, 교통상으로 오리엔트의 중심이자 최대의 쟁탈지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이로써 그는 일찍이 사르곤 1세와 함무라비가 누렸던 정복왕의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더욱이 두 정복 선배와 달리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위업은 당대로만 끝나지 않았기에 더 가치가 있었다. 그가 정복의 기반을 다져놓은 데 힘입어 사르곤 2세는 스키타이와 킴메르를 정복했고당시 스키타이인의 이동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스키타이는 지금의 아르메니아를 고향으로 하는 인도·유럽어족으로서 세계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으로 불린다. 아시리아의 압박을 받은 스키타이는 대규모 민족이동을 했는데, 그 범위가 무척 방대했다.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부를 거쳐 폴란드와 독일 동부에까지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중국 북방의 몽골 초원을 거쳐 동북아시아에까지 왔다.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크게 횡단한 셈이다. 심지어 스키타이는 한반도 남부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금관에 등장하는 사슴뿔 장식이나 토기에서 스키타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689년에는 센나케리브가 바빌론을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기원전 671년에는 에사르하돈이 이집트를 정복했고, 기원전 639년에는 아슈르바니팔이 엘람을 멸망시켰다. 이것으로 아시리아는 역사상 최초로 오리엔트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찬란한 고대 문명을 자랑하는 오리엔트 세계에서 아시리아는 별종에 가까운 군국주의 국가였다. 일찍부터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확립했을 뿐 아니라 국민 개병제를 실시했고, 전쟁의 신을 섬길 정도로 호전성을 과시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아시리아의 유물이나 기록을 보아도 군사적인 내용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심지어 왕궁의 그림이나 조각에도 전쟁을 묘사한 것 이외에 다른 주제가 없을 정도다.

 

이렇게 아시리아가 고대사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군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이유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까지 300년 가까이 아시리아의 군대는 전쟁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었다). 서구 역사가들은 강력한 군주권을 뜻하는 말로 흔히 동양적 전제군주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바로 아시리아의 정복 왕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아시리아의 노예 궁전을 짓기 위해 돌을 나르고 있는 아시리아의 노예들이다. 군사 정복으로 얻은 전쟁 포로들일 텐데, 이들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화려한 궁전들을 지었다. 아시리아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잔인함으로 널리 악명을 떨친 탓에 구약성서에서도 앗수르(아시리아)와 산헤립(센나케리브)은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열매를 주운 페르시아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파괴와 정복은 무력만으로 가능하지만 건설과 발전은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시리아는 진정한 통일 제국의 자격이 부족했다사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수천 년 간 문명의 중심은 이집트였다. 만약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의 충돌에서 이집트가 승리하고 그때 오리엔트의 통일을 이루었다면, 문명의 중심은 유럽으로 옮겨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기회가 사라지고 군국주의 아시리아가 통일을 이룩한 데서 이미 오리엔트 문명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오로지 정복만이 유일한 에너지원이었던 아시리아는 막상 정복이 끝나니 더 이상 제국을 굴려갈 동력이 없었다. 엘람을 정복한 최후의 정복 군주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면서 아시리아는 출발했을 때처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통일을 이룬 지 불과 30년이 채 안 된 기원전 612,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는 바빌론과 메디아의 연합 공격으로 불길에 휩싸였다. 공교롭게도 그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적군의 장수들은 바로 아시리아가 키우고 가르친 인물들이었다. 때 이른 군국주의의 한계였던 걸까?

 

이후 오리엔트 무대는 바빌론과 메디아, 그리고 부활한 이집트와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리디아의 네 나라가 병립하는 형세를 이룬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문명의 빛은 오리엔트만을 비추지 않는다. 오리엔트는 이제 문명의 중심지가 아니라 한 부분일 따름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전혀 몰랐겠지만, 오히려 문명의 중심은 오리엔트를 떠나 서쪽의 지중해 세계로 서서히 옮겨가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리엔트의 통일은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아니다. 게다가 아시리아가 했다면 다른 나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포스트 아시리아시대의 첫 주자는 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였다(칼데아 왕조가 지배했으므로 칼데아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2대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6세기 초반 이집트를 점령해 함무라비 시대 고바빌로니아의 명성을 되찾았다당시 신바빌로니아의 군주들은 수백 년 전 고바빌로니아의 후예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기원전 12세기 고바빌로니아의 유명한 군주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자신이 존경하는 영웅의 이름을 그대로 따 썼을 것이다. 나라와 시대가 다르고 이름만 같은 두 사람을 1세와 2세로 구분한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다. 아시리아에 나라를 빼앗긴 헤브라이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때문에 또 수난을 당한다. 기원전 597년 그들은 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수천 명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그래도 저항운동이 계속되자 이집트 원정에 차질을 빚을까 염려한 네부카드네자르는 11년 뒤 예루살렘을 공격해 도시를 불사르고 또다시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갔다. 이것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빌론의 유수(幽囚)’. 이를 계기로 민족적 자각심이 커진 헤브라이인들은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칭하며 유대교의 선민의식을 더욱 키워갔다.

 

 

고대의 메트로폴리탄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사진은 바빌론의 중앙 대로에 서 있던 이슈타르 문이다(이슈타르는 전쟁과 성애의 여신이었다). 문을 장식하고 있는 사자, , 황소 등 각종 동물의 은 놀랍게도 법랑으로 되어 있다. 문 전체가 하나의 도자기인 셈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성세는 아시리아보다도 더 짧았다. 바빌로니아만이 아니라 셈족 문명권 자체가 힘을 잃고 있었다. 그런 추세를 재촉하듯이, 과거에 오리엔트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히타이트에 이어 다시 한 번 인도 유럽계의 나라가 흥기했다. 바로 엘람이었다.

 

헤브라이 민족처럼 수천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강대국들에 눌려 지내던 엘람은 페르시아로 명패를 바꾸고 도약을 준비했다. 마침 페르시아에는 시대가 내린 영웅이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29)는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엘람을 지배하던 북부의 메디아 왕위를 빼앗아 민족 독립을 이루었다. 곧이어 그는 기원전 547년에 서쪽의 리디아를 정복하고, 8년 뒤에는 바빌로니아마저 정복해 대제국의 기틀을 확립했다.

 

키루스의 정복 사업을 완성한 이는 고대 오리엔트의 마지막 위대한 군주인 다리우스 1(재위 기원전 521~기원전 486)였다. 그는 무장 출신이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해 아버지의 위업을 잇는가 했으나 제왕의 풍모를 갖춘 아버지의 선정까지 계승하지는 못했다. 폭정으로 민심을 크게 잃은 그가 죽자 6개월 동안 제국은 반란과 음모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황제의 친위 대장이던 다리우스는 이때 쿠데타를 성공시켜 제위를 차지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된 다리우스에게 무엇보다 급선무는 신생권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원정해 에게 해 동부의 사모스 섬을 정복한 뒤 동쪽의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이제 페르시아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반석 위에 올랐다. 아시리아에 이어 다시 한 번, 그리고 아시리아보다 더욱 확고한 오리엔트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왜 단명한 통일 제국에 그치고 말았는지 잘 아는 다리우스는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정복이라면 그 방향은 어딜까? 새로운 문명의 빛이 보이는 서쪽이다. 서방 정복을 위해 그는 먼저 동쪽의 인더스 지역을 점령하고 북쪽의 스키타이를 멀리 내쫓아 후방을 다졌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서부 변방으로 가서 기원전 513년에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그리스 반도 북부)를 복속시켰다. 내친 김에 아프리카의 리비아마저 병합해 페르시아는 일찍이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세계 최대,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다당시 사람들은 세계가 유럽과 소아시아, 이집트, 리비아로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므로, 다리우스 시대의 페르시아는 사실상 전 세계를 통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다리우스는 예전의 정복 군주들과 달리 내치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전까지 페르시아는 정복지마다 별도의 왕을 둔 느슨한 연합체였으나, 다리우스는 천하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총독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화한 것에 발 맞추어 행정망과 통신망, 그리고 도로망도 건설했다. 또한 화폐제도와 세금제도를 새로 정비해 천하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여러모로 볼 때, 정복 제국으로서는 아시리아가 최초지만 제국이라는 명칭에 가장 어울리는 나라는 페르시아가 최초였으며, 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군주 역시 다리우스가 최초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혹은 예측했다 해도 과소평가했겠지만, 다리우스가 소아시아를 넘어 그리스까지 건드린 것은 실책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으나, 사실 그들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라고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리스는 문명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오리엔트에 못지않았다. 이때부터 오리엔트의 역사는 그리스의 역사와 맞물리게 된다.

 

 

긴 수염의 병사들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격상시킨 황제 다리우스 1세의 친위대 병사들의 모습이다.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인데, 황제가 제사장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같은 시대 그리스 병사들과는 달리 오리엔트 병사들은 하나같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로마인들은 빛은 동방에서 왔다.”라는 말로 고대 로마 문명이 오리엔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오리엔트라는 말 자체가 원래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말을 바꾸면 빛은 서방으로 갔다.”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빛이 서쪽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의 빛은 왜 처음 태어난 곳에서 계속 자라고 발전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까?

 

첫 번째 요인은 지리에 있다. 현대 구조주의 역사가인 브로델(Fernad Braudel)은 역사의 가장 깊은 심층에 지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역사, 이를테면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정복했다는 정치사, 어디와 어디가 교역을 했다는 경제사, 관료제와 토지제도가 어떠했다는 사회사 등은 모두 근원적으로는 지리적 요인의 제약을 받고 있다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의 역사가들이 발전시킨 식민지 역사관 가운데 이른바 반도사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대륙 국가도 아니오 일본처럼 해양 국가도 아닌 반도이므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대륙이나 해양의 어느 한쪽에 의해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이루어졌으나, 그 때문에 한동안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 지리적 요인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 자체를 무시하는 잘못된 풍조가 있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근저에는 도도히 흐르는 불변의 역사가 있다.

 

오리엔트의 지리적 특성은 바로 중심이 없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하구라는 두 지역은 문명이 태동하기에는 적합했으나 더 커다란 문명(오리엔트 문명)의 중심으로 역할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두 문명이 충돌을 빚을 즈음 쟁탈의 요처가 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교통상으로만 중심이었을 뿐 양대 문명을 끌어안을 만한 넓이(이를테면 넓은 평야 지역), 깊이(이를테면 양대 문명을 아우를 만한 토착 문명)도 없었다.

 

비옥한 초승달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길게 늘어진 지역에서는 통일이 이루어지더라도 오래가기가 어려웠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사르곤, 함무라비 등이 모두 지역의 패자에 그친 이유, 최초로 통일을 이룬 아시리아나 페르시아가 단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문명의 고향 흔히 말하는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세 곳이 이 지도에 있다. 그 가운데 인더스 문명은 실전되었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두 문명은 지도에서 보듯이 비옥한 초승달을 이루며 통합되어 서양 문명의 모태로 발달했다.

 

 

두 번째 요인은 오리엔트 문명 자체에 내재해 있다. 오리엔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문자를 가진 문명 단계로 접어들었고, 이미 기원전 3000년경에 다른 지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고도로 발달한 정치와 행정 제도를 갖추었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유적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모순이 없으면 발전이 없는 법이다. 오리엔트를 주름잡은 역대 민족과 국가 들은 예외 없이 강력한 전제 체제를 확립하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비집고 나오는 다양한 모순을 억압하기만 했을 뿐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삼지 못했다. 전제와 독재가 사회적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 한 예가 국가 종교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이 수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했으며, 바빌로니아는 마르두크, 아시리아는 아슈르, 페르시아는 아후라마즈다를 모두가 섬겨야 하는 신으로 강요했다. 심지어 약소민족인 헤브라이인도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섬기면서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다. 종교와 정치는 원래 쌍둥이처럼 닮게 마련이다. 국가종교는 오리엔트 특유의 전제 체제와 어울려 진보를 가로막는 질곡으로 작용했다(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유로운 다신교를 수용하면서 지적 발전을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이 가능하다면 오리엔트 세계가 이런 한계를 극복할 만한 장면을 가정해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충돌이다. 각자 2000년의 문명사적 배경을 등에 지고 초승달의 양 끝을 이루는 대표 주자였던 두 나라는 당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냈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오리엔트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힘의 중심이 생겨났을 것이며, 이것을 배경으로 오리엔트는 자체적으로 서쪽 유럽 세계를 향해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오리엔트는 서구 문명의 씨앗이 아니라 뿌리와 줄기, 열매마저도 자체적으로 생성시켰을지도 모른다. 이 기회가 무산된 이후 오리엔트는 아시리아라는 군사 국가에 의해 통일되는 역사적 비운을 맞았고, 나중에 보겠지만 힘을 키운 그리스 문명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이후 이 지역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두 번 다시 인류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이제 문명의 씨앗은 서쪽의 유럽으로 옮겨갔고 뿌리를 내리는 일만 남았다.

 

 

황금의 유목민 스키타이의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 빗이다. 대표적인 고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는 떠돌이 생활을 한 만큼 별다른 유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유물은 많이 남겼다. 표정까지 뚜렷한 뛰어난 조각 솜씨는 유목 문명이 과연 이 정도로 발달했는지를 의심하게 할 정도다. 세 병사들 모두 바지를 입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원래 바지는 유목민족이 말을 타기 위해 고안한 옷이었다. 서양에 바지를 전한 것도 로마 북부의 유목민족인 게르만인이다. 하지만 바지가 익숙하지 않은 로마의 남자들은 여전히 킬트(kilt)라는 짧은 가죽 치마를 입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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