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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1부 씨앗 -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1부 씨앗 -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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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이집트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사방이 탁 트인 지역이다. 그러므로 문명의 씨앗도 한 곳에만 치중되지 않고 여러 군데에 골고루 퍼져나갔다. 아나톨리아의 고원에서 내려온 민족의 후예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인 아카드와 하류인 수메르 지역에 터를 잡고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을 세웠으나 그들 이외에도 이 일대에서는 문명의 빛이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라비아 사막 출신의 셈족 유목민들은 몇 차례의 민족이동으로 사막 지대를 벗어나 서쪽과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지중해 동부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고대 문명을 열었고, 기원전 8000년경~기원전 7000년경 지금의 요르단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시로 기록되는 예리코(ericho, 구약성서에는 여리고라고 나온다)를 건설했다현전하는 도시 유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의미일 뿐 실제로 최초의 도시인지는 알 수 없다. 또 북쪽으로 간 셈족은 고원 사람들과 어울려 기원전 25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카드와 수메르의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은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면서 지구라트를 건축하고 점토판 문서와 설형문자지구라트는 신전 한가운데 쌓아올렸던 탑인데, 후대의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에 맞먹을 만큼 대규모였다. 그러나 석재가 많았던 이집트에 비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건축재로 쓸 만한 돌이 없었다. 그래서 지구라트는 진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adobe)로 지었다. 바벨탑의 전설을 낳을 정도로 대규모였던 지구라트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진흙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집트처럼 파피루스가 자라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갈대펜으로 점토판을 긁어 설형문자를 기록했다. 이 지역에서 발명된 알파벳 문자가 훗날 유럽에 전해졌는데, 오늘날 알파벳 기호들이 대부분 세로 방향의 쐐기 모양을 취하는 것은 설형문자의 흔적이다를 사용하는 등 이집트에 못지않은 화려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집트의 통일보다는 1000년 가까이 뒤지지만, 메소포타미아에도 이내 통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원전 2350년경 셈족 출신의 사르곤 1‘1라는 말이 붙은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후대의 사르곤 2세와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사르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사르곤 2세는 한참 후인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왕으로, 사르곤 1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물론 사르곤 2세 역시 당대에는 그냥 사르곤이었다). 나중에 중세 부분에서 특히 많이 나오겠지만, 서양의 역사에서는 왕명이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데, 그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다는 수메르와 아카드 일대를 통일하고 아카드 왕조를 열었다. 이어 그는 서쪽의 시리아와 동쪽의 엘람(오늘날 이란의 서부 고원지대)까지 정복하고 대제국을 이루어 사계(四界, 천하)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근대의 에스파냐와 영국을 가리키는 말로 썼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이미 까마득한 고대에도 있었던 것이다(기록에 따르면, 사르곤은 하층민 출신으로서 새들의 안식처까지 파괴했다.”라는 무자비한 군주였다). 그러나 때 이른 정복 군주의 위용은 오래가지 못했다.

 

 

피라미드와 지구라트 왼쪽은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이고, 오른쪽은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지구라트다(지구라트의 아래 부분은 현대에 복원된 것이다). 둘 다 고대 세계의 웅장한 건축물이지만 환경이 달랐으므로 재료도 달랐다. 피라미드는 단단한 돌로 쌓은 반면, 지구라트는 진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 즉 어도비로 쌓았다.

 

 

절대군주 사르곤이 죽자 메소포타미아는 정치적 혼란을 맞았다. 이후 우르의 수메르 왕조가 패권을 장악하면서 잠시 안정을 되찾지만,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인이 아니었다. 기원전 20세기를 넘기면서 우르 왕조가 무너지자 다시 이 일대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게 된다이것을 계기로 수메르 문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아카드 문명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 수메르 문화가 실전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이집트에서도 대규모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영토가 넓으면 지배자의 권력이 강화되지만, 한도를 넘으면 오히려 지배자의 지위가 흔들리게 마련이다.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이집트의 강역이 넓어지면서 파라오의 신권도 바닥을 드러냈다. 단일한 지배 권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자 파라오는 귀족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그들의 충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봉건제가 성립했다봉건제는 중국이나 서양의 중세에만 있었던 특유한 제도가 아니라 여건이 맞으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제도다. 말하자면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다. 봉건제의 취약점은 중앙집권이 약화되는 데 있다. 원래 이집트는 정치만이 아니라 모든 경제활동도 파라오의 통제 아래 있었으나 중앙 권력이 약해지자 변방에서 권력을 장악한 귀족들이 점차 정치적·경제적으로 자립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기원전 22세기 무렵부터 약 200년간 분열기를 맞는데, 이것이 제1중간기다.

 

이 분열기를 수습한 사람은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였다. 그는 수도를 남쪽의 테베로 옮기고 다시금 왕권을 안정시켜 중왕국을 열었다. 초승달의 양 끝을 이루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접촉을 시작한 것은 중왕국 시대부터다. 사실 메네스의 통일이 있기 전인 기원전 3300년경에 이집트는 셈족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정복해 군사력의 우위를 입증한 바 있었다.

 

고왕국이 무너진 뒤 오랜 분열기의 혼란에 염증을 느낀 이집트인들은 평화와 안정을 희구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가 이집트 하나만 있다면 몰라도 주변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국제 정세에서 안정이란 자칫 퇴보를 의미할 수 있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메소포타미아에 뒤질 게 없었지만 불행히도 이집트는 군사력에서 진전이 없었다. 한 가지 예로, 그들은 바퀴를 만들 줄 알면서도 전차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개미들이 바글거리는 세상에서 베짱이의 운명은 뻔하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1700년경부터 시리아에 터전을 잡고 있던 힉소스인들이 난생처음 보는 전차를 앞세우고 침공해오자 제대로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힉소스인들은 낯선 땅에 온 것이지만, 시리아의 척박한 산지보다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 테베까지 점령해 이집트를 완전히 정복한 힉소스의 왕 셈켄은 마침내 이집트의 왕위에 올라 최초의 이민족 파라오가 된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힉소스의 이집트 지배기가 이집트 역사의 제2중간기다.

 

 

발상의 차이 이집트인들은 바퀴를 알았으나 그것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에서처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일찌감치 바퀴를 가지고 전차를 만들어 전쟁에서 주무기로 사용했다. 이집트는 힉소스의 지배를 받은 다음에야 바퀴를 군사용으로이용할 줄 알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신국의 역사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최초의 국제사회

아리아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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