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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7장 - 8. 중국철학의 문제점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7장 - 8. 중국철학의 문제점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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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중국철학의 문제점

 

 

도문학(道問學)의 개념을 제대로 정립해야 한다

 

내가 최근에 쓴, 젊은 유학자의 초상의 서문 양명근본의(陽明根本義)를 보면, 풍우란의 세계와 나의 세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서문에서 나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양단(兩端)이 중용(中庸)적으로 포섭되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도문학(道問學)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근원적인 이해를 먼저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야말로 근대 이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장본인이기 때문이죠.

 

지금 여기에서 줄곧 논의되고 있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에서 도문학(道問學)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문학(問學)이라는 것은 묻고 배운다는 거죠? 여기에서 문학(學問)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묻는다는 것은 지신(知新)’, 즉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알기 위해서 묻는 거죠? 묻는다는 것이 곧 학문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에 있는 덕성이라는 것을 주자가 주()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늘로부터 받은 정리(正理)라고 했죠? 이 정리(正理)를 따르는 것이 존덕성(尊德性)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란 교육을 받을 때, 격물치지(格物致知), 도문학(道問學)을 하지 않아도, 존덕성(尊德性)만 해도 내 존재 속에 이미 구비된 리()가 있으니까 최소한의 삶 그 자체는 유지할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내 몸의 자연, 스스로 그러한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들을 보면 전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에 필요한 지혜를 그들의 몸으로부터 획득하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인간은 도문학(道問學), 궁금해서 세계를 자꾸만 알려고 해요. 저 별들이 뭐냐? 도대체 생명의 기원이 무엇이냐? 이 우주는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자꾸만 묻는단 말이죠. 이 묻는다는 것에서 결국 인간의 문명이 나왔고, 이 문명이 바로 외왕(外王)’의 세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중용(道中庸)이라는 말은 결국 도문학(道問學)의 다른 표현이지만, 중용(中庸)의 포괄적 의미와 젊은 유학자의 초상의 서문과 관련하여 중용(中庸)의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겠습니다. 도중용(道中庸)에서의 중용(中庸)은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런 넓은 의미보다는 극고명(極高明)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쓰인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비근하고 범용한 세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도문학(道問學)과 관련하여 그 참뜻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껏 중국 사상사가 간과해 온 대단히 중요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치지(致知)를 등한시하다

 

나는 중용(中庸)을 궁극적으로 역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 또는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로 푼다고 했습니다. 사실 중용(中庸)이란 말에 대하여 중국사상사가 저질러 왔던 최대의 오류요 한계는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인간세의 덕성 또는 삶의 지혜로만 생각했지 사물에 내재한 객관적 법칙으로서의 중용(中庸)을 생각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생물학의 모든 법칙들이, 물리학의 모든 이론들이 다 중용(中庸)입니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모든 대사과정(metabolism)이나, 물리학에서 말하는 모든 역학이론들이 다 중용(中庸)의 다른 표현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용(中庸)적 세계의 객관적 법칙에 대한 격물치지의 과정이, 예를 들면 서양 사람들이 호미오스타시스 하나를 알기 위해 흘려야 했던 땀과 치밀한 물음의 과정이 중국 사상사에는 결여되어 있다 이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서구라파 문명에 크게 당한 겁니다.

 

여기 오른쪽을 보면 지신(知新)이라든가 도중용(道中庸), 진정미(盡精微) 같은 것이 서구 근대과학정신에 매우 잘 부합되잖아~ 근대과학정신이란 여기에서 말하는 진정미(盡精微), 다시 말해 정미(精微)로움을 다하는 세계라고. 그래 이런 말을 하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숭례(崇禮)니 이따위 말로 끝난단 말이야. 그러니까 중국 철학에서 보면 치지(致知)의 세계보다 용경(用敬)의 세계가 항상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거지! 우리 동양 문명은 이 왼쪽 용경(用敬)에 해당되는 것들은 탓할 게 없는데, 문제는 이 오른쪽 치지(致知)의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정미(精微)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양이 서양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예요. 치지(致知)를 용경(用敬)으로 환원시킨 데에 근세 유학의 최대의 오류가 있다 이겁니다. 치지(致知)는 치지(致知)로서 정미(精微)롭고 지신(知新)하는 그 세계로 나가라!! 온고(溫故)에 빠지지 말고! 이것이 바로 지금 도문학(道問學)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세기에서 참다운 치지(致知)는 서양이 제공했습니다. 치지(致知)의 실내용에 있어서 동양은 서양에 게임도 안 되요. 왕양명이 같이 바보처럼 대나무를 격물(格物)한다면서 대나무 앞에 앉아서, 칠일 밤낮이나, 그것도 아무것도 안 먹고 들여다보기만 했으니 병이 안 날 수 있어? 나는 어릴 적에 집에 현미경이 있어서 양파 껍질을 놓고, “~, 이렇게 정미로운 세계가 있구나!”하고 세포를 관찰했었는데, 적어도 이렇게 해야지, 사색만 해가지고 되겠냐구? 동양 문명에는 격물치지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어요. 여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덕(至德) 지도(至道)
형이상학적인, 본체적인, 원리적인 그 무엇 구체적인 길이자 세부적인 방법
洋洋乎 發育萬物 峻極于天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 분수(分殊)
涵養用敬 進學致知
存心 致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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