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승부로 끝난 대결
이제 오리엔트의 세력 판도는 아시아의 선두 주자로 부상한 히타이트와 아프리카의 대표 이집트가 시리아 일대에서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옛 바빌로니아 지역은 서쪽 이란 고원 출신의 카시트 왕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이 오리엔트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철제 무기를 앞세운 신흥 강호 히타이트와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전통의 강호 이집트의 대결은 그 자체로도 흥밋거리겠지만, 역사적으로도 장차 오리엔트 세계의 향방을 좌우할 중대한 사건이었다.
기원전 14세기 중반 히타이트가 강력한 군주 수필룰리우마스 1세의 치하에 미탄니를 복속하고 시리아로 진출하는 동안, 이집트는 내부의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이윽고 기원전 13세기 초반에 즉위한 유능하고 혈기 넘치는 파라오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86년 옛 이집트 제국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행군을 시작했다. 대규모 용병대를 거느린 이집트군의 목적지는 시리아의 카데시(다마스쿠스의 북부)였고, 적은 이제까지 이집트가 겪은 어느 적보다도 강한 히타이트였다. 한편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스도 생전 처음 맞닥뜨리는 강적을 맞아 카데시로 진군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275년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인 카데시 전투가 벌어졌다. 초반전은 히타이트가 기선을 제압했다. 히타이트군은 매복과 기습 작전으로 이집트군의 허리를 자르고 패주하는 적을 쫓아 파라오를 포로로 잡기 일보 직전까지 나아갔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한 람세스를 구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히타이트군의 방심이다. 그들은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집트의 명맥을 끊지 못하고 한가롭게 이집트 진지를 유린하며 약탈에 전념했다. 다른 하나는 구원군이다.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가나안 정예부대가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가나안군은 히타이트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람세스가 있는 중앙 진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허를 찔린 히타이트군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히타이트가 자랑하는 전차는 이제 공격용이 아니라 도주용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군 역시 적을 계속 추격할 힘은 없었다.
전략에서 승리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한 무와탈리스와 그 반대인 람세스는 결국 무승부를 기록했다【재미있는 것은 이 카데시 전투를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집트의 승리로, 히타이트에서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한바탕 힘겨루기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양측은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통일의 기회가 무산된 이후, 오리엔트의 통일은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등장하는 기원전 8세기까지 5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 바위를 깎아 만든 신전 람세스 2세가 만든 아부심벨 신전의 입구다. 신전은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맞먹는 크기로, 앉아 있는 네 명의 왕은 높이가 무려 20미터에 이른다. 바위 뒤편에는 신전의 본채가 있는데, 여기에는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가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력이 약하면 유적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걸까? 이 신전은 1958년 아스완 댐의 건설 계획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가 유럽 선진국들의 도움으로 원래 위치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복원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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