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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공손추장구 하 - 14. 떠나려는 자 녹봉을 받지 마라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공손추장구 하 - 14. 떠나려는 자 녹봉을 받지 마라

건방진방랑자 2022. 12. 16.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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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떠나려는 자 녹봉을 받지 마라

 

 

2b-14. 맹자께서 제나라를 떠나 휴() 지금 등현(滕縣) 북쪽 15, 맹자 집에서 약 100리 지역에 머무르실 때였다. 제자 공손추가 물었다: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봉록을 받지 않는 것이 고례(古禮)에 속하는 것입니까?”
2b-14. 孟子去齊, 居休. 公孫丑問曰: “仕而不受祿, 古之道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숭(, 미상)에서 왕을 만난 적이 있다. 물러난 후에 나는 제나라를 떠날 의지를 굳혔다. 제나 라를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 결심을 변치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봉록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제나라는 전쟁에 휘말려 다사다난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사직원을 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 상태로 계속 제나라에 체재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지만, 제나라에 그런 상태로 오래 머무르는 것은 내 본뜻은 아니었다. 봉록을 받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 “非也. 於崇, 吾得見王. 退而有去志, 不欲變, 故不受也. 繼而有師命, 不可以請. 久於齊, 非我志也.”

 

여태까지 전개되어온 긴박한 논의와는 좀 다른 맥락에서 기록된 제나라 체재(滯在)에 관한 회고담이지만, 사태의 전체적 흐름의 배면에 깔려있었던 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맥락에서 공손을 마무리 짓는 프라그먼트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편집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나라가 처음에 명분을 가지고 연나라를 칠 때에는 경()으로서 그 사태를 찬동했지만, 제나라가 약탈자로서 변모하자 맹자는 그러한 비도덕성을 용서할 수 없었다. 여기 ()’ 땅이라는 곳은 아 제나라와 연나라 사이에 있는 어느 지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문제로서 제선왕과 야전텐트에서 회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선왕이 간곡한 맹자의 청을 수용하지 않자, 그때 이미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전쟁통에 경의 지위를 반납하지는 못했지만, 맹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덕적 방책은 봉록을 받지 않는 결단이었다. 이러한 결단은 얼마나 맹자가 실존적 도덕성을 구비하고 있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이것은 마치 헨리 데이비드 써러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가 미국정부가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멕시코에 대하여 제국주의적 전쟁을 일삼자 시민불복 종의 권리를 주창하고 세금을 안 낸 사건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연나라에 대하여 제국주의적 전쟁을 일삼는 제나라의 돈으로써 자신의 사적 안락을 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맹자의 마지막 말, ‘제나라에 오래 머무른 것은 나의 뜻이 아니었다[久於齊, 非我志也].’라는 이 한마디는 앞에서 말한 제선왕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모순ㆍ상충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미 떠나기로 2년 전에 결심한 상태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제나라를 바로잡아 왕도를 실현해보고 싶었던 맹자의 삶은 이율배반적인 실존적 내면의 고투였을 것이다. 그 고투를 도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경의 지위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봉록을 받지 않은 맹자의 결벽성은 만인의 사표가 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제선왕이 자기 두루마기자락을 붙잡아 주기를 바랬던 맹자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대인의 우환과 눈물을 읽을 수 있으며 그간 진행되어온 사태들에 대한 확연한 통찰을 얻게 된다. 제나라 여정의 마지막 장면으로서 여운이 남는 위대한 프라그먼트라 할 것이다.

 

 

 

 

인용

목차 / 맹자

전문 / 본문

중용 강의

논어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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