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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4장 - 가난한 자는 버린 자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4장 - 가난한 자는 버린 자

건방진방랑자 2023. 3. 2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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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는 버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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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1Jesus said, “Blessed are th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heaven.”

 

 

유명한 산상수훈의 말씀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놀라웁게도 이것은 큐복음서에 속하는 것이다(Q9).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이 세 개의 파편을 비교해보면 다양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 세 개의 파편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인지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우선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하여 3인칭으로 쓰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는 가난한 너희는이라 하여 2인칭을 쓰고 있다(you poor[RSV], you who are poor[NRSV]: 우리말 번역은 2인칭을 빼버렸다). 도마는 3인칭을 쓰고 있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표현을 쓴데 반하여, 도마와 마태는 공통으로 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하늘나라천국이라는 표현을 극력 피하는 성향이 있는데 비하면(그냥 나라혹은 아버지의 나라라고만 한다. 20하늘나라가 한 번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114에 또 나온다), 여기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좀 파격적일 수도 있다. 3에서 이미 말했듯이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추구하는 자들의 본래적 자아의 회복일 뿐이다.

 

그리고 마태는 저희 것임이라로 되어있는데 도마와 누가는 너희 것임이라로 되어있다. 그리고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하여, ‘가난한 자에다가 심령이(in spirit)’라는 표현을 덧칠하였다. 도마와 누가는 그런 덧칠이 없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심령의 가난을 운운한 것은 마태의 첨가라고 말하지만, 상당수의 주석가들이 결코 그렇게만 단순하게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심령의 가난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전제조건이다. 심령의 파산(spiritual bankruptcy)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신 앞에서의 인간의 하찮음을 고백하게 하고, 전적으로 메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메시아가 가져오는 축복을 향유하며, 천국의 삶에 참여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심령의 가난노자()’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음이 찬[滿] 사람은 천국을 받아들일 수 없다. 노자의 ()’도 마음이 빈 사람에게만 깃드는 것이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도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사상에 속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Carso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8, 131).

 

그리고 재미있게도 마태와 누가가 모두 가난한 자의 축복, 즉 천국이 저희(너희) 것이라는 후반부가 현재형(estin)으로 되어있는데 비하여, 다음에 이어지는 축복은 미래형(estai)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원래 아람어에서는 현재형도 미래형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 가난한 자의 지복수훈은 그러한 아람어의 무시간적 구성(timeless construction)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많은 주석가들이 주장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축복에 관하여서는, 천국이 이미 현재에 임재해 있으며, 그러한 현재성 속에 가난한 자들이 이미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축복이 하나의 단편으로서 독립된 형태로 도마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자의 축복은 지복수훈(至福垂訓, beatitude) 전체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전승일 수도 있다.

 

역사적 예수에게 있어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역설적인 축복(macarism)은 천국운동의 핵심적 사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신체를 가진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그리고 야고보서 2:5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풍요롭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지 않으셨더냐?

 

 

하여튼 가난은 경제적 빈곤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만(我慢)’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로의 절대적인 의존성이 초래된다. 여기 가난한 자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나윔(nāwȋm)’지속되는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고통으로 인하여 오직 하나님에게만 매달리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공관복음서에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되는 종말론적 축복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여기 가난한 자의 헬라적 의미를 보다 깊이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도마에 쓰인 말은 헤케(hēke)’이고, 마태 ·누가에 쓰인 말은 프토코이(ptōchoi)’이다. 도마의 콥트어 헤케는 희랍어의 프토코이에 해당된다.

 

희랍세계에 있어서 부의 신은 플루투스(Plutus)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플루투스에 상대적인 빈곤의 신은 여신이며 페니아(Penia)라고 부른다. 희랍에서 플루투스(ploutus)와 페니아(penia)는 부유와 빈곤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진다. 그러나 플루시오스(plousios, 부자)이든 페네스(penēs, 빈자)이든, 이 단어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의 재산이나 수입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빈곤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페네스라 해도 농장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이며 삶의 형태가 좀 각박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프토코스(ptōchos)라는 말은 웅크리고 앉아 굽실거리는 자라는 뜻을 내포하며, ‘거지(a beggar)"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프토코스는 페네스와는 달리 완벽한 무산자(無産者)이며, 영락한 자이며, 무소유자이며, 구걸하며 떠도는 홈리스인 것이다. 페네스는 신격화되어도 프토코스는 신격화되지 않는다. 예수가 여기 축복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가난한 자가 아니며 영락한 자이며, 빈곤이 아니라 구걸의 수준인 것이다(J. D.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270~4).

 

그러나 여기 도마복음의 맥락은 마태(심령이 가난한 자), 누가(물질적으로 영락한 자)의 맥락과는 또 다르다. 도마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바로 42에서 말한 방랑하는 자이다. ‘영락한 자인 동시에 완벽한 무소유의 실천자인 동시에 스스로 버린 자이다. 그렇게 스스로 버린 자의 내면에는 천국은 항상 현재형으로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바로 다음 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그토록 궁금했던 사해를 바라보다. 사해는 고립된 내륙의 호수인데도 바다처럼 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면이 일반 바다보다 392m나 낮다는 것이다. 길이가 75. 폭이 15. 염도가 30%나 되며 일반 바다보다 10배가 짜다. 브로민·마그네슘·아이오다인 등 고체성분이 33%나 된다. 들어가면 몸이 둥둥 뜨고 관절염·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호수 주변 공기도 산소가 10%나 더 많고 그 물은 청정하기 그지없다. 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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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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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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