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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2부, 3장 전란의 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2부, 3장 전란의 시대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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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전란의 시대

 

 

최초로 맞붙은 동양과 서양

 

 

페르시아가 안정을 찾고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을 이루자 다리우스의 마음은 다시 서방으로 향했다. 동쪽으로 인도, 남쪽으로 이집트와 리비아를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서쪽뿐이다. 인도 내륙은 오지여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한편, 다리우스는 북방의 스키타이와 싸워 곤욕을 치른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을 북쪽으로 몰아내 이후 침략을 줄이는 데는 일조했다). 물론 다리우스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더 멀리 가면 동북아시아 지역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문명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서방의 지중해 세계만 정복하면 다리우스는 천하 통일을 이루는 셈이었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까지 정복할 마음은 별로 없었고 이오니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페르시아는 일찍이 키루스 시대에 리디아와 이오니아를 정복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하나둘씩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이탈했고, 이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일 뿐 지배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페니키아는 페르시아의 세력권 안에 들었으므로(페니키아는 해군이 약한 페르시아의 해군 노릇을 자임하고 있었다) 이오니아만 정복하면 지중해 세계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지중해 무역의 독점은 저절로 얻어지는 부수입이 될 터였다.

 

때마침 이오니아는 폴리스들끼리 반목하고 있었으므로 정복하기에 어려움도 없었다.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데 반해 이오니아에서는 폴리스들 간의 다툼이 경쟁을 넘어 극한적인 대립까지 빚어내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오니아의 폴리스는 성곽도시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본토의 폴리스와 달리 한 번 들어선 참주정치가 근절되지 않고 지속되었던 탓이기도 하다(이오니아의 폴리스는 섬이나 해안에 위치해 지역적으로 고립되었으므로 아무래도 민주정보다는 왕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모스나 밀레투스가 그런 예다).

 

분열된 이오니아를 노려보면서 다리우스는 새 수도인 파르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엘람의 전통적 수도였던 수사는 세계 제국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으니, 새 수도 건설은 명백히 정복 사업의 일환이다. 파르사가 완공된 것은 다음 황제인 크세르크세스(Xerxes, 재위 기원전 486~기원전 465) 때지만 다리우스는 이미 서방 정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파르사는 나중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페르세폴리스라고 불리면서 페르시아의 공식 수도가 된다(하지만 행정의 중심지는 예전처럼 수사였다).

 

 

천하 통일을 위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측근 참모들과 그리스 정벌을 위한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당시 다리우스는 인도에서 그리스까지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천하 통일을 위한 회의인 셈이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끝내 천하 통일을 보지 못했고, 서쪽으로 옮겨가는 문명을 붙잡지도 못했다.

 

 

물론 다리우스는 이오니아를 무력으로 정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병법의 최고로 치는 것은 중국의 동시대인인 손자(孫子)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참주의 지배를 받는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정정이 매우 불안했다. 참주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 나아가 페르시아와도 서슴없이 결탁했다. 당시 이오니아인들은 그리스인을 동족으로 여기고 페르시아인을 이민족으로 여길 만큼 어느 정도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전의 이익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외 정복과 대내 치적에서 뛰어난 업적을 선보인 다리우스는 책략에도 매우 능했다. 그는 이오니아 폴리스들의 국내 정치 관계를 교묘히 이용해 그들을 하나씩 페르시아 편으로 끌어들였다.

 

페르시아의 은근한 침략에 견디다 못한 이오니아인들은 이윽고 기원전 499년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리우스가 바라던 바였다. 게다가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다리우스의 침략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자의 이해관계에 묶여 한 몸처럼 대응하지 못했다. 다리우스는 반란의 핵심이 밀레투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원전 494년 그는 출동 명령을 내렸다. 머리를 제거하면 아무리 기다란 뱀도 죽는다. 동부 지중해 연안에 길게 뻗어 있는 이오니아 폴리스들의 머리는 바로 밀레투스였고, 페르시아의 목표도 바로 그곳이었다.

 

세계 제국답게 페르시아군의 구성은 말 그대로 다국적군이었다. 해군은 페니키아가 주력이었고, 육군은 페르시아 본대가 맡았다. 여기에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합세해 무려 600척의 함대가 밀레투스로 진격했다. 이오니아는 밀레투스를 주축으로 사모스, 키오스, 레스보스 등 수십 개의 폴리스들이 공동으로 353척의 함대를 구축해 맞섰다. 유사 이래 최초로 동양과 서양이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는 전력에서도 우위에 있었지만 사기에서는 훨씬 더 앞섰다. 이오니아 폴리스들은 대전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여전히 반목을 일삼았고, 심지어 대열에서 이탈하는 함선도 있었다. 예상한 대로 해전에서 페르시아는 압승을 거두었다. 페르시아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곧장 밀레투스를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포위했다. 성벽이 부서지면서 밀레투스는 함락되었다. 600여 년의 역사에다 흑해에서 지중해 중부까지 수많은 식민시를 거느렸고 철학사에 밀레투스학파라는 굵은 족적을 남긴 폴리스 밀레투스는 폐허로 변했고, 모든 시민은 페르시아의 노예가 되었다.

 

 

 최종 목표는 아테네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해안 지대와 섬의 폴리스들을 모조리 점령했다. 페르시아 측에 협력하는 폴리스에는 지배 관계를 확실히 다지고, 말을 듣지 않는 폴리스는 잔인하게 불태워 파괴하는 식이었다. 결국 이오니아는 뭐하러 반기를 들었나 싶을 만큼 아무런 성과도 없이 쓴맛만 보고 다시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페르시아는 점령한 폴리스의 참주를 내쫓고 민주정을 지원했는데, 이는 민주정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정복지에 왕정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조치였다.

 

그런데 반란을 너무도 손쉽게 제압하자 다리우스의 생각이 달라졌다. 마침 이오니아에 출병한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내친 김에 말썽 많은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까지 평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그리스에는 장차 페르시아의 새로운 적수가 될 만한(따라서 을 제거해버려야 할)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아테네였다. 이오니아의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그리스와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연합군을 편성해 페르시아 측에 붙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리디아의 수도)를 무참하게 파괴한 적이 있었다. 특히 그들이 사르디스의 키벨레 신전을 불태워 파괴한 일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키벨레는 당시 소아시아 전역에서 섬기던 대모신(大母神, 신들의 어머니)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주도한 것이 아테네였다.

 

최종 목표가 아테네로 바뀌면서 이오니아 진압군은 그리스 원정군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492년 헬레스폰토스에 집결한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은 이제 그리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대군이 지나치는 길목에 있는 폴리스들은 무자비하게 파괴되었다. 육군이 마케도니아를 유린하는 동안 해군은 타소스 섬을 정복했다. 이제 그리스의 북부 지역은 송두리째 페르시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대로 원정이 진행되었더라면 그리스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기원전 570년경~기원전 508년경)의 민주정치는 제대로 꽃을 피우기도 전에 동방의 전제정치에 짓밟혔을 테고,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참주정치 시대에 아테네에서 추방된 귀족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10년 참주정치가 무너지자 아테네로 돌아와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의 골자는 전통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아테네의 전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입법 겸 행정 기관으로 500인회를 구성하고, 사법기관으로 시민 법정을 설치하며, 시민권을 가진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들로 민회를 구성해 정책의 최종 결정과 심의를 맡기고, 영향력 있는 10개 가문 출신의 장군 10명이 교대로 군을 지휘하는 방식으로 군제를 개편했는데, 이로써 그리스 민주정은 처음으로 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는 참주정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ostrakismos: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을 도기 조각에 적게 해 그 수가 6000개 이상이면 그 인물을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을 도입했다.

 

풍전등화의 그리스를 구한 것은 하늘이었다. 타소스를 떠난 페르시아 해군이 그리스로 남하하려면 세 개의 갈퀴 같은 반도를 회항해야 했다. 그중 첫째 반도에 아토스 곳이 있었는데, 이 일대는 예로부터 풍랑이 심해 배가 난파하기 일쑤였다. 페르시아 해군이 이곳을 지날 즈음 때맞추어 맹렬한 북풍이 불어왔다. 이곳에서 페르시아는 함선 300척이 파괴되고 2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싸워보기도 전에 결정타를 입은 것이다. 더욱이 육로로 행군하던 육군마저 트라키아의 한 부족에게 한밤중에 기습을 당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하늘이 갓 태어난 그리스의 민주정을 보살핀 것일까? 어쨌든 잇단 악재에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발로 끝난 이 원정은 페르시아와 아테네 양측에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페르시아에는 아테네를 정벌하지 않으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을 주었고, 아테네에는 페르시아에 대한 공포감과 아울러 페르시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리스의 앞날은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 두 가지 확신이 머잖아 충돌할 것은 필연이었다.

 

 

대륙 간의 전쟁 기원건 5세기에도 아시아와 유럽은 다른 대륙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페르시아 전쟁은 말하가면 두 대륙 대표주자의 결전이었다. 1차건에서 쓴맛을 본 레르시아는 2. 3차전에서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연합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마라톤의 결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를수록 좋다. 다리우스는 아토스 곶에서 참사를 겪은 후 불과 2년 만에 다시 그리스 원정군을 발진시켰다. 이번에도 역시 휘하의 조공국들에 임무 분담을 하달한 다음, 다티스와 아르타페네스 두 명을 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의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했다. 하지만 2년 전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안겨주었던 아토스 곶은 피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안을 따라가는 항해 대신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로를 택했다. 사모스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거쳐 아테네로 직진하는 것이다.

 

기원전 490, 600척의 함선에 나누어 탄 페르시아의 대군은 먼저 몸풀이 삼아 낙소스 섬을 간단히 제압하고 곧바로 일차 목표인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했다. 페르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데다 국론도 분열되어 있던 에레트리아는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이제 아테네까지는 겨우 50여 킬로미터, 하루나 이틀이면 닿을 거리였다. , 어디서 아테네와 맞붙을까?

 

페르시아의 원정군에는 길잡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아테네인으로서 참주까지 지냈다가 쫓겨난 경력이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군지 분명해진다.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였다. 스파르타의 공격으로 아테네의 참주정치가 무너지면서 조국에서 쫓겨나자 그는 페르시아에 몸을 의탁해 조국 침략의 길을 인도하는 적의 앞잡이, 매국노가 되었다. 하지만 아테네가 정복되면 그는 다시 금의환향해 실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토스 곶에서 한 번 아테네를 보호한 하늘은 아테네가 매국노의 손에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히피아스가 제안한 결전장은 바로 아테네 동북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마라톤 평원이었다. 여기서 오늘날 올림픽경기의 한 종목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마라톤에서 다리우스의 야망과 히피아스의 염원을 꺾은 그리스의 영웅은 밀티아데스(Miltiades, 기원전 554년경~기원전 489년경)였다. 그의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의 군제 개혁으로 생긴 10가문 중 하나였으며, 밀티아데스는 고대 올림픽에서 주요 경기 종목이었던 전차 경주에서 우승해서 이름이 높았다. 무장으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다른 가문의 장군들은 자신들이 지휘권을 맡은 순번에도 그 권한을 밀티아데스에게 양도했을 정도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소식에 아테네의 지도자들은 주전론과 주화론의 두 패로 갈렸다. 밀티아데스는 결정권을 쥐고 있던 군사장관인 칼리마코스를 설득해 주전론으로 이끌었다. 그때 그의 설득 무기는 바로 히피아스가 권력을 장악하면 모두 혹독한 보복을 당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페르시아가 히피아스를 길잡이로 내세운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던 셈이다.

 

 

왕정의 반대자들 독재자의 최후는 고대에도 비참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두 아들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가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독재정치를 펼치자 아테네의 귀족들은 그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사진은 히파르코스를 살해한 하르모디오스(왼쪽)와 아리스토게이톤의 조각상이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아테네에는 참주정(왕정)이 정착했을 테고,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결집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테네와 불화를 빚던 폴리스들은 오히려 아테네의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게다가 이념과 체제는 달라도 그리스 전체가 위험해질 때는 협력하리라고 믿었던 스파르타마저도 제사가 열리는 기간이라는 핑계를 대며 원군을 보내오지 않았다. 아테네는 고립무원이었다. 유일한 지원군은 아테네의 보호국인 플라타이아였다.

 

마라톤 평원에 도착한 밀티아데스는 아테네의 주력군을 오른쪽에, 플라타이아군을 왼쪽에 포진시키고 중앙에는 약한 병력을 배치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군의 승착이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예상한 대로 중앙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이겼지만, 양 날개 쪽에서는 그리스군이 승리했다. 날개 쪽의 페르시아군은 도망쳤으나 그리스군은 도망치는 적을 내버려두고 중앙의 적을 공략해 섬멸해버렸다. 빛나는 전략의 승리였다.

 

여기서 전령이었던 병사 필리피데스(페이디피데스라는 설도 있다)는 약 36 킬로미터의 거리를 뛰어 아테네 사람들에게 승전보를 전하고는 그만 숨이 차서 죽었는데, 그것이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테네는 승리했는데도 왜 한 병사를 희생하면서까지 승전보를

빨리 전해야 했을까? 그것은 마라톤에서 패배한 페르시아군이 재빨리 함선으로 철수해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기로 작전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필리피데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도시에 남아 있던 아테네군은 방비 태세에 들어갔고 곧이어 마라톤의 주력군도 아테네로 돌아왔다. 페르시아 함대는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아테네의 외항인 팔레론에 며칠간 머무르다가 뱃머리를 돌려 철군했다. 또다시 원정에 실패한 것이다전술적인 면에서 그리스를 구한 것은 마라톤 전투에서 최초로 선보인 밀집대형 전술이다. 궁병과 기병으로 오리엔트를 정복한 페르시아군에 아테네의 밀집대형은 낯선 것이었다(그리스에는 말을 기르기에 적합한 목장이 거의 없었으므로 기병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기병이 있었더라면 필리피데스처럼 발로 달리는 전령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보병끼리의 싸움이라면 농노와 고원족 등 용병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 보병이 고도로 훈련된 중간층 출신의 그리스 보병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자 수는 페르시아 측이 6400명이었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었다.

 

 

그리스의 무기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를 구한 중장보병의 모습이다. 중장보병은 밀집대형 전술을 가능케 했고, 이 전술은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장보병은 기원전 8세기에 생겨났으나, 기원전 6세기부터는 무거운 청동제 흉갑 대신 질긴 베나 가죽으로 만든 간편한 갑옷과 모자처럼 작은 투구를 사용했으므로 보병치고는 기동성도 매우 뛰어났다. 그래서 달리는 중장보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후의 승부

 

 

마라톤에서의 허망한 패배에 다리우스는 격분했다. 세계의 어느 곳을 정복할 때보다 더 많고 더 강한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페르시아는 그리스 원정에서 두 차례나 보기 좋게 고배를 마셨다. 더구나 1차 파병 때는 주요 목표(이오니아 반란의 진압)를 달성한 다음에 내친 김에 실행한 원정이었고 폭풍을 만나 철군한 것이었으나, 2차 때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뒷받침된 원정인데도 패했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대군으로 실패했다면 더 큰 대군을 보내리라. 다리우스는 패전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곧바로 3차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의 원칙은 간단했다. 무엇이든 지난번보다 더 많이, 더 크게 준비하라. 조공국들이 할당받은 전쟁 준비물은 함선과 말, 식량, 수송선 등 모든 부분에서 이전의 규모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전쟁 준비 4년째인 기원전 486년에 이집트가 반란을 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이집트 지배를 확고히 다지고 새로 편성한 원정군을 시험 가동하기에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이집트 원정을 꾀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리우스의 제위를 승계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원래 그리스 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숙제로 남긴 이집트 원정은 성공했으나 전쟁을 재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바빌로니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간신히 진압한 터였다. 하지만 전부터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던 장군들과 아테네에서 추방된 그리스 귀족들은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마침내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그리스를 정복해 천하 통일을 이루기로 결심한다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스를 평정한다면 우리는 페르시아의 판도를 제우스신(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테고, 사실은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아후라마즈다라고 했을 것이다)께서 살고 계시는 하늘 끝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이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크세르크세스는 분명 문자 그대로 천하 통일을 꿈꾼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4년간 더 준비한 뒤 기원전 480년 봄에야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3차전은 2차전과 세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직접 총지휘를 맡았다(다리우스는 휘하 장군들을 파견했을 뿐 전쟁에 나서지는 않았다). 둘째, 선박으로 이동한 1차전, 2차전과 달리 이번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너비는 약 5킬로미터다)에 선박들로 다리를 놓고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어마어마한 계획

을 세웠다. 셋째는 더욱 엄청난 것으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 아시리아, 메디아, 박트리아, 파르티아 등 페르시아의 강역 내에 있는 민족들은 물론 아라비아, 인도, 리비아,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 민족들에서 70만 명의 보병 부대를 편성했다.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기병은 8만 명, 페니키아ㆍ이집트 키프로스를 주축으로 한 함선은 1207, 수송선은 무려 3000척에 달했으니, 당시 그리스와 중국을 제외한 문명 세계의 군대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동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더욱이 페르시아군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행군하면서 도중에 현지인들로 병력을 계속 충원해 그리스에 이를 무렵에는 더 큰 규모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최종 병력이 528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계산했는데, 이 수치는 믿기 어렵지만 엄청난 대군이었음은 분명하다).

 

 

바다의 육교 크세르크세스가 만들게 한 배다리의 상상도, 비록 바다 치고는 폭이 좁지만 헬레스폰토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인 데다 물살이 아주 거센 곳이므로 여기를 배다리로 건너려면 그림에서처럼 상당히 많은 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노들을 뱃전에 쌓아두고 뱃머리와 꼬리를 밧줄로 연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에 맞서는 그리스에서도 1, 2차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몇 년씩이나 전쟁 준비를 했다는 것은 그리스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페르시아가 다시 침범해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폴리스 특유의 분열은 극복하지 못했다. 이미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으므로 안심하는 폴리스도 있었고, 겁에 질려 애초에 항전을 포기하는 폴리스도 있었다.

 

게다가 마라톤의 영웅 밀티아데스는 금을 구하기 위해 파로스 섬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실패하고 병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리스는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3차전은 병력의 차이가 비교도 되지 않는 만큼 전술보다는 전략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밀티아데스가 탁월한 전술로 마라톤 전투에서 이겼다면, 이제 아테네에는 탁월한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기원전 528년경~기원전 462년경)가 있었다.

 

밀티아데스의 정적이었다가 그의 죽음으로 기원전 493년 집정관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가 생존하려면 해군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에게 해를 무사통과했으니 당연한 주장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리스의 분위기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는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을 중시하지 않았다. 선박은 어디까지나 무역용이었고 기껏해야 군대의 수송용이었다. 기원전 7세기에야 비로소 그리스 최초로 군함이 만들어졌으나 그것도 그다지 활성화되지는 못했다하지만 해상무역의 풍부한 경험 덕분에 그리스는 군함 건조에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삼단노선을 개발했다. 이 함선은 이후 200년 동안 지중해의 물살을 갈랐으며, 이것을 모델로 개발된 갤리선은 16세기까지 2000년 동안이나 유럽 세계의 주력 함선으로 활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지지를 얻을 리 없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끈질기게 고집했고, 집권하자마자 즉각 군함 건조에 나섰다(그는 이재 감각에도 뛰어나 국가재정을 크게 늘리는 데 기여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반대하기도 어려웠을 터이다).

 

2차전과 다른 점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아테네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폴리스들은 여전히 분열과 반목을 계속했지만, 페르시아의 진군이 시작되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병력을 지원했다. 특히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거느린 스파르타의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번 3차전은 아테네 대 페르시아를 넘어 그리스 대 오리엔트, 아니 유럽 대 아시아의 대결이었다(결과적으로 여기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은 곧 아시아 문명의 쇠퇴와 유럽 문명의 도약을 예고한 셈이다).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마라톤 전투에서 재미를 본 그리스 연합군은 이번에도 페르시아의 육군을 상대할 전략적 지점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병력 차이가 워낙 나는 만큼 10년 전처럼 평원에서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아티카의 관문인 테르모필레의 좁은 산길을 방어 장소로 정했다. 스파르타의 정예병 300인대를 비롯해 3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속속 테르모필레로 모여들어 결사 항전의 태세를 취했다. 여기서 페르시아군을 쳐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래 저지해야만 페르시아 해군의 측면 공격을 유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아테네가 준비한 함선들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테르모필레에서는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접전이 벌어졌고, 바다에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와 맞섰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태는 역력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페르시아군이 다른 길로 우회해 그리스군을 덮침으로써 요충지를 빼앗겼고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300인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 전사자는 무려 2만 명이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훗날 이곳에서 300인대의 지휘자인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를 기념해 세운 석조 사자상(‘레온은 사자라는 뜻이다)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쟁의 역사를 쓴 2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원수 몽고메리는 1933년에 이곳을 방문해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기념비를 보았다고 전한다. “이곳을 지나는 자,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스파르타의 군법에 복종하여 여기 누워 있노라고.”, 동시에 벌어진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도 그리스 해군은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테르모필레가 함락되자 페르시아군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패전 소식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재빨리 귀환한 함대의 도움으로 남쪽의 살라미스섬으로 대피했던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로 오는 도중의 모든 도시를 유린하고 약탈하면서 거침없이 아테네 시내로 진군했지만, 아테네는 텅 빈 유령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남아 있는 아테네 시민들을 살육하고 신전을 불사르고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우는 등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었는데, 이것이 크세르크세스의 마지막 실책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는 결코 항전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포기하기는커녕 그들에게는 아직 뽑아들지 않은 최후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이제 그것을 쓸 차례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반대하는 여러 지휘관, 특히 함대 총사령관인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살라미스 해안에 전 함대를 집결시켰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도 우리 함대가 진 것은 아니다. 이제 함대 전체가 모였으니 전면전에 승부를 걸자. 페르시아의 육군은 강하지만 해군은 적의 본대가 아니므로 해볼 만하다. 하물며 살라미스는 지금 우리의 가족들이 대피해 있는 곳,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그리스는 끝장이다.” 그의 이런 설득은 주효했다.

 

 

하지만 전 함대가 모였다고는 하지만, 수도 적고 속도도 느린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이길 확률은 대단히 낮았다. 전술적 결함은 전략으로 극복해야 했다. 기본 원칙은 한 가지, 테르모필레에서도 그랬듯이 대병력과 싸울 때는 좁은 곳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의 좁은 지협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페르시아 육군이 텅 빈 아테네를 뒤로 하고 곧바로 진격해왔더라면 그리스가 이런 시간을 벌기란 불가능했을 터이다.

 

좁은 해협에 이르자 페르시아 함대는 3열 종대를 2열 종대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들이 밀집해 있는 데다 물살이 거칠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대포가 없던 시절의 해전은 단순했다. 일단 적선을 들이받은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스 삼중 노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좌우현을 들이받았다. 배들이 맞닿았을 때는 즉각 선상에서 육박전을 벌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혼란에 빠져 당황하다가 이내 상당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현명하게도 그리스 함대는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

 

살라미스 해전 자체는 큰 성과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성과는 크세르크세스의 심경 변화였다. 패전 소식을 들은 그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헬레스폰토스에 남겨둔 배다리가 떠올랐다. ‘해전에서 승리한 그리스 함대가 그 다리를 끊어버린다면 우린 꼼짝없이 유럽에 갇혀버리리라.’ 수송선을 모두 그곳에 두고 온 게 후회막급이었다(당시 육군은 현지에서 양식과 물을 조달해가며 행군하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그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사실 그리스군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내친 김에 헬레스폰토스의 배다리를 끊으러 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독 안에 갇히는 것은 쥐가 아니라 호랑이다. 이번에는 에우리비아데스의 반대가 주효했다. 그는 배다리를 끊을 경우 궁지에 처한 페르시아 대군이 오히려 공격으로 전환해 그리스 전역을 유린하리라고 주장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도한 살라미스 해전, 에우리비아데스가 주장한 추격 중지는 서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그리스를 구했다.

 

 

신도시 건설 다리우스는 제국의 행정적 중심으로서 한계에 이른 수사 대신 새 수도인 파르사를 건설했다. 나중에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상당히 파괴되었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아직도 옛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파르사를 페르세폴리스라고 불렀는데, 후대에는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심지어 그리스인들은 이 이름 때문에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가 페르시아를 건설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했는데, 자민족중심주의가 신화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주전론자인 부하 마르도니오스에게 30만 명의 병력을 맡기고 귀국했다(헬레스폰토스의 배다리는 폭풍으로 이미 파괴되어 있어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배를 타고 사르디스로 귀환했다), 마르도니오스는 테살리아에 근거지를 잡고 겨울을 나기로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를 출발할 때 갖추었던 세 가지 유리한 조건은 이미 사라졌다. 즉 직접 원정에 나선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돌아갔고, 헬레스폰토스 배다리는 파괴되었으며,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인 대병력도 이제는 아니었다. 이것은 이 엄청난 전쟁의 대단원을 미리 말해주고 있었다.

 

이듬해 봄 페르시아군은 다시 아테네를 향했다. 아테네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목표는 이제 아테네가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였다. 그 무렵 그리스 연합군이 플라타이아에 포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페르시아군에 전해졌다. 페르시아군은 최후의 결전장이 될 플라타이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먼저 맞붙을 장소를 선택한 그리스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위시해 시키온, 에피다우로스, 트로이, 메가라 등 수십 개의 폴리스에서 파견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페르시아는 여전히 그리스보다 병력에서 우세했으나 여전히 장기인 기병 전술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전쟁 기간 내내 페르시아 기병대가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 중장보병의 강력한 방어와 더불어 산악과 구릉이 많은 그리스의 지형 탓일 것이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용감했으나 그리스 병사의 중무장에 비해 경무장이었고 전술에 능하지 못했다. 육박전이 벌어지자 그들은 무모하게 그리스 진영으로 돌입하다가 쓰러졌다.

 

장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지휘관인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고 페르시아 정예부대가 무너지는 것을 계기로 그리스의 승세는 굳어졌다. 이번에는 그리스군도 페르시아군이 쉽게 패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추격했다. 페르시아군이 미리 준비해놓은 요새로 들어가 수비로 전환하자 그리스군은 요새 공격에 나섰다. 누가 원정군이고 누가 방어군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육군을 섬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선으로 사모스 섬까지 진군했다. 페르시아는 속절없이 밀리며 이오니아마저 그리스에 내주고 말았다. 이로써 크세르크세스는 천하 통일은커녕 아버지 다리우스의 업적마저 물거품으로 만든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전후의 새 질서

 

 

페르시아 전쟁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이후에 그리스 고전 시대가 활짝 열렸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수십년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긴 전쟁을 한 차례 더 치르고서야 그리스는 평화를 되찾게 된다. 그런데 묘한 일은 그것을 정점으로 그리스 반도는 외부(마케도니아)의 침략으로 문명이 쇠퇴하고 그 대신 지중해 문명이 싹트게 된다는 점이다.

 

오리엔트의 대적을 물리친 경험은 그리스 반도에 새로운 판세를 가져왔다. 우선, 비록 승리는 했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공포를 느끼게 하는 존재였으므로 그리스 전체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대처 방식은 폴리스들이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맹주는 누굴까? 둘을 꼽으라면 만장일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말고 또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의 폴리스를 꼽으라면?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아테네가 우세한 것은 분명했다. 아테네는 단독으로 페르시아에 맞선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했고, 전쟁 기간 내내 한 번도 항전을 포기하지 않은 구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이 탄생했다.

 

왜 아테네 동맹이 아니고 델로스 동맹일까? 델로스는 그리스 반도에서도 제법 떨어진 에게 해 한복판의 조그만 섬이었는데, 여기에 폴리스들의 공동 군자금을 관리하는 금고를 설치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테네가 만장일치의 맹주였다면 아테네 동맹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스파르타와의 불화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귀중한 금고를 에게 해 한복판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오니아를 제패했다는 그리스의 자신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폴리스들의 우두머리가 공식적으로 정해졌으니 이제 그리스 반도는 통일을 이룬 걸까? 그보다 약간 나중이지만 기원전 3세기에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통일을 이룬 진()이 강력한 제국 체제를 구축했다. 아테네는 과연 그런 제국이 되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우선 그리스는 제국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좁았고, 중국의 중원과 같은 지리적 중심이 없었다. 또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과 달리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오래 걸어왔던 탓에 서열은 지어졌어도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웠다(중국의 제후국들은 분열기에도 내내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2인자 스파르타의 세력은 아테네가 1인자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그렇다 해도 아테네에 맹주를 넘어서 제국의 중심이 되고픈 의도가 없을 리 없다. 폴리스들이 점점 노골화되는 아테네의 지배를 거부하자 아테네는 오히려 더욱 고삐를 조였다.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델로스의 금고마저 아테네로 옮기고 제국 체제를 서둘렀다. 동맹 폴리스들이 정기적으로 내는 군자금은 점차 아테네에 바치는 조공으로 변해갔다. 이 재력과 해상무역의 독점으로 얻은 이익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화려하게 만개시킨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승리의 여신 승리의 여신 니케가 전리품으로 얻은 갑옷과 무기를 만지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소국이 동방의 대적을 물리친 것은 니케의 도움보다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힘을 합쳐 단결한 덕분이었다. 특히 헌신과 희생이 가장 컸던 아테네는 전후 그리스 세계의 리더로 떠올랐다.

 

 

클레이스테네스가 토대를 놓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그리스 민주주의라는 건물로 완성한 사람은 페리클레스Perikles(기원전 495년경~기원전 429)였다. 여기에는 물론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능력도 중요했지만, 당시 아테네에는 민주정이 발달할 만한 배경이 있었다. 우선 전 국민이 참전 용사였으니 당연히 신분 차별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사회의 하층이던 수병의 지위가 상승했고, 동맹의 맹주로서 아테네의 상공업이 전성기를 맞은 덕분에 상공업자의 지위도 올라갔다. 전쟁 전에도 아테네에서는 평민층의 성장이 두드러졌으니 전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시민계급이 두터워진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었다.

 

당연히 민회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에 반비례해 귀족들의 회의체인 500인회는 민회에 제출하는 의안을 준비하고 민회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500인회가 근대 민주주의의 입법부와 행정부라면 민회는 그 위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의회였다. 중요한 국사는 모두 민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민회에서 임명하는 중요 인물 중에 장군이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이래 아테네에서는 10개 귀족 가문 출신의 장군 10명이 교대로 군 지휘관을 맡았는데(사실 그리스에서는 무장의 비용을 자비로 담당했으므로 귀족이 아니면 장군이 될 수도 없었다), 이제는 이들을 민회에서 매년 재임명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장군으로서 매년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늘어난 아테네의 부를 바탕으로 500인회를 비롯한 공직자들에게 처음으로 일정한 급료를 지불했다. 또한 시민 법정에서도 배심원 제도를 채택하고 배심원들에게는 수당을 지급했다.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서구 사회의 배심원 제도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이 기간을 가리켜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부른다. 비록 외국인과 노예, 여성에게까지 참정권을 부여하지는 않았으나(서구 사회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는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되었다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의 관례에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적 책임도 소수에게 있지 않고 다수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성과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거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기본 정책인 반스파르타 노선은 다시 한 번 그리스를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게 된다.

 

 

최고 시민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위쪽)는 좋은 가문 출신에다 군인으로서나 정치가로서나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30년 동안이나 아테네의 최고 시민으로서 권좌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시민들은 1인자의 장기 집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피하고 싶은 인물의 이름을 적는 도편에 페리클레스의 이름이 적힌 경우도 있었다. 아래쪽 사진은 테미스토클레스와 그의 아버지 네오클레스의 이름이 적힌 도편이다.

 

 

 분쟁의 싹

 

 

아테네는 민주정과 제국 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었다. 아테네가 번영하는 만큼 폴리스들은 결집력이 점점 약해지고 반감이 심해졌다. 그렇게 보면 아테네는 처음부터 제국이 되기에 자격 미달인 셈이었다고대 제국(당시에는 페르시아와 중국)은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먼저 외적 조건으로 속국을 거느리는 것인데, 폴리스들의 군자금을 아테네에 바치는 조공으로 본다면 아테네도 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의 내적 조건, 즉 중앙집권은 아테네가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갖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설사 지리적 중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테네는 제국으로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가 제국 체제를 지향한 것은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스파르타의 불만은 가장 심했다. 아테네 못지않게 전쟁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그전에는 히피아스를 추방해 아테네의 참주시대를 끝장내준 적도 있잖은가?

 

게다가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바로 펠로폰네소스의 폴리스들이었다. 사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기 한참 전인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미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고 그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전후에는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동맹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그 동맹의 구속력이 훨씬 강했다. 두 동맹이 길고 짧은 것을 실제로 재보기로 한다면 결과는 어떨지 몰랐다.

 

그렇잖아도 잔뜩 곤두서 있는 스파르타의 신경을 아테네가 건드리는 사건이 터졌다. 아테네가 드디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까지 세력을 뻗쳐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테네의 힘은 이미 동부 지중해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인구는 증가 일로, 무역은 팽창 일로에 있는 아테네는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자면 근거지가 필요한데, 가장 좋은 후보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였다(그리스 반도의 서쪽은 높은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고 해안 지대가 좁아 폴리스가 발달하지 못했다).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코린토스와 메가라를 을러대자 스파르타는 거세게 반발했다. 자칫하면 전쟁이 일어날 판이었으나 외적을 상대한 큰 건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또 전쟁이 벌어진다면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기원전 446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 동안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하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봉책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양측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아테네는 서부 지중해로 진출해야 했고, 스파르타는 그것을 막아야 했다. 스파르타는 에게 해를 아테네에 양보하는 대신 당시 아직 그리스에 비해 후진 지역인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쪽 지중해를 관장하려 했다. 스파르타로서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지중해 동부의 노른자 해상권을 포기하고 서부 개척에 나선 셈이다. 하지만 아테네는 노른자든 흰자든 스파르타와 나눌 마음이 없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전쟁의 기운은 그전에 이미 숙성되어 있고 전쟁이 벌어질 시점에는 다만 방아쇠만 필요할 뿐이다. 그 방아쇠는 외부에서 당겼다. 약정된 휴전 기간이 절반도 채 지나지 않은 기원전 433년에 코린토스의 식민시로 있던 코르키라가 코린토스와 반목하면서 아테네 측에 붙었다. 스파르타는 이제 전쟁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기원전 404년까지 무려 30년을 끌면서 그리스의 거의 모든 폴리스가 연관되는 전쟁으로 확산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원형극장 그리스 문명은 아테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진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대극장을 위에서 본 모습이다. 얼추 봐도 객석이 수천 석은 된다. 한가운데 원형 무대에 선 배우들은 객석 가장 높은 곳의 관객들을 위해 대사를 아주 크게 발음했을 것이다.

 

 

 공멸을 가져온 전쟁

 

 

아테네는 오히려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니까 힘은 제법 쓰겠지만 전쟁은 물리력만으로 되지 않는 법, 결국에는 아테네의 풍부한 재력과 병력이 말을 할 터이다. 더구나 스파르타가 자랑하는 완력은 육군에만 해당할 뿐 해군력에서는 아테네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파르타에 운이 따른 걸까? 개전하고 얼마가 지난 기원전 430년 여름에 페스트가 아테네를 급습했다.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던 아테네로서는 치명타였다. 두 나라의 전력은 이 사건으로 대뜸 엇비슷해졌다. 그 덕분에 이후 전쟁은 지지부진한 지구전으로 10년을 끌었다. 선수들이 지치면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붙을 수밖에 없다. 기원전 421년 양측은 일단 휴전하기로 합의하는데, 중재자가 니키아스였으므로 이것을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부른다.

 

휴전이 만들어준 타임아웃 시간은 양측 모두에게 중요했다. 양측은 처음에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가 제거되지 않은 이상 주전론이 득세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잠깐 동안의 휴전을 먼저 깬 것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만티네아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었다. 개전 후 처음으로 벌어진 전투다운 전투에서 보기 좋게 패배하자 아테네에는 호전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그동안 스파르타에 질질 끌려다닌 이유는 전력상의 잠재적 우위를 현실화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책임은 바로 군 지휘관의 탓이었다. 이런 판단에서 아테네는 간단한 해법을 찾아냈다. 뛰어난 선수들을 거느리고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감독을 바꾸면 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친척인 30대의 젊은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기원전 450년경~기원전 404)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과연 새 감독은 전쟁에 의욕을 보였다. 그가 들고 나온 작전은 우회 전략이었다. 정면 승부 대신 스파르타의 보급 기지인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먼저 손에 넣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신임 감독은 문제가 있는 인물로 내부의 신임(信任)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원정에 나선 틈을 타서 그의 정적들은 과거의 행위를 들추면서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구석에 몰린 알키비아데스로서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명예롭게 귀국하기는 글렀다고 여겼다. 그런 심정이 엉뚱한 짓으로 표출되었다. 조국을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가서 자신이 세운 원정 계획을 낱낱이 일러바친 것이다. 그런 사실까지 모르고 있던 아테네는 다시 니키아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주전론자가 세운 작전을 주화론자가 수행하기는 어렵다. 알키비아데스의 첩보로 기민한 대응에 나선 스파르타는 시라쿠사 항구에서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고 군대를 학살했다.

 

 

몰락을 부른 내전 페르시아라는 대적을 물리친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그 후유증이었을까?? 그리스 세계의 평화와 번영은 한 세기를 가지 못하고 이번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반도의 패권을 놓고 겨루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승자와 패자의 공멸이었다. 이후 유럽 문명의 중심은 이탈리아로 서진한다.

 

 

굳게 믿은 함대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으로 큰 문제는 뒤부터였다. 해군에서 자신감을 얻은 스파르타는 반격에 나섰다. 그것도 아테네의 우회 전략을 그대로 써먹는 방법으로.

 

스파르타는 이참에 아테네의 목줄을 죄기로 했다. 에게 해를 장악해 아테네의 보급로와 무역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해군이 필요한데, 스파르타와 그 동맹 폴리스들은 전통적으로 해군이 약했다. 없으면 빌린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의 해군력이 가장 강하니까 빌릴 데가 없다. 그렇다면 바깥이다. 승리에 눈이 어두운 스파르타는 수십 년 전에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러 왔던 페르시아에서 해군력을 지원받기로 한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패한 이후 그리스 본토는 포기하더라도 이오니아만큼은 다시 지배하고 싶었다. 해군이 필요한 스파르타, 이오니아가 필요한 페르시아, 양측의 조건은 딱 맞아떨어졌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 이오니아의 식민시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보급로인 흑해 방면을 차단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원전 405년 아테네가 자랑하던 해군이 헬레스폰토스에서 대패하면서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은 아테네 해군의 절정기였다. 하지만 해군력으로 승리한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지나치게 해군력에만 의존한 나머지 육군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해군 전략에만 전념했다. 불균형한 전력은 약한 전력보다 위험한 법이다. 주 무기인 해군력이 무너지자 아테네는 견딜 수 없었다.

 

한편 외세까지 끌어들여 얻은 스파르타의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스파르타는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아테네의 의지를 꺾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그리스 전체의 맹주 자리에 올랐으나, 그것은 껍데기일 뿐 아테네가 채웠던 알맹이를 채울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해외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함대를 12척으로 제한했으며, 아테네를 스파르타의 동맹시로 만들었다(페르시아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을 감안해 독립만은 허용했지만 사실상 스파르타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전체로 볼 때 그것은 자승자박이었다. 아테네라는 권위의 중심이 사라진 다음에는 폴리스 체제의 모순이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전체의 공멸을 가져온 전쟁이었다.

 

 

죽어가는 병사 전쟁에서 부상한 병사의 모습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460년경의 작품이지만 전쟁의 참상은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중장보병의 차림인데, 창을 놓치고 방패만 손에 쥔 채 기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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