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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7장 - 7. 존덕성과 도문학으로 분석한 중국철학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7장 - 7. 존덕성과 도문학으로 분석한 중국철학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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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존덕성과 도문학으로 분석한 중국철학

 

 

尊者, 恭敬奉持之意. 德性者, 吾所受於天之正理. , 由也. , 猶燖溫之溫. 謂故學之矣, 復時習之也. , 加厚也. 尊德性,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也. 道問學,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也. 二者, 修德凝道之大端也. 不以一毫私意自蔽, 不以一毫私欲自累, 涵泳乎其所已知, 敦篤乎其所已能, 此皆存心之屬也.
()이라는 것은 공경하여 받든다는 뜻이요, 덕성(德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정리(正理)’. ‘(, =)’는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심온(燖溫, 음식 같은 것이 식었을 때 다시 데우는 것)이라 할 때의 온()이니, 그것은 옛 것을 다시 배운다는 말이요 그것을 때때로 다시 익힌다는 것을 말한다. ()이라는 것은 더욱 도탑게 한다는 뜻이다. 존덕성(尊德性)은 내재하는 덕성으로서의 그 마음을 보존(存心)하여 도()의 거대한 세계[道體之大]에까지 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도문학(道問學)은 지극한 앎에 이르름으로써 도()의 극미한 세계[道體之細]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여기에서 도체지대(道體之大)와 도체지세(道體之細)로 나눈 것에 주목할 것. 도올 주. 그러므로 이 둘은 덕을 쌓고 도를 닦아나가는 커다란 강령이다. 한 터럭의 사사로움으로써도 스스로 가리울 수 없는 것, 한 터럭의 사사로움으로써도 스스로 구차스럽게 할 수 없는 것, 이미 알고 있는 바를 계속 음미하고 보존해 나가는 것함영호기소기지(涵泳乎其所己知) ‘함영(涵泳)’이란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할 때의 온고(溫故)를 말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올바른 뜻은 뒤에 상술. 도올 주그리고 이미 능한 바를 돈독하게 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모두 존심(存心)’에 속하는 것들이다.
 
析理則不使有毫釐之差, 處事則不使有過不及之謬, 理義則日知其所未知, 節文則日謹其所未謹, 此皆致知之屬也. 蓋非存心無以致知, 而存心者 不可以不致知. 故此五句, 大小相資, 首尾相應, 聖賢所示入德之方, 莫詳於此. 學者宜盡心焉.
그 리()를 분석해 들어감에 있어서는 호리(毫釐, 털끝만큼)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 일에 처할 때는 과불급(過不及)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 뜻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는 알지 못했던 바를 날로 새로 아는 것, 그리고 예를 절도 있게 하는 데[節文]에 있어서는 미처 삼가하지 못했던 바를 날로 삼가는 것, 이러한 것들은 모두 치지(致知)’에 속하는 것들이다. 대저 존심(存心)하지 아니하면 치지(致知)할 수 없는 것이요, 참으로 존심(存心)한다는 것은 또한 치지(致知)로써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섯 구는 매크로한 세계와 마이크로한 세계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시작과 끝이 서로 대응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성현(聖賢)이 덕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한 바가 이보다 상세함이 있겠는가? 무릇 배우는 사람은 여기에 그 마음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본문의 구조를 알아야만 이 주자 주의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다섯 개의 구가 서로 상대되는 한 짝의 개념들을 가지고 병렬되어 있습니다. 송명유학에서 지극히 중요시되는 개념들이죠. ‘존덕성(尊德性)’도문학(道問學)’, ‘치광대(致廣大, 넓고 큰 데 이름)’진정미(盡精微, 정밀하고 미세한 것을 다 함)’, ‘극고명(極高明, 지극히 높고 밝도록 함)’도중용(道中庸, 일상의 비근한 것에 말미암음)’, ‘온고(溫故, 이미 알고 있는 바를 끊임없이 음미하고 반추함)’지신(知新, 새로운 것을 탐구함)’, 그리고 돈후(敦厚, 내재한 덕성을 돈독하게 함)’숭례(崇禮, 예를 높임)’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풍우란과 신원도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인들이 그들의 사상사를 보는 눈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풍우란이란 사람이 쓴 정원육서(貞元六書)라는 책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풍우란은 중국철학을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시킨 사람입니다. 나는 그가 중공 치하에서 최초로 출국을 했을 때 하와이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소위 모택동의 1949년 대륙 석권 이후에 중국의 사상가들은 완전히 맑시즘으로 자기들의 사상을 개조해야만 했었지만, 사실은 중국 근대문명이라는 것은 1930년대 항일투쟁 과정에서 이뤄진 기라성 같은 저술들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6.25 부산 피난 시절에 그 피난 보따리 속에서 가장 위대한 학문적 성과가 나왔다는 말이니까, 우리나라와 중국을 같은 수준에서 놓고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항일 투쟁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지성인들은 그들의 구국에 대한 열망을 학문으로 쏟았던 거죠. 풍우란의 걸작도 이 시기에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람 책 중에 신원도(新原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원도(新原道)라는 말은 딴 뜻이 아니라, 도를 새롭게[] 캐 들어간다[, inquire]라는 뜻이죠한유가 쓴 원도(原道)를 본떠서 중국철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공맹(孔孟), 2장은 양묵(揚墨), 3장은 명가(名家), 4장은 노장(老莊), 5장은 학용(學庸), 6장은 한유(漢儒), 7장은 현학(玄學), 8장은 선종(禪宗), 9장은 도학(道學), 그리고 제10장이 통신(統新)으로 되어 있습니다. ‘통신(統新)’이란 말은 풍우란 자신이 20세기 중국 철학을 새롭게 통합하여 조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을 가지고 중국사상사를 보고 있습니다. ‘중국 사상사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역사다철학적으로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존덕성(尊德性)은 형이상학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고, 도문학(道問學)은 형이하학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尊德性이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한 추구라면, 道問學은 외면적 객관세계에 대한 인간의 앎의 추구입니다.

 

이러한 존덕성(尊德性도문학(道問學)의 개념적 틀 내에서 중국 사상사는 어떤 때는 극고명(極高明)으로 치달았다가 어떤 때는 도중용(道中庸)으로 치달았다 하면서 발란스를 유지하려는 과정을 지속해 왔다는 것이 이 신원도(新原道)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주자가 노불(老佛)을 치고 나올 때, 그의 핵심적 주장은 노불(老佛)사상은 극고명(極高明)한 것만 있지 도중용(道中庸)이 없다. 존덕성(尊德性)만 있지 도문학(道問學)이 없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관념론의 질곡만 있지 진정한 의미의 격물(格物, 사물을 이치를 가지고 궁구함)이 없다. 그러므로 존덕성(尊德性)에 대하여 도문학(道問學)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원도의 결론

 

신원도의 결론인 통신(統新)에서 풍우란은 존덕성을 내성(內聖)’의 세계로, 도문학을 외왕(外王)’의 세계로 보고, 내성(內聖)’외왕(外王)’을 하나로 통합하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신원도(新原道)’라고 부른 것이죠. 그는 당시에 여기에 결정적인 모티브를 준 것이 서양학문이라고 보고, 과거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형학이 들어와서 신유학으로 새로운 통합이 이뤄졌듯이, 지금 서구라파의 학문이 들어와서 통신(統新)’, 새로운 통합이 이뤄질 바로 그 시점에 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원도(新原道)의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다. 중국철학은 이 양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을 통합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尊德性 道問學
致廣大 盡精微
極高明 道中庸
溫故 知新
敦厚 崇禮
至德 至道
存心 致知
內聖 外王
형이상학의 세계 형이하학의 세계
내면세계에 관한 추구 인간의 앎의 추구

풍우란의 중국사상사를 보는 눈 : 新原道

 

 

 

 

풍우란馮友蘭(189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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