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뿌리①
크레타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오리엔트 문명의 한 자락을 거머쥘 수 있었으나 큰 문명을 담을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의 뿌리는 곧바로 그리스 반도로 넘어간다. 포도와 올리브밖에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해상 활동에 나서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주름잡으며 수많은 식민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문명의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을 되찾으려는 오리엔트의 강력한 도전을 물리쳐야 했는데, 그것이 페르시아 전쟁이다. 여기서 승리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는 오리엔트와 질적으로 다른 문명을 건설한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서양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장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신화가 말해주는 역사
오리엔트에서 배태된 문명의 씨앗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은 지중해 동부 에게 해의 크레타 섬이었다. 지도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에게 해는 유럽의 가장 동쪽에 속하며, 크레타는 수많은 작은 섬이 떠 있는 다도해 남부에 섬들의 맏형처럼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문명 이전에 그 바로 동쪽의 크레타와 에게 해의 섬들에서 문명이 먼저 발생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문명의 서진 현상을 뚜렷이 보여주는 한 증거다.
크레타 문명은 미노스 문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전설적인 크레타의 지배자 미노스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노스의 이름은 다소 낯설지 모르겠지만 미궁이라는 말은 낯익다. 미노스는 바로 미궁으로 유명했던 크노소스 왕궁의 주인이다.
물론 미궁의 주인은 따로 있다.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식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미노타우로스란 ‘미노스의 소’라는 뜻이니까 미노스와 아주 가까운 관계일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미노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탓에 그의 아내가 황소를 사랑하게 되어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미노타우로스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미노스는 이 괴물 ‘서자’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가두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워낙 힘이 좋고 난폭한 놈이라 아무 데나 가두면 뛰쳐나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노스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다이달로스【다이달로스는 이후 미노스 왕의 미움을 사서 탑에 갇히게 된다. 탈출할 길을 모색하던 그는 솜씨를 부려 날개를 만든다. 작품은 성공작이었으나 이 때문에 그는 아들을 잃는 비극을 당한다. 함께 갇혀 있던 아들은 하늘을 난다는 것에 감격한 나머지 태양 가까이까지 날다가 그만 날개가 뜨거운 열에 녹아 떨어져 죽는다. 아들의 이름은 이카로스인데, 여기서 생겨난 고사성어 ‘이카로스의 비행’은 헛된 꿈을 뜻한다】에게 크노소스 궁전 안에 미로를 짓게 했다. 미노타우로스는 다이달로스가 만든 교묘한 미로 속에 갇혀 몸은 자유롭지만 이곳을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이 미로를 라비린토스(labyrinthos)라고 불렀는데, 영어의 미궁(labyrinth)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굳이 신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신화 속에 역사의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미노스의 시대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기원전 2000년을 넘지는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 오리엔트의 역사가 상세하게 알려진 데 비해 크레타의 역사에 신화적인 요소가 많았던 것을 보면, 미노스 문명의 시대까지도 오리엔트 문명이 더 선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노스는 매년 일곱 명의 소년과 소녀를 미궁 속으로 보내 미노타우로스에게 먹이로 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매년 아테네에서 보내왔다. 이것은 당시 아테네가 크레타에 조공을 바쳤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신화에서 이 끔찍한 ‘인신 조공’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다.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제물로 자원해 크노소스 궁전에 간다. 괴물과 싸우는 것은 각오한 일이지만, 문제는 죽이고 나서 미궁을 빠져나오는 일이다. 이 문제는 테세우스에게 반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해결해준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서 얻은 실타래를 풀면서 미궁 속에 들어가 괴물을 죽인 다음 실타래를 따라 미궁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 공헌을 한 아리아드네를 차버리고 만다. 그리스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인 셈이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는 것은 그리스가 크레타에 복속된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문명의 씨앗이 크레타에서 한 발 더 서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흔히 그리스 문명을 서양 최초의 문명으로 말하지만, 정확히 따지면 크레타가 먼저다. 따라서 우리가 출발해야 할 곳은 바로 크레타 문명이다. 한때 그리스를 조공국으로 거느렸던 크레타에는 어떤 문명이 발달했을까?
▲ 크레타의 투우 크노소스 궁전에 그려진 벽화다. 소를 이용한 곡예를 그린 것인데, 이것이 나중에 투우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놀랍게도 곡예사는 여성이다. 크레타와 달리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경기에서는 여성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크레타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이니까 상당히 오래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아직 문명이라고 부를 정도가 못 되었고, 본격적인 미노스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페니키아 상인들의 공로가 컸을 터이다. 섬이라는 유리한 지형 조건을 이용해 고대 크레타인들은 일찍부터 해상무역(물론 해적질도 포함된다)에 진출해 지중해 동부의 교역에서 큰 몫을 했다. 앞서 말한 수수께끼의 해상 민족들에게 선배가 되는 셈이다.
기원전 2000년쯤 되면 크레타에는 문자가 사용되고 섬 전체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크노소스 궁전을 비롯해 크레타의 여러 건축물은 이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의 학자들은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는 이때의 문자를 선형문자A(Linear 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고대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초창기에 크레타는 두 차례의 시련을 겪는다.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6세기의 사건들인데, 크노소스 궁전을 포함해서 섬 전체의 건물들이 한꺼번에 파괴된 것이다. 그 무렵에 일어난 화산 폭발이 초래한 자연재해였으리라고 추정된다(혹은 당시 이집트에서 쫓겨난 힉소스인의 침입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크레타인은 재앙에 굴하지 않고 더 큰 규모의 궁전과 건물을 다시 지었다. 이후 크레타 문명은 종전보다 더욱 발달해 전성기를 맞았다. 20세기 벽두에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Arthur John Evans)가 크레타 섬에서 발굴한 수많은 유물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시기에 크레타인들은 지중해 동부의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했으며, 각종 축제와 스포츠 행사를 벌이는 등 고대 그리스 문화의 원형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리엔트 문명의 씨앗을 받아 에게 문명 (크레타 문명과 나중에 그리스에서 발달하는 미케네 문명을 합쳐서 에게 문명이라 부른다)이라는 독자적인 문명으로 키워내는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 에게 문명은 당대의 오리엔트 문명에 비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이후 서양 문명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리적으로도 에게 해는 유럽에 속하기 때문에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오리엔트 문명보다 오히려 에게 문명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다. 심지어 일부학자들은 에게 문명이 오리엔트 문명과 별도로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씨앗 없이 뿌리가 자라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에게 문명이 발달한 곳은 크레타 섬만이 아니었다. 에게 해 남부 다도해에 떠 있는 섬들을 키클라데스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 일대의 거의 모든 섬에도 크레타와 비슷한 시기에 화려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다. 물론 크레타는 그중에서 가장 큰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들을 지배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제주도 면적의 네다섯 배에 불과한 크레타 섬은 대규모 문명의 모태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크레타에 복속되어 있던 그리스인들은 서서히 문명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4세기 무렵부터는 오히려 크레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해야 할까? 크레타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그리스는 완전히 형세를 역전시켜 마침내 크레타의 심장 부인 크노소스 궁전을 파괴해버렸다(이 과정이 테세우스의 신화로 각색되었을 터이다). 크노소스 궁전은 이때부터 3300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혀 있다가 에번스의 발굴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된다. 에번스는 크노소스를 발굴하면서 수많은 토판 문서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어인 선형문자 B가 많이 포함되었다. 이 문자는 현재 완전히 해독되었는데, 크레타 문명의 후기에는 이미 그리스인의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자료다.
▲ 에게 해를 휩쓴 화산 폭발 크레타 북쪽의 테라 섬에서 발굴된 벽화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는 항구가 이렇듯 평화로웠으나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을 파멸로 이끈 화산 폭발은 이 섬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 벽화는 수많은 작은 파편을 퍼즐 맞추듯 짜 맞추어 복원한 것이다.
오리엔트와 그리스의 중매
크레타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이니까 상당히 오래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아직 문명이라고 부를 정도가 못 되었고, 본격적인 미노스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페니키아 상인들의 공로가 컸을 터이다. 섬이라는 유리한 지형 조건을 이용해 고대 크레타인들은 일찍부터 해상무역(물론 해적질도 포함된다)에 진출해 지중해 동부의 교역에서 큰 몫을 했다. 앞서 말한 수수께끼의 해상 민족들에게 선배가 되는 셈이다.
기원전 2000년쯤 되면 크레타에는 문자가 사용되고 섬 전체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크노소스 궁전을 비롯해 크레타의 여러 건축물은 이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의 학자들은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는 이때의 문자를 선형문자A(Linear 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고대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초창기에 크레타는 두 차례의 시련을 겪는다.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6세기의 사건들인데, 크노소스 궁전을 포함해서 섬 전체의 건물들이 한꺼번에 파괴된 것이다. 그 무렵에 일어난 화산 폭발이 초래한 자연재해였으리라고 추정된다(혹은 당시 이집트에서 쫓겨난 힉소스인의 침입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크레타인은 재앙에 굴하지 않고 더 큰 규모의 궁전과 건물을 다시 지었다. 이후 크레타 문명은 종전보다 더욱 발달해 전성기를 맞았다. 20세기 벽두에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Arthur John Evans)가 크레타 섬에서 발굴한 수많은 유물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시기에 크레타인들은 지중해 동부의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했으며, 각종 축제와 스포츠 행사를 벌이는 등 고대 그리스 문화의 원형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리엔트 문명의 씨앗을 받아 에게 문명 (크레타 문명과 나중에 그리스에서 발달하는 미케네 문명을 합쳐서 에게 문명이라 부른다)이라는 독자적인 문명으로 키워내는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 에게 문명은 당대의 오리엔트 문명에 비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이후 서양 문명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리적으로도 에게 해는 유럽에 속하기 때문에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오리엔트 문명보다 오히려 에게 문명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다. 심지어 일부학자들은 에게 문명이 오리엔트 문명과 별도로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씨앗 없이 뿌리가 자라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에게 문명이 발달한 곳은 크레타 섬만이 아니었다. 에게 해 남부 다도해에 떠 있는 섬들을 키클라데스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 일대의 거의 모든 섬에도 크레타와 비슷한 시기에 화려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다. 물론 크레타는 그중에서 가장 큰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들을 지배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제주도 면적의 네다섯 배에 불과한 크레타 섬은 대규모 문명의 모태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크레타에 복속되어 있던 그리스인들은 서서히 문명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4세기 무렵부터는 오히려 크레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해야 할까? 크레타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그리스는 완전히 형세를 역전시켜 마침내 크레타의 심장 부인 크노소스 궁전을 파괴해버렸다(이 과정이 테세우스의 신화로 각색되었을 터이다). 크노소스 궁전은 이때부터 3300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혀 있다가 에번스의 발굴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된다. 에번스는 크노소스를 발굴하면서 수많은 토판 문서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어인 선형문자 B가 많이 포함되었다. 이 문자는 현재 완전히 해독되었는데, 크레타 문명의 후기에는 이미 그리스인의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자료다.
▲ 에게 해를 휩쓴 화산 폭발 크레타 북쪽의 테라 섬에서 발굴된 벽화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는 항구가 이렇듯 평화로웠으나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을 파멸로 이끈 화산 폭발은 이 섬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 벽화는 수많은 작은 파편을 퍼즐 맞추듯 짜 맞추어 복원한 것이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
당시 그리스와 이오니아가 맞부딪는 과정은 두 개의 그리스 신화 속에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오프닝 게임에 해당하는 아르고호의 원정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출신의 해적인 이아손은 이오니아에 빼앗긴 그리스의 보물인 황금 양피【황금 양피는 헤르메스 신이 테살리아의 네펠라라는 왕비에게 선물로 준 양의 가죽이었다. 네펠라는 남편이 후궁을 얻자 자기 아이들을 구박할까 두려워 아이들을 양의 등에 태워 멀리 보낸다. 양은 동쪽으로 날아갔는데, 그만 헬레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바다로 떨어졌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에 이 바다는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오늘날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고 있는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양은 계속 날아가 흑해 연안의 콜키스 왕국에 사내아이를 내려놓았다고 한다】를 찾으러 50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아르고호를 타고 원정을 떠난다. 여기에는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오르페우스, 네스토르 등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이 총출동했다. 이들은 지금의 흑해 연안에 있는 콜키스를 공략해 황금 양피를 빼앗고 개선한다.
오프닝 게임에 뒤이은 메인이벤트가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수천 년 동안 트로이 전쟁은 호메로스가 지어낸 신화로만 알려졌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것은 어릴 때 호메로스의 책을 읽고 전설이 아니라 사실로 믿은 독일의 기업가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1870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덕분이다. 이 전쟁이 벌어진 시기는 기원전 13세기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리아스』가 전하는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장난 때문에 일어난다. 신들의 결혼식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그 복수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쓰인 황금 사과를 만찬장에 던진다. 당연히 아름다움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이 그 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제우스는 비록 최고신이지만 아내(헤라)와 딸(아테나)이 끼어 있으니 쉽게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양치기인 파리스에게 판결을 의뢰한다.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뇌물’에 넘어가 그녀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에리스가 신들의 세계에 내던진 ‘불화’는 엉뚱하게도 인간 세상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파리스가 아내감으로 지목한 여자는 불행히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헬레네는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이름이다. 원래 그리스는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를 헬라스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헬레네의 자손, 즉 헬렌족(Hellenes)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투키디데스는 그리스라는 이름을 전혀 쓰지 않고 헬라스라는 이름만 썼다(헬라스보다 그리스라는 로마식 이름이 후대에 더 널리 쓰인 데서도 문명의 서진 현상을 볼 수 있다. 오리엔트의 지명들도 그리스인이 붙인 것들이 후대에 많이 전한다. 오리엔트나 메소포타미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다)】였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꾀어 함께 트로이로 달아난다 (파리스는 원래 트로이의 왕자였으나 장차 나라의 화근이 되리라는 신탁이 있어 트로이에서 쫓겨나 그리스에서 자랐다).
그러자 그리스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다른 왕들을 부추겨 트로이 공격에 대대적으로 나선다. 이리하여 아가멤논(메넬라오스의 형)을 총 사령관으로 하고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데스 등 당시 그리스의 영웅들을 총망라한 대규모 원정군이 편성된다. 아르고호의 원정군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2차 드림팀’이다
그리스와 트로이는 양측 모두 신들의 지원과 간섭을 받으면서 10년 동안 전쟁을 벌인다. 최후의 승자는 그리스였다. 오디세우스가 세운 계략에 따라 그리스는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문 앞에 놔두고 뱃머리를 돌려 철군하는 척했다. 트로이군은 기뻐하며 그 목마를 성안에 들여놓았다. 밤이 되자 그때까지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몰래 성문을 열어놓았고, 그리스 본대가 물밀듯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트로이는 이렇게 함락되었다. 이후 그리스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귀환하는 과정은 「오디세이아」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 신들의 게임 백설공주의 계모는 거울에게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었지만, 그리스의 세 여신은 양치기 파리스에게 그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이 두 그림은 그 상황을 담은 회화 작품 <파리스의 판결>인데, 위쪽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의 작품으로 아들 에로스를 데리고 있는 여신이 파리스의 ‘낙점’을 받은 아프로디테다. 아래쪽 그림은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작품이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서 신화의 포장을 벗기면 전혀 다른 알맹이가 나타난다. 현실의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장난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개된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가 지중해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왜 지중해로 진출하려 했을까? 사실 그들은 그러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리스의 지형은 넓은 들판이 없고 산지가 많다. 더구나 토질도 매우 척박해 농경이 크게 발달하기는 어렵다. 거친 토양과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포도와 올리브 정도만 재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일찌감치 포도와 올리브를 가지고 무역 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역 활동이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약탈과 해적질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해적질이 활발해지면서 기원전 12세기부터 오리엔트의 강국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 본 바 있다(51~52쪽 참조). 바야흐로 지중해 세계는 강력한 패자가 사라지고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를 맞았다【당시 동부 지중해 일대는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이오니아인 등 해적들의 세상이었다. 섬은 물론 해안 지대까지도 해적들의 약탈과 노략질이 심했으므로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초기의 폴리스들은 해적들 때문에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여러 해적 가운데 점차 그리스인 출신의 해적들이 세력을 키워갔으나 그리스 해안이라고 해서 그리스 해적들이 봐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당시에는 단일민족 의식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틈을 타서 그리스인들은 에게 해 일대를 장악하려 했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이오니아 지역의 국가들이었다. 그리고 트로이는 바로 그 길목에 있는 국가였다. 트로이 전쟁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신구 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 트로이 성벽 호메로스가 기다란 시를 써서 호들갑을 떨었고 트로이를 물리친 그리스 문명이 서양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는 것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사진에서 보듯이 트로이는 터키 북부의 조그만 성이었을 뿐이다(당시에도 트로이보다 더 큰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많이 있었다). 또한 10년이나 끌었다는 트로이 전쟁 역시 실은 그 당시에 흔했던 그리스 해적과 소아시아 항구도시의 그렇고 그런 싸움이었을 뿐이다.
트로이 전쟁은 10년이나 끌었지만 실상 처음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조그만 성곽 도시에 불과한 트로이가 여러 세력이 연합한 그리스군을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리스군은 트로이에 도착하자마자 벌인 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조금만 더 고삐를 죄었더라면 트로이 전쟁은 길어야 몇 개월로 끝났을 것이다(물론 그랬다면 오늘날까지 그 전쟁이 전하지 않았겠지만).
전쟁이 오래 지속된 이유는 그리스군이 ‘딴전’을 많이 피웠기 때문이다. 그리스군은 애초부터 군량을 충분히 가져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 병력을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려 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바로 체질화된 해적질 때문이다. 그리스군은 전쟁 기간 내내 인근 지역을 개간하거나 약탈하느라고 항상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전쟁이 10년이나 이어졌고, 또 오디세우스가 귀환하는 데도 10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약탈과 개간의 경험은 곧이어 그리스의 암흑시대가 닥칠 때 이오니아 식민시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된다.
신화 속에 나오는 아르고호의 원정과 트로이 침공은 이오니아의 왕국들이 그리스의 양가죽이나 여자를 빼앗는 등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그리스에 패배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신화’였기에 그렇게 윤색된 것일 뿐 사실은 정반대다. 그리스는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상 진출에 나섰던 것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리스는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 바이러스 침투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트로이의 목마다. 잠수함처럼 목마를 타고 있는 그리스 병사들이 보인다. 이 전설에서 나오는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라는 말은 현대 전쟁에서도 파괴나 신전을 담당하는 비밀 공작대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1990년대 초 컴퓨터 바이러스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암흑을 가져온 민족
공교롭게도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전쟁을 주도한 미케네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미케네는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왕국이었다. 개방성이 강한 크레타의 궁전들에 비해 미케네 왕궁은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성벽을 이루는 돌들이 워낙 커서 ‘키클로페스의 성벽’이라 불렸다고 한다. 키클로페스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예술 양식도 크레타 문명에서 물려받았으나 그 내용은 전쟁이나 사냥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힘센 왕국이 왜 무너졌을까?
문명이란 물리력에 의해 발전하는 게 아니다. 물리력을 통해 문명을 개척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의 지속적 발달을 위해서는 물리력이 오히려 약보다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보았던 오리엔트의 강력한 전제 국가 아시리아의 경우가 좋은 예다. 더구나 미케네는 군주의 권위를 내세워 오리엔트 전제군주를 모방하려 했으나 그나마 불완전한 모방에 그치고 말았다. 오리엔트 국가들과 달리 미케네는 느슨한 부족 연맹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토지제도에서도 미케네는 사유지 이외에 공유지를 설정했는데, 이것은 공동체적 성격이 잔존했음을 보여준다. 마치 고대 중국 주나라의 정전(井田)처럼 미케네 농민들은 공유지를 공동 경작해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미케네의 귀족들은 중앙 정부에 공납을 바치는 것 이외에는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것을 일종의 고대적 봉건제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의 미케네와 중국의 주나라에 봉건제가 성립했다는 것은 역사 발전 단계의 보편성을 말해준다.(『종횡무진 동양사』, 37~39쪽)】. 문명의 성격으로 보면 미케네 문명보다 오히려 크레타 문명이 더 강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 문명의 진정한 후예가 되기는 어려웠다.
군사적 성격이 붕괴의 내적인 요인이라면 그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은 외부에서 작용했다. 또다시 민족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수백 년 전 아리아인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이 이룩되었지만, 기원전 12세기~기원전 11세기에 있었던 도리스인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이 파괴되었다. 더구나 도리스인은 문명의 개척과 건설보다는 파괴에 능한 난폭자였다고 전한다(이런 역사적 평가는 다분히 모함일 수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이 시기부터 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까지 약 300여 년 동안 그리스는 암흑시대를 맞게 된다. 암흑시대란 당시 그리스의 문자였던 선형문자 B의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붙인 이름인데, 과연 300년이라는 긴 시기가 실제로 암흑기였는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그리스의 철기시대는 도리스인이 그리스를 지배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암흑시대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호메로스는 그 암흑시대의 끝자락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의 저작은 암흑시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므로 암흑시대에 관한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암흑시대는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위한 준비기이기도 했다. 그리스로 남하한 도리스인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고 농경문화를 이루었다(고대 그리스의 군국주의 국가인 스파르타가 바로 그들의 후예다). 따라서 해상무역에 주력한 그리스인들과는 기질부터 달랐다. 물론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들과 섞이거나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도 했지만, 그리스인의 본류는 도리스인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 터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예 그리스를 떠날 것인가? 그리스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은 이오니아로 가서 많은 식민시를 건설했다. 이오니아에는 일찍이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식민시들이 있었으므로 그리스인이 정착하기에도 용이했을 것이다(이오니아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또한 그리스 본토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그리스 중부의 아티카로 모여들었다. 아티카 고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테네가 그리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다.
이오니아와 아티카 중 문명의 발달이 더 왕성했던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이오니아다. 아직도 오리엔트 문명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니 이오니아가 지리상 더 유리했다. 게다가 고향을 버리고 떠나온 그리스인들의 각오는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굳지 않았을까? 이오니아의 경험이 그리스에 미친 가장 커다란 영향은 바로 폴리스(polis, 도시국가)의 성립이다.
▲ 도리스인의 그리스 식민시 역사가들은 도리스인의 침략이 그리스에 암흑기를 가져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리스 문명에 도리스인이 합류했다고 보는 게 옳다. 도리스인에게 밀려난 그리스인이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본받아 도리스인도 해외에 식민시를 건설했다. 사진은 시칠리아에 건설된 도리스인의 식민시인 셀리누스의 유적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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