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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1장 - 새 세상은 이미 와있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51장 - 새 세상은 이미 와있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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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새 세상은 이미 와있다

 

 

51

1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여쭈어 가로되, “언제 죽은 자의 안식이 이루어지리이까? 그리고 언제 새 세상이 오리이까?” 2그가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1His followers said to him, “When will the rest for the dead take place, and when will the new world come?” 2He said to them, “What you look for has come, but you do not know it.”

 

 

본 장도 본문의 뜻만으로도 이미 그 본의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여기 예수 도반들의 질문 중에서 죽은 자의 안식(the rest for the dead)’이라는 개념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죽은 자의 안식부활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파편은 마치 후대의 초대교회 종말론자들에 대한 비판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예수시대에도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팽배되어 있었다. 그것은 제2성전시대(the time of the Second Temple)로부터 매우 보편화된 유대교 신앙의 형태였으며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신앙하였다. ‘죽은 자의 안식새 세상의 대망에 관한 질문이 여기 도반들에 의하여 예수에게 제기되었다고 해서 어색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시대에 유대인 제자들에 의하여 제기될 수 있는 매우 흔한 질문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자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50에서 언급하였듯이 착오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안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며, 그것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답될 가치가 없다. 도마복음 제1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라고 말하였으므로, 예수에게서 이란 죽음이전에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추구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하는 생명의 현존의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삶, 그 빛의 생명은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대답은 명료하다: “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도마에 있어서는 메시아 대망사상은 부정되는 것이다. 나라는 우리의 현존에 내재할 뿐이다.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5:24~25)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그 때가 오고 있나니, 지금이 바로 그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불트만케리그마와 신화(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아포칼립틱한 종말론의 모든 흔적을 말끔히 제거하였다. 최후의 심판은 더 이상 임박한 우주적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예수의 오심과 그에 대한 신앙을 호소하심 속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버렸다. 외면적으로는 모든 것은 예전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믿는 자의 세계와의 관계는 래디칼하게 변화한 것이다.

 

 

불트만의 말대로 요한은 종말의 현재화를 말한다. 그러나 요한과 도마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도마의 예수에게는 현재화시킬 종말이라는 건덕지가 근원적으로 부재하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지금 여기에 이미 와있다는 현존적 사실에 대한 자각만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다(Th.3). 본 장의 테마는 11과도 관련된다.

 

 

() 비블로스 유적지. 바알라트 그발 신전(Temple of Baalat Gebal: 바알라트는 바알의 부인)과 로마 원형극장 등이 보인다.

(아래) 비블로스(Byblos)는 베이루트 북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항구인데 인류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BC 5000년경부터 고문명 이 정착하였고 제3 밀레니움 중반부터 페니키아문명의 한 중심이 되었다. 그 뒤로 아모리인, 힉소스인, 이집트인, 앗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의 지배와 쟁탈의 대상이 되었고, 알렉산더 대왕 때 두로와는 달리 자진해서 헬라제국에 복속하였다. 비블로스는 성서에 그발(Gebal)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13:5), 그발이야말로 옛 지명이다. 그발은 산()을 의미한다. 필로(Philo)는 그발이 페니키아 도시중에서 최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BC1200년경부터 희랍인들이 파피루스 교역을 이곳에서 하면서 파피루스의 순화된 발음인 비블로스라는 이름을 이 도시국가에 부여한 것이다. ‘바이블’(Bible, 성경)이라는 단어도 이 도시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여기서 백향목을 가지고 갔고 대신 파피루스와 금과 린넨을 주었다. 사진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와 관련된 유명한 우물이다. 이시스가 오시리스의 시체가 든 관을 찾기 위하여 비블로스로 왔다. 나일강에서 떠내려온 관이 비블로스에까지 온다는 것은 당시 양 문명간의 활발했던 교역을 상징하고 있다. 이시스가 이 우물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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