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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 손자병법, 제10편 지형(地形) 본문

고전/손자병법

임용한 - 손자병법, 제10편 지형(地形)

건방진방랑자 2025. 5. 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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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형(地形)

 

 

손자는 다양한 지세를 지형이라는 범주로 나누고, 그에 따른 용병법을 논한다. 지형은 육상지형이 중심이다. 다만 여기서도 편의 제목과 맞지 않는, 패주하는 군대의 여섯 가지 유형이라는 내용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손자의 심술이라기보다는 경직된 사고를 우려하는 손자의 끝없는염려와 배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 여섯 가지 지형

 

지형(地形)에는 통형(通形괘형(挂形지형(支形애형(隘形험형(險形원형(遠形)이 있다.

孫子曰: 地形有通者, 有挂者, 有支者, 有隘者, 有險者, 有遠者.

 

통형은 아군이 갈 수 있고 적군도 올 수 있는 지형이다. 통형에서는 높고 양지 바른 곳을 선점하고, 식량 보급로를 확보한 뒤 싸우는 게 유리하다.

我可以往, 彼可以來, 曰通. 通形者, 先居高陽, 利糧道以戰, 則利.

 

괘형은 가기는 쉬우나 돌아오기가 어려운 지형이다. 지형에서는 적이 아직 방비가 없을 때 아군이 나아가서 싸우면 승리한다. 적이 대비하고 있을 때 나아가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오기 어려워서 불리하다.

可以往, 難以返, 曰挂. 挂形者, 敵無備, 出而勝之, 敵若有備, 出而不勝, 難以返, 不利.

 

지형은 아군이 가서 싸워도 불리하고 적이 와서 싸워도 불리한 지형이다. 지형에서는 적이 아군에게 유리한 듯 유인해도 가지 말아야 한다.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서 적이 반쯤 쫓아 나오게 한 뒤에 공격하면 유리하다.

我出而不利, 彼出而不利, 曰支. 支形者, 敵雖利我, 我無出也, 引而去之, 令敵半出而擊之利.

 

애형에서 싸울 때는 아군이 먼저 점거하고, 애로의 방어를 충실히 해서 적의 공격을 대비한다. 만약 적이 먼저 점거했을 경우에는 적이 수비지점을 완전히 점거했으면 공격하지 말고, 수비지점에 병력을 완전히 투입하지 못했으면 공격한다.

隘形者, 我先居之, 必盈之以待敵. 若敵先居之, 盈而勿從, 不盈而從之.

 

험형에서 싸울 때는 아군이 먼저 점거한 후 반드시 높고 양지 바른 곳에 주둔해서 대적한다. 만약 적이 먼저 점거했으면 공격하지 말고 군대를 인솔해서 떠나야 한다.

險形者, 我先居之, 必居高陽以待敵; 若敵先居之, 引而去之, 勿從也.

 

원형에서는 양군의 세력이 비슷하면 도전하기 어렵고, 싸워도 불리하다.

遠形者, 勢均, 難以挑戰, 戰而不利.

 

이 여섯 가지는 지리(地利)의 법치이다. 장수 된 자라면 신중하게 고찰해야만 한다.

凡此六者, 地之道也, 將之至任, 不可不察也.

 

손자는 10편에서 지형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특히 지형별로 군대가 지나는 통로, 즉 길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길이 전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지형의 성격이나 형태에 따라 여섯 가지로 나눴는데, 그 중 통형·괘형·지형은 지형의 특징을 설명했지만, 애형·험형·원형에 관해서는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앞의 세 지형이 성격에 의한 구분이라면 뒤의 세 지형은 형태에 의한 구분이어서 추가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 지형을 볼 때 이 여섯 가지 기준이 정확히 적용되지 않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통형 : 가기도 쉽고 오기도 쉽다

 

로마군은 도로를 건설하고, 다리를 놓는 공학적 능력에서 세계 최고의 군대였다. 여기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 도로는 로마군이 사방으로 확장하기도 쉽게 했지만, 반대로 적이 로마로 진격해오기도 쉽게 만들었다.

 

이건 로마만의 딜레마가 아니라 모든 국가의 딜레마였다. 그렇다고 도로를 파괴할 수도 없다. 손자는 도로를 파괴하는 대신 도로 이용에서 우위를 점하라고 한다. 도로 주변에 있는 언덕이나 골짜기 등 지형을 선점하고 식량 수송로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선진 군대의 장점이 조직력과 행정력이다.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다면 정찰대를 활용해 지도를 확보하고 군수물자 수송망에 우수한 행정관료를 투입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구데리안이든 패튼이든 전차 군단을 내세워 전격전을 감행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도로였다. 두 장군 모두 도로 위로 전차를 달리게 하면서 시간 싸움에 승부를 걸었다. 도로의 장점이 통행의 편리라면 승부의 추는 통행에 걸리는 시간과 도로를 통해 공급하는 병력 및 물자의 양이었다.

 

이 개념은 이미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 각국 지휘관들이 깨달은 진리지

, 이런 개념을 전차에 적용하는 방법이 관건이었다. 독일군은 보급 시간을 줄이기 위해 SUV(sport utility vehicle, 스포츠유틸리티 차량)의 시조 격인 지프에서 볼 수 있는 사각형의 철제 기름통을 고안해냈다. 패튼은 달리면서 급유하는 방식을 발굴하고, 보병을 전차에 태워 달리게 했다.

 

 

괘형 : 가기는 쉬우나 돌아오기는 어렵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이던 조선군 진영에서는 수비만 할 것이 아니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쟁을 전혀 모르고 스스로 나가 싸울 일도 없는 문신들의 주장이었다. 무신들은 반대했다. 후금군의 수준을 볼 때 쉽게 기습당할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무신들에게 겁쟁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결국 여론에 밀려 성벽 너머로 나가서 적을 기습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물론 이 기습은 답답한 실패로 끝났다. 남한산성은 상당히 가파른 비탈 위에 세워져 있다. 성벽을 넘어 공격하기는 쉽지만 후퇴하려면 가파른 비탈을 기어올라야 한다. 기습에 실패한 조선군은 성으로 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전멸하고 말았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작전을 지시한 문관들은 장군들이 지휘를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다시 책임을 전가했다.

 

비탈뿐 아니라 좁은 도로도 괘형이 될 수 있다. 똑같은 도로라도 진격할 때는 주도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부대의 진행 순서와 시간을 조절해서 순조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퇴각하게 되어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몰리면 돌아가기 힘든 험로로 변한다. 괘형에서는 퇴로에 있는 적을 공격할 때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따라서 적을 유인해서 퇴로에 몰아넣는 것이 관건이다.

 

 

지형 : 아군이 불리하면 적도 불리하다

 

전쟁사에서 아군도 불리하고 적도 불리한 지형에서 벌인 두 가지 전투가 있다. 연합군과 일본군이 격돌한 남태평양과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정글지대, 그리고 미해병대와 중공군이 혈전을 벌인 개마고원이다. 지형에서 벌이는 전투는 최악의 난전이 되기 쉽고, 양측이 모두 처참한 손실을 입는다. 그러나 지형에 관해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전투를 벌이기 곤란한 지형이라고 할 때는 숨은 전제가 있다. 정상적인 편제를 갖춘 대규모 부대가 진입하기 어렵고, 보급선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이 전제를 수정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태평양전쟁과 영국-버마 전쟁, 개마고원 전투에서 미군, 영국군, 일본군과 중공군은 각각 새로운 시각으로 지형에 접근했고,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개마고원으로 통하는 도로는 일제 강점기에 닦은 1~2차선 규모의 산악도로로 연결되었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도로는 양쪽 모두 가파른 비탈이거나 최소한 한쪽은 비탈이었다. 도로가 좁고 시야는 막혀서 사방이 매복 공격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이 지형에서 중요한 점을 포착한다. 이런 산악지대는 대규모 정규군이나 차량의 신속한 진입은 어렵지만, 도보로 산을 타면 골짜기와 능선을 이용해 어디든 갈 수 있다. 악한 지형일수록 관측과 경계도 어렵기 때문이다. 중공군 병사들은 은폐·엄폐술과 강인한 인내심, 믿기 힘든 복종심을 발휘해 영하의 산하로 들어가 미군에게 전혀 탐지되지 않고 산속에 포진했다. 도보 이동으로 인한 중장비와 보급의 부족은 기습적인 포위 공격과 인해 전술로 대체했다. 중공군은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보급 물자를 산길과 도보로 수송할 수도 있다는 역발상으로 지형 산지를 통형으로 바꾸었다.

 

정글전도 이동과 보급이 곤란하고 경계와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과달카날·뉴기니 전투에서 일본군은 개인 화기와 식량은 물론 포탄까지 짊어지고 야포를 끌면서 정글로 들어섰다. 비가 오면 정글은 진흙탕이 되어 잠잘 곳은 물론이고 앉아서 쉴 곳도 없어진다. 그리고 정글은 거의 매일 비가 온다. 믿기지 않지만 정글에서 이동 속도는 정예병이라도 하루에 1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일본군은 도보 진격으로 이동과 보급의 곤란을 극복하고, 경계와 방어가 불가능한 이점을 역이용했다. 일본군은 초인적인 능력으로 정글은 극복했지만 전투까지 이기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지형을 극복했다기보다는 필사적으로 도전하다가 무너졌다고 표현할 수 있다. 다만 지형의 장점을 간파하고 이용하려 시도했다는 점만은 인정해줄 만하다.

 

미군과 영국군도 개마고원과 버마에서 동양 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형(支形)의 한계를 극복했다. 미 해병대는 공중 지원이 없었다면 보급이 끊겨 개마고원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수송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공중 공격도 지상의 지형에 구애받지 않았다. 손자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술의 발달이 지형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

 

 

애형, 험형, 원형

 

앞서 말했듯이 애형, 험형, 원형의 구조에 관해 손자는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셋의 설명이 별도로 없는 탓도 있지만 실제 지형에는 손자가 말한 여섯 가지 기준을 적용하기가 모호한 곳이 많다. 예를 들어 개마고원 지대는 지형일 수도 있지만 애형이나 험형으로 볼 수도 있다. 범주에 따라 지형 안에 애형과 험형이 존재하기도 한다. 손자가이렇게 지형을 분류했을 때는 현대의 개념보다는 좁은 범위로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의 전쟁은 전투가 벌어지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좁았다. 주변에 10만명 이상의 병력이 포진해 있다고 해도 기동력과 수송력이 약해서 몇 개의 주요 포인트에서만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손자가 구상했던 전투 범위까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고, 거기에 큰 의미도 없다. 현대전의 전장 범주는 손자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원형의 경우 오늘날의 전쟁에서 손자가 말한 원형을 정확하게 물리적 거리로 생각하기는 힘들다. 양국 군대가 똑같이 50로미터를 떨어져 있다 해도 한쪽은 지상군 전력만 보유했고 다른 쪽은 공정부대(공수 착륙이나 공중 투하로 전투지역이나 적 후방에 투입하는 특수부대)를 보유했다면 양군의 거리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이 된다. 따라서 애형, 험형, 원형에 관해서는 별도의 구체적 고찰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2. 패배하는 군대

 

패배하는 군대에는 주병(走兵이병(弛兵함병(陷兵붕병(崩兵난병(亂兵배병(北兵)이 있다. 여섯 가지 군대는 하늘의 재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장수의 잘못에서 생기는 것이다.

故兵有走者, 有弛者, 有陷者, 有崩者, 有亂者, 有北者. 凡此六者, 非天之災, 將之過也.

 

양측의 전투력이 서로 비슷한데 1의 병력으로 10을 공격하는 것을 주병이라고 한다.

夫勢均, 以一擊十曰走.

 

사병들은 강한 장교들이 약한 것을 이병이라고 한다.

卒强吏弱曰弛.

 

장교들은 강한 데 사병들이 약한 것이 함병이다. 고위 장교가 화를 내고 장군의 명령에 불복해서 적과 조우하면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분노하며 싸우게 된다.

吏强卒弱曰陷. 大吏怒而不服, 遇敵懟而自戰,

 

장수가 자신의 능력을 모르는 군대를 붕병이라고 한다.

將不知其能曰崩.

 

장수가 나약해 위엄이 없고 지시가 명확하지 못하며, 장교와 병사 간에 질서가 없고 진의 병력 배치가 제멋대로인 군대를 난병이라고 한다.

將弱不嚴, 敎道不明, 吏卒無常, 陳兵縱橫曰亂.

 

장수가 적세를 정확히 가하지 못하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과 싸우며 약한 부대로 강한 부대를 치고, 정예부대를 선발하지 못하는 군대가 배병이다다소 모호한 개념의 배은 임무를 감당할 역량이 안 되는 군대를 말한다고 본다. 붕병이 지휘관의 역량 부족이라면 배병은 부대 전체의 역량 부족이다..

將不能料敵, 以少合衆, 以弱擊强, 兵無選鋒曰北.

 

이 여섯 가지는 패배로 가는 길이다. 장수된 자라면 신중하게 고찰해야만 한다.

凡此六者, 敗之道也, 將之至任, 不可不察也.

 

손자는 패배하는 군대의 유형을 여섯 가지로 나눠 소개함으로써 이를 피할 방법을 알려준다. 특히 이 여섯 가지 패배하는 유형이 장수의 잘못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해 잘못된 리더십을 경고했다.

 

흔히 리더십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다. 리더십을 공부하려 들면 너무 다양한 성공·실패 사례 때문에 혼동을 겪기 쉽다. 머리로 배운 것을 실제 자신에게 적용하기도 만만치 않다. 사례의 겉모습만 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실패 유형을 보고 리더십의 반면교사로 삼아보기를 바란다.

 

 

주병 : 전투 포기자

 

주병은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나는 군대다. 10분의 1의 전력으로 10배나 되는 적에게 무모한 공격을 하니 병사들이 달아난다. 이 말은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된 군대를 말한다.

 

급하게 농민을 끌어모아 훈련도 전혀 되지 않고, 지휘관에 대한 신뢰도 없는 군대가 잘 무장한 군대와 직면했을 때, 지휘관이 공격을 명령한다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날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에 급하게 마련한 민병대라도 잘 싸우거나 와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휘관이 신뢰를 얻고, 주병이 되지 않도록 전술적으로 잘 관리하는 것이 방법이다.

 

임진왜란 발발하자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퇴역 관리나 유생들이 주도한 의병 중에는 격문을 돌리고, 응모하는 숫자에 연연하는 부대도 많았다. 이들은 거의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반면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승병장 영규(靈圭, ?~1592)의 의병부대는 소수라도 싸울 능력과 의지가 있는 병사를 모았다. 명분에 매이지 않고 싸우기 쉬운 상대를 신중하게 골라 공격하면서 전술을 익히고, 병력을 조금씩 늘려나갔다. 이들은 성공했고 공적을 남겼다. 여차하면 주병이 될 수 있는 부대를 주병이 되지 않도록 전술적으로 운용한 덕분이다.

 

 

이병 : 리더십이 사라진 군대

 

이병은 사병은 강한데, 장교가 약한 군대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정 러시아군이다. 당시 러시아 귀족 장교들은 편하고 좋은 보직을 차지하고 술과 파티로 세월을 보냈다. 귀족들을 예우하기 위해 장교로 임명하다 보니 고위 장교들이 너무 많아져서 장교단도 상부와 하부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놀고먹기만 하는 장교들을 보고 저들이 하는 유일한 두뇌 활동은 카드 놀이뿐이라는 말도 돌았다. 러시아에도 뛰어나고 명석한 전술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술꾼들에게 밀려났다. 어떤 장교들은 후방에 눌러앉아 전선에 나와보지도 않았다.

 

러시아 병사들은 강인하고 충성도가 높았다. 그들이 7년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에서 승패와 상관없이 무수히 살육당한 것은 장교들이 그들을 제대로 조직하고 운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교가 약하다는 것은 조직을 운영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리더가 없고, 그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구슬을 꿰는 실이 장교다.

 

 

함병 : 이상은 높지만 실행력 없는 부대

 

장교들은 강한데 사병들이 약한 경우도 있다. 손자는 이를 함병이라고 했다. 장교라는 골격이 있고, 좋은 전술을 고안해도 병사들이 받쳐주지 못하면 굳지 않은 시멘트처럼 골조만 남기고 꺼져버린다.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준비된 군대이고 소속 장교들이 우수하다면 사병들이 우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패전 후 생존한 장교들이 급조해서 병력을 모았다거나 군주가 무능할 경우, 또는 국가 재정이 약해서 사전에 군대를 양성하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직전의 미8군이 비슷한 경우였다. 기간장교와 부사관 중에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지만, 일본에서 편하게 거주하던 병사들은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였다. 방아쇠만 당길 줄 알았지, 총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병사가 태반이었다. 대대급 이상의 전술 기동 훈련도 전혀 하지 않았다.

 

군사고문단으로 해외에 파견된 군인들이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선진 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병사들을 훈련시킬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선진국에서 교육을 받았어도 껍데기만 배우고 무조건 모방만 해서 현지 적응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교에게는 현지 상황에서 최선의 전력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과 지혜가 부족하고, 병사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바로 함병이다. 이런 군대는 헛된 노력만 하다가 누적된 불신 때문에 무너진다.

 

함병은 전쟁에서 자주 발생한다. 오랜 전투와 패전, 후퇴로 부대가 균형을 잃는 경우다. 장교와 부사관이 전사하고, 용감한 병사가 줄어들면 부대는 즉시 함병이 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이 소련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오랜 전투 경험을 지닌 고참 사단보다 새로 편성한 부대가 먼저 함병이 되었다. 공황에 빠지고, 명령 체계가 듣지 않고, 제멋대로 평원을 방황하는 병사도 있었다.

 

이를 해결한 방법은 재편이었다. 노련한 장교와 부사관이 있는 조직을 근간으로 재편하자 이런 행동들이 즉시 멈췄다.

 

 

붕병 : 리더가 무능하면 모든 것을 망친다

 

붕병은 장수가 자신의 무능을 모르는 군대다. 감성이 앞서고 지성이 부족해서 눈앞의 현실만 보는 무능한 지휘관이 전황이나 적정도 파악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싸우다가 병사를 전멸시키는 사례는 전쟁사에 비일비재하다.

 

이런 지휘관을 만난 군대는 겁이 많고 무능한 지휘관을 만난 경우보다 더 비참한 패배를 겪는다. 겁 많은 지휘관은 최소한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1839~1876) 중령이 이끄는 제7기병대는 리틀 빅혼 전투에서 처참하게 전멸했다. 커스터의 두 동생과 처남도 함께 전사해서 이 전투로 커스터 일가가 몰살당했다. 커스터가 무능한 장교였느냐 하는 평가에 관해서는 그렇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남북전쟁 당시에 커스터는 남군의 전설이었던 젭 스튜어트(James Ewell Brown stuart, 1833~1864)의 기병대를 격파해서 영웅이 되었다. 많은 전투에서 무모한 공격으로 수많은 부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지휘관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무모한 작태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성공이 운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전과가 운으로만 이룰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다.

 

어쨌든 성공하고 승리한 군대에 속해 있으면서 커스터는 자신의 장점과 스타일에 맹목적인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리틀 빅혼에서 수족과 샤이엔족 연합군과 대적할 때, 커스터는 상대를 완전히 얕보았고, 적에 관한 정보, 지형에 관한 이해는 절대 부족했다.

 

커스터는 인디언의 수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거듭 무시하고 지원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출정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인디언의 병력은 커스터 부대보다 5배 이상 많았다. 무장도 훌륭하게 갖추었다.

 

전장의 지형은 협곡과 강으로 분리되어 협공이 어려웠다. 커스터는 공격 부대를 세 개 중대로 나누고 자신은 한 개 중대만을 이끌고 진격했다. 자신이 인디언 마을의 뒤로 돌아가 습격하면서 퇴로를 차단하면 나머지 두 개 중대가 정면으로 쳐들어가는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전술이었다. 그러나 지형 탓으로 중대 간에 협력이 될 수 없었고, 인디언 전사들은 동시에 양방향으로 싸워서 세 개 중대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결과적으로 리틀 빅혼에서 제7기병대는 붕병이 되었다. 적진 깊이 들어간 커스터의 중대는 퇴로를 찾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서 싸우다 전멸했다. 다른 두 개 중대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난병 : 혼란한 군대

 

난병은 장수가 나약해 위엄이 없고 지시가 명확하지 못하며, 장교와 병사 간에 질서가 없고 진의 병력 배치가 제멋대로인 군대를 말한다. 한마디로 혼란한 군대다.

 

19409, 현재의 리비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로, 영국과 인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여러 나라의 연합군이 이집트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초반 기세는 있지만 영국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12월에 영연방 군대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자 이탈리아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집트에서 리비아 서쪽 끝까지 광활한 영토를 단숨에 내주었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웃지 못할 일화를 많이 남겼다. 한 영국군 대가 이탈리아군 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관총 사수가 딱 두 발을 발사하자 이탈리아군 진지에서 백기가 올라왔다. 한 장교가 백기를 발견하고 소리치자 대대장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나무랐다.

 

영국군이 기지로 진입하자 이탈리아군 준장이 500명의 부하와 함께 차렷 자세로 정렬하고 그들을 맞이했다. 이탈리아 장군이 영국군 중령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우리는 최후의 총탄까지 다 소모해버렸습니다.” 중령이 옆을 돌아보니 기지에는 탄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탈리아군 장교들은 의욕이 없을 뿐만 아니라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 이탈리아군과 함께 전투를 치러본 로멜은 포병 장교가 그저 포를 쏠 줄만 알지, 보병에 대한 전투 지원 등 포병 전술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이탈리아군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로마 군단의 후예답게 훈련을 제대로 받고 단결하면 금세 훌륭한 군대로 변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이탈리아군이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기를 그대로 쓰는 등 장비가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장교와 병사들은 무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883~1945) 정권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으며, 전쟁의 명분에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가 영국을 상대로 싸울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교들이 무능해서 신뢰감이 없으니 병사들도 의욕이 없었다. 한 독일군 장교는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에 포위되어 항복하려는 것을 보고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는커녕 그대로 영국군 진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난병의 모습이다.

 

 

배병 : 준비되지 않은 조직

 

장수가 적세를 정확히 가능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과 싸우고 약한 부대로 강한 부대를 치며, 정예부대를 선발하지 못하는 군대를 배병이라고 한다.

 

1592임진왜란으로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경상도 병력이 와해되자 조정에서는 아직 건재한 충청·전라도에 병력을 소집해서 한양을 수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5월에 삼도 근왕병이 한양 수복 작전을 개시했다. 대외적으로 10만 명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실제 병력은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병력을 나누어 다른 길로 올라왔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조선은 상비군 병력이 극히 적었다. 대부분이 예비군과 비슷한 방식으로 동원해서 편제하게 되어 있었고 그 병력은 각 고을 수령이 통제했다. 군현에서 징발한 병력은 도 단위로 모였다. 도의 총사령관은 문관인 관찰사와 무관인 병마사가 담당했다. 휘하 연대장·대대장·중대장에 해당하는 간부는 지방 수령들이 맡았다. 문제는 문관과 무관이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작은 전투일 때는 문관이 무관 수령에게 병력을 양도하거나 지원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후 첫 전면전이었다. 모든 수령이 각 고을의 병력을 동원해 참전해야 했다. 심지어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기동 훈련을 해본 적도 없었고, 삼도의 병력을 모으니 총사령관이 없어서 세 명의 관찰사와 세 명의 병마사가 운영하는 체제였다. 충청도 관찰사였던 윤선각(尹先覺, 1543~1601)우리는 백면서생이라 진을 치는 법, 도로를 선택하고 나아가는 법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비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군대와 조직력으로 왕명에 복종해서 일본군을 상대하려 한 용기가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전라도 선봉장에는 백광언(白光彦, 1554~1592)이 임명되었는데, 그저 그가 가장 뛰어난 장수라고 소문이 난 까닭이었다. 백광언은 광교산 부근에서 무장이 빈약한 200명가량의 일본군 사역부대를 격파했다. 경상도 정찰대는 작은 일본군 초소 하나를 공격해서 하락했다. 사기가 조금 올랐지만 조선군의 접근을 포착한 일본군이 반격에 나섰다.

 

일본군 정예 무사들의 공격에 백광언이 전사하고, 선발대가 무너지자 형사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조선군 진지는 이미 위치를 파악이 끝난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당시에 권율(權慄, 1537~1599)과 황진(黃進, 1550~1593) 같이 나중에 조선군의 간성(干城)이 되는 장수들이 수령으로 참전하고 있었지만, 아직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일본군 병력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군은 적의 군세를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치는 배병의 모습이었다. 잘 훈련된 군대와 싸울 때일수록 중심축이 되어 전황을 개척할 정예군이 필요한데, 삼도 근왕병은 그저 지역 연합군이어서 그런 사전 조치도 전혀 없었다. 정예군 선발을 하지 못했으니 숨어 있는 뛰어난 자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광교산 전투는 배병의 전형이다. 조선군은 전면전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권율과 황진이 만났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병력을 합쳐 함께 훈련시켰다. 이 병력이 나중에 이치 전투를 벌여서 왜군이 호남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나중에 권율은 행주대첩보다 이치 전투에서의 승리가 더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광교산 전투와 이치 전투는 배병이 왜 발생하는지, 배병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패배하는 군대의 결론

 

손자가 패배하는 군대의 유형을 말한 것은 단지 이런 군대는 반드시 패한다고 지적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군대는 항상 변하며, 상대적인 특징이 있다. 약한 군대와 싸울 때는 정예병이던 군대도 강한 군대와 만나거나 리더십, 전술, 무기 등이 열세하면 주병이나 난병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패배하던 군대가 정예군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손자가 제기한 기준 요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전술을 택하면 꼭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으며, 병사들이 리더에 대한 신뢰를 잃고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리더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쌓이면 약하던 군대도 단련이 되어 강군으로 변한다. 미국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의 군대는 민병대 수준이었다. 워싱턴은 정면 대결을 피하며 계속 도망만 쳤다. 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추운 계곡까지 들어간 그는 겨울이라 전쟁이 잠시 중지된 틈을 타 병사들을 조련했다. 계곡을 나온 미군은 정예병이 되어 있었고 영국군과 대등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대장정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마오쩌둥 집권 이전에 공산군은 국민당과 정면 대결을 벌이다가 여러 차례 큰 패배를 맛보았다. 마오쩌둥이 정면 대결을 피하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하면서 공산군은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고, 결국은 세력을 확보해 국민당을 패주시켰다.

 

 

 

 

3. 지형 파악

 

지형은 용병을 지원하는 보조 수단이다. 적의 세력을 가늠해서 승리를 얻는 데, 지형의 험한 것과 좁은 것, 원근을 계산하는 것은 명장의 도리다. 이 도리를 알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모르고 싸우면 반드시 패배한다.

夫地形者, 兵之助也. 料敵制勝, 計險厄遠近, 上將之道也. 知此而用戰者必勝; 不知此而用戰者必敗.

 

그러므로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는 상황이면 군주가 싸우지 말라고 해도 반드시 싸운다. 싸워서 승리하지 못할 상황이면 군주가 싸우라고 해도 싸우지 않는다. 고로 진격할 때는 명성을 구하지 않고. 퇴각할 때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로지 병사와 국민을 보호하고. 군주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장수가 나라의 보배다.

故戰道必勝, 主曰無戰, 必戰可也; 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 故進不求名, 退不避罪, 惟民是保, 而利合於主, 國之寶也.

 

손자는 장군이라면 군주의 명령에 불복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군주를 향해서는 이런 장군이 진짜 나라의 보배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 말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리더가 얼마나 될까.

 

손자의 이런 강경 발언은 시대 상황도 고려해서 생각해야 한다. 손자의 시대에는 일단 원정을 떠나면 전황을 일일이 보고받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보고받고 지시하려다가는 패배할 것이 뻔했다. 따라서 원정군 사령관에게는 막대한 재량권을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적정에 대한 정보도 소문으로 듣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현지에 가서 확인해야만 그나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싸우지 말자고 결정했어도 현장에 가서 보니 적군의 협상 제안이 거짓이어서 즉시 싸워서 격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보고하고 승인을 받으려면 오가는 데만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현지 지휘관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재량권 위임을 망설이는 군주도 많았을 것이다.

군사적 재량권은 정권 입장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재량권을 주어야만 한다. 전장은 돌발 상황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자가 승리한다

 

 

세종과 세조의 정반대 리더십

 

통치자로서 세종(世宗, 1397~1450)세조(世祖, 1417~1468)를 비교하면, 세종은 치밀하게 모든 가능성과 제도를 검토하고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었다. 반대로 세조는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관료가 새로운 정책에 관한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와 문제점을 나열하면 말을 딱 끊고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네가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라고 단정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관료의 부정적 태도도 하나의 요인이었겠지만, 그것만이 사안의 전부가 아닌데도 세조는 자기 판단대로 밀어붙였다.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데는 세종의 성품이 장점이 된다. 세조는 한두 가지 원칙을 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초기엔 추진력이 있어 보이지만 문제점이 발생하면 구멍은 점점 커졌고 결국 수렁에 빠져 엔진이 꺼졌다. 하지만 전쟁을 할 때는 두 사람의 성품이 반대로 작용했다. 세종은 답사를 통해 지리를 측정하고 현지인에게 물은 후에 완벽한 계획을 수립하려다 보니 중간에 정보가 새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훌륭한 작전을 세워도 실행 과정에서는 반드시 착오가 생긴다. 세종의 리더십은 이런 착오를 해결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떨어진다. 세종의 여진 정벌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원정이었지만 항상 절반의 승리였다.

 

반면에 세조는 지휘관에게 전장을 맡겨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지켰다. 큰 줄기만 잡아주고, 최종적으로는 현지 상황에 맞춰 지휘관이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이유 없이 진군을 두려워하고 지구전으로 일관할 때만 호통을 치며 작전에 개입했다. 덕분에 세조는 여진 정벌에서 세종이 이루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직후 그들을 진압군으로 투입해 여진 국가 수립을 꿈꾸던 건주위(建州衛)명나라 영락제 , 남만주의 건주 지역에 사는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군영. 이후 여진족의 부족장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으며, 건주 좌위와 건주 우위가 새로 생겨남에 따라 건주 삼위가 되었다.의 부락을 습격하고 추장 이만주(李滿住, ?~1467)를 죽였다. 세종 때도 이만주를 목표로 공격한 적이 있지만 그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었다. 세조의 리더십이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손자가 재량권 위임을 강조한 이유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조정에서 권한을 쥐고 있으면 현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통신 수단이 발달해서 위성으로 전쟁 현장의 생중계까지 가능한 지금은 중앙 컨트롤 타워에서 정보를 수집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앞으로 기술 발달로 어떤 세상이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통신수단의 발달과 함께 적의 반응이나 승부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수합하고 고려해야 할 사안도 더 많아졌다. 현장 재량권의 중요성이 아직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우리는 재량권을 주느냐 마느냐, 권한을 확대할까 축소할까를 따지기 전에 기술, 상황, 전투의 종류에 따라 후방에서 판단할 수 있는 내용과 현장에서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해해야 한다. 결국 전술과 작전이란 가장 효과적이고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4. 병사를 자식처럼

 

장수가 병사를 자식처럼 보살피면 병사들이 장수와 함께 깊은 계곡까지 달려갈 수 있다. 장수는 병사를 사랑하는 자식처럼 보아야 한다. 그러면 병사들이 죽음을 함께한다.

視卒如嬰兒, 故可以與之赴深溪; 視卒如愛子, 故可與之俱死.

 

병사를 후하게 대하기만 하면 부릴 수가 없다. 사랑하기만 하면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문란하게 방치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이런 병사들은 제멋대로인 아이들 같으니 군사로 쓸 수가 없다.

厚而不能使, 愛而不能令, 亂而不能治, 譬如驕子, 不可用也.

 

채찍과 당근을 몇 퍼센트 비율로 하는 게 좋을까요?”라는 질문은 우문 중의 우문이다. 리더는 부하를 사랑할 줄도 알고, 처벌하고 훈육할 줄도 알아야 한다. 솔선수범할 줄도 알고, 부하들을 사지로 돌격시킬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랑할 때는 감동을 전해야 하고, 훈육할 때는 감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시의적절하게 잘 시행하고 존경과 헌신을 끌어내는 사람이 훌륭한 리더다.

 

기원전 401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Xenophon)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가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Artaxerxes BC445 또는 BC435~BC358)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에 그리스 용병부대와 함께 참전했다. 키루스는 첫 전투에서 허무하게 전사했지만, 크세노폰은 그가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최고의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책이 세계 최초의 리더십 교본이라는 키로파에디아.

 

크세노폰은 폭력적인 방법과 일방적인 훈육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애제자 아닌가. 하지만 훈육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스파르타로 망명했는데,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교육을 비교하면서 아테네에 결여된 것이 훈육이라고 지적했다.아테네는 교육을 노예에게 맡긴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양육이다. 전쟁이든 사회생활이든 이렇게 자라난 아이가 강인한 인재가 될 수 있겠는가?

 

스파르타는 교사가 교육을 담당한다. 교육의 본질은 훈육이다. 교사에게 훈육의 사명과 권리를 보장한다. 그래서 스파르타인은 절제를 익히고 한 전사가 된다. 다만 크세노폰도 스파르타의 미래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스파르타 역시 풍요한 삶에 빠지더니 교육이 물욕과 나태 앞에 타락했다고 한탄했다.

 

 

 

 

5. 승리의 가능성이 반반인 상황

 

아군이 공격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공격해서는 안 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적이 알지 못하면 승리의 가능성이 반반이다. 아군이 공격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만 적이 알고 아군이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승리의 가능성이 반반이다. 적이 공격해도 되는 상태이고 아군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지형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승리의 가능성은 역시 절반이다.

知吾卒之可以擊, 而不知敵之不可擊, 勝之半也; 知敵之可擊, 而不知吾卒之不可以擊, 勝之半也; 知敵之可擊, 知吾卒之可以擊, 而不知地形之不可以戰, 勝之半也.

 

그러므로 용병을 아는 자는 움직이면 망설이지 않고, 군대를 일으키면 실패하지 않는다. 고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하고 위태하지 않으며 지리와 하늘의 뜻을 알고 싸우면 항상 승리한다고 하는 것이다.

故知兵者, 動而不迷, 擧而不窮. 故曰: 知己知彼, 勝乃不殆; 知地知天, 勝乃可全.

 

손자병법의 이 단락은 번역도 어렵고 뜻도 잘 통하지 않는다. 어떤 전쟁이든 적의 상태와 아군의 상태를 완전히 알기는 어렵다. 이것은 피차간에 마찬가지이기에 반반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가 되려면 이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단락의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독일의 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이다.

 

1941621일 독일군과 동맹군 병사들 400만명이 소련 국경에 집결해 있었다. 3,350대의 전차, 7,000문의 대포, 2,000대의 항공기가 함께 대기 중이었다.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모든 국가의 군대 중에서 훈련이 가장 잘된 군대였다. 반면 소련군의 전투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군 내부에는 아직도 혁명의 후유증과 숙청의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소련군의 유능한 장교들은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의 대숙청으로 대부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있었다. 병사들이 철모나 군화조차도 없을 만큼 보급도 형편없었다. 독일은 소련군이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보았으며, 볼셰비키들이 독일에 협력할 거라고 믿었다. 손자가 말한 전형적인 난병(亂兵)이었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말했다.

 

어떤 경우든 소련은 패배해야만 한다. 소련 군대는 리더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지금이 공격의 적기다. 우리가 문을 걷어차기만 하면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소련 체제는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암호명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결국 무너졌다. 구데리안의 중부 집단군은 개전 닷새 만에 320킬로미터를 진군했다. 2,500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하고 3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이 놓친 것

 

전쟁 후반기에 소련은 뛰어난 조종사도 배출하지만, 개전 초의 공군력은 엉망이었다. 소련 공군은 전투기를 띄우고 내릴 줄만 알았지, 공중전을 벌일 기술이 없었다. 소련 전투기가 대전차를 공격할 때 늘 같은 코스에 같은 각도로만 비행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독일의 전차병들이 하강 코스에 조준했다가 전차포로 전투기를 잡은 적도 있다.

 

승리가 손쉬워 보였지만, 독일에도 불길한 요소가 있었다.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은 점령국에서 트럭을 긁어모았다. 가장 많은 트럭을 제공한 곳은 프랑스의 르노였다. 기갑전의 영웅 구데리안 장군은 프랑스군 트럭의 품질과 내구성에 의구심을 보였다. 이 사안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프랑스는 그 반대로 르노 트럭의 품질이 최고였다고 반박한다.

 

여러 가지 제품이 뒤섞이면 안정성 면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더 불안한 것은 탱크와 항공기가 동원되는 현대전임에도 불구하고 60만 마리의 말이 수송을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규모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소련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어떤 땅인 줄을 모르는구나. 소련의 대지가 너희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독일이 더 불안했던 것은 공격 일정이었다.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폴레옹이 소련 즉, 그 당시의 러시아 영토로 진입했던 날은 624일이었다. 원래는 5월 예정이었지만 폴란드의 수렁과 열악한 도로, 질병, 훈련되지 않은 동맹군의 더딘 행군 때문에 한 달 이상 늦어졌다. 이 한 달이 나폴레옹에게 비극이 되었다. 10월에 겨울이 찾아오자 나폴레옹은 후퇴를 시작했지만 추위로 엄청난 병력을 잃었다. 그들이 일정대로 출발했더라면 사망자는 절반 이상으로 줄었거나 큰 손실 없이 철수했을 수도 있었다.

 

큰소리도 소용없이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거의 같은 날짜에 소련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독일군의 사기는 높았고, 그들은 승리를 자신했다. 많은 장교들이 4주 후에는 모스크바에 도착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독일의 계속된 승리에도 불구하고 소련인들은 강인하게 저항했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독일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Paul Ludwig Ewald von Kleist, 1881~1954) 원수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투사였다. 전투를 거듭하며 그들은 전사로 변했다.”

 

오랜 시간 소련군이 수모를 당한 것은 병사의 자질과 무기 때문이 아니라 무능한 장교들 탓이었다. 숙청된 귀족 장교의 공백은 사명감이 투철하고 능력으로 검증된 신세대 장교들이 재빨리 메웠다. 부족한 실전 기술은 전쟁을 치르며 익혀 나갔다. 독일군이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전격전은 드넓은 소련 땅에서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수송 마차를 끌던 말들은 가슴까지 차는 소련의 진흙 수렁에 빠져 1년 만에 대부분 죽었다. 진격을 계속할수록 보급은 어려워졌고, 마침내 독일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독일군의 전투력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혹독한 소련의 겨울이 찾아왔을 때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공격을 그렇게 연구했으면서도 겨울 피복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직으로 만든 독일군 외투는 소련의 추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일의 실패는 이 구절에서 손자가 언급한 내용에 모두 부합한다. 자신들이 공격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적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몰랐고, 소련의 지형과 기후의 무서움을 몰랐다. 자신들이 전투력은 있지만 보급 능력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고, 소련군이 지금은 엉망이고 혼란스럽지만 전쟁을 치르다 보면 강해질 거라는 점을 몰랐다. 소련이 뛰어난 전술가와 장교, 조종사 등을 양성해낼 저력이 있다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소련 땅에서 독일의 파멸을 낳았고 서부 전선에서도 연합군에게 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전사 및 실종이 310만명, 포로가 330만 명이었다. 이것은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이 입은 피해의 몇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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