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김종직 - 상설고문진보대전발(詳說古文眞寶大全跋)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김종직 - 상설고문진보대전발(詳說古文眞寶大全跋)

건방진방랑자 2019. 2. 25. 11:03
728x90
반응형

 고문진보대전을 펴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 발문

상설고문진보대전발(詳說古文眞寶大全跋)

 

김종직(金宗直)

 

 

옥석을 구분하지 않고 수록한 문선

詩以三百篇爲祖, 文以兩漢爲宗, 聲律偶儷興而文章病焉. 蕭統以來, 類編諸家者多矣. 率皆誇富鬪博, 咸池之與激楚, 罍洗之與康瓠, 隋珠之與魚目, 俱收竝摭, 不厭其繁, 文章之病, 不暇論也.

 

문장의 정종, 고문진보의 전래

眞寶一書不然, 其採輯頗得眞西山正宗之遺法, 往往齒以近體之文, 亦不過三數篇, 不能虧損其立義之萬一. 前後三經人手, 自流入東土, 壄隱田先生首刊于合浦, 厥後繼刊于管城. 二本互有增減. 景泰初, 翰林侍讀倪先生, 將今本以遺我東方, 其詩若文, 視舊倍簁, 號爲大全.

 

고문진보가 보배로운 까닭

宋奇閑儁越之作, 會稡于是, 而騈四儷六, 排比聲律者, 雖雕繪如錦繡, 豪壯如鼓吹, 亦有所不取. 又且參之以濂溪關洛性命之說, 使後之學爲文章者, 知有所根柢焉. 嗚呼! 此其所以爲眞寶也歟.

 

고문진보를 간행하여 유포하려는 이서장의 공

然而此書不能盛行于世, 蓋鑄字隨印隨壞, 非如板本一完之後, 可恣意以印也. 前監司李相公恕長嘗慨于玆, 以傳家一帙, 囑之晉陽. 今監司吳相公伯昌繼督, 牧使柳公良判官崔侯榮, 敬承二相之志, 力調工費, 未朞月而訖功. 將見是書之流布三韓, 如菽粟布帛焉, 家儲而人誦, 競爲之則, 盛朝之文章法度, 可以淩晉, 而嫓美周漢矣. 夫如是則數君子規畫鋟梓之功, 爲如何也? 成化八年壬辰四月上澣, 奉正大夫行咸陽郡守晉州鎭兵馬同僉節制使金宗直, 謹跋. 壄隱先生逸稿卷之四

 

 

 

 

해석

 

옥석을 구분하지 않고 수록한 문선

 

詩以三百篇爲祖, 文以兩漢爲宗, 聲律偶儷興而文章病焉.

시는 시경300편으로 원조를 삼고 문장은 양한(兩漢)으로 으뜸을 삼지만, 성률聲調對句를 중시하는 四六騈驪文을 말함.과 대우, 변려문의 흥행으로 문장은 병들었다.

 

梁蕭統以來, 類編諸家者多矣.

양나라 소통(蕭統)양무제(梁 武帝)의 장자인 소명태자(昭明太子), 32세에 요절하였다. 문선(文選)을 편찬했으며, 뭇 경전을 두루 읽어 유불(儒佛)에 두루 박통하고 문예를 진흥하여 한때의 문풍(文風)을 일으켰다.문선을 지은 이래로 여러 작가들을 분류하며 편한 것이 많아졌다.

 

率皆誇富鬪博, 咸池之與激楚, 罍洗之與康瓠, 隋珠之與魚目, 俱收竝摭, 不厭其繁, 文章之病, 不暇論也.

대체로 모두 자랑하고 부섬(富贍)하며 다투고 넓힌 것으로 황제의 음악인 함지(咸池)와 비분강개한 음악인 격초(激楚), 뇌선(罍洗)뇌선(罍洗): 옛날에 제사를 지내거나 음식을 올릴 적에 손을 씻는 데 사용하는 그릇들이다. ()에 물을 담아 두고서, 이 물을 두()를 이용하여 떠서 씻는데, 씻는 데 사용한 물은 선()에 버린다.와 강호(康瓠)강호(康瓠): 질솥.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쓸모 있는 주정(周鼎)은 버려두고 깨어진 강호를 보배로 여긴다.” 하였다., 수후(隨侯)의 구슬수주(隋珠): 수후(隨侯)의 구슬이란 뜻으로, 뱀이 수후(隋侯)에게 보은(報恩)했다는 명월주(明月珠)를 말한다. 수후는 주() 나라 때 한수(漢水)의 동쪽에 자리 잡은 제후(諸侯)인데 그는 큰 뱀이 창자가 끊긴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약을 붙여 주었다. 그후 뱀이 강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은혜를 갚았으므로 그 구슬을 수후(隋侯)의 구슬이라고 이름하였다. 회남자(淮南子)』 「람명훈(覽冥訓)과 물고기 눈어목(魚目) : 고기의 눈은 구슬 같으나 구슬이 아니므로, 즉 사이비(似而非)의 가치 없는 사물을 비유한 것이다.이 수습되고 모아졌지만 번거로움을 싫어하질 않으니 문장의 병폐는 평론할 겨를도 없었다.

 

 

 

문장의 정종, 고문진보의 전래

 

眞寶一書不然, 其採輯頗得眞西山正宗之遺法, 往往齒以近體之文, 亦不過三數篇, 不能虧損其立義之萬一.

오직 고문진보한 권의 책만이 그러질 않아 매우 진서산(眞西山)서산은 남송의 성리학자 眞德秀(1178~1235)의 호이다. 자는 景元 또는 希元, 시호는 文忠이다. 朱熹의 문인 詹體仁에게 수학하여 주자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저서로 大學衍義, 文章正宗, 眞文忠公集이 있다.문장정종의 남은 법칙을 채집하여 이따금 근체의 문장에 나란히 할 만한 게 또한 2~3편에 불과하니 뜻을 세운 만 분의 일이라도 훼손될 수 없다.

 

前後三經人手, 自流入東土, 壄隱田先生首刊于合浦, 厥後繼刊于管城. 二本互有增減.

앞뒤로 사람의 손을 세 번 거쳐 절로 우리나라로 유입되었고 고려 말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 선생이 합포(合浦)에서 첫째로 간행했으며 그 후 관성(管城, 옥천)에서 계간했으니 두 판본은 서로 증감이 있다.

 

景泰初, 翰林侍讀倪先生, 將今本以遺我東方, 其詩若文, 視舊倍簁, 號爲大全.

경태(景泰)명 경종(明 景宗)의 연호로, 1450~1456년이다. 초에 한림시독 예겸(倪謙)1450(세종32) 1, 명 경종(明 景宗)의 즉위 교서를 반포하기 위해 사신으로 나온 예겸(倪謙)을 말하는데, 전후에 온 여러 칙사(勅使)들 중 학문이 높고 예의염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世宗實錄 32年 閏11』】 선생이 지금의 판본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남게 했으니 시와 문장이 옛 판본에 견주면 2~5배라서 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이라 이름 지었다.

 

 

 

고문진보가 보배로운 까닭

 

宋奇閑儁越之作, 會稡于是, 而騈四儷六, 排比聲律者, 雖雕繪如錦繡, 豪壯如鼓吹, 亦有所不取.

한나라와 진나라와 당나라와 송나라의 기이하고 한가로우며 뛰어난 작품을 여기에 모았지만 사륙변려문으로 성률(聲律)에 나누어늘여놓은 것이 비록 비단에 수놓은 듯이 조각하고 그린 것 같고 북 치고 나팔 불 듯이 호쾌하고 장엄하더라도 또한 선택하지 않은 게 있었다.

 

又且參之以濂溪關洛性命之說, 使後之學爲文章者, 知有所根柢焉.

또한 염락관민(濂溪關洛)의 성명(性命)의 설을 참조하여 후대 학자로 문장을 지는 이들에게 근본인 것을 알게 했다.

 

嗚呼! 此其所以爲眞寶也歟.

! 이것이 진짜 보배가 된 까닭이다.

 

 

 

고문진보를 간행하여 유포하려는 이서장의 공

 

然而此書不能盛行于世, 蓋鑄字隨印隨壞, 非如板本一完之後, 可恣意以印也.

그러나 이 책이 세상에 성행할 순 없었으니, 아마도 주자(鑄字)가 즉시 인쇄되었다가 즉시 파괴되어 판본이 한 번 완성한 후로 맘대로 인쇄할 수 있는 것만 못했기 때문이리라.

 

前監司李相公恕長嘗慨于玆, 以傳家一帙, 囑之晉陽.

전 감사인 상공 이서장(李恕長)이 일찍이 이것을 개탄하여 집에 전해져 온 한 질을 진양(晉陽, 진주)에 주었다.

 

今監司吳相公伯昌繼督, 牧使柳公良判官崔侯榮, 敬承二相之志, 力調工費, 未朞月而訖功.

지금 감사인 상공 오백창(吳伯昌)이 이어 감독했고 목사 유량(柳良)과 판관 최영(崔榮) 두 상공의 뜻을 공경히 계승해 힘껏 장인의 비용을 갖추어 1년도 안 되어 작업을 끝마쳤다.

 

將見是書之流布三韓, 如菽粟布帛焉, 家儲而人誦, 競爲之則, 盛朝之文章法度, 可以淩晉, 而嫓美周漢矣.

장차 이 책을 우리나라[三韓]에 유포함에 보니 필수품인 곡식과 포와 비단 같아 집에 저장하고 사람들이 외우길 경쟁하니 융성한 조정의 문장과 법도가 진나라와 당나라와 송나라를 능가하여 주나라와 한나라의 아름다움에 필적할 만했다.

 

夫如是則數君子規畫鋟梓之功, 爲如何也?

대체로 이와 같았으니 여러 군자들이 계획하여[規畫] 나무판에 글자를 새긴[鋟梓] 공이 어떠했겠는가?

 

成化八年壬辰四月上澣, 奉正大夫行咸陽郡守晉州鎭兵馬同僉節制使金宗直, 謹跋. 壄隱先生逸稿卷之四

성화(成化) 8년 임진(1472, 성종3) 4월 상한(上澣, 초순)에 봉정대부(奉正大夫) 겸 함양군수(咸陽郡守) 겸 진주진병마동첨절제사(晉州鎭兵馬同僉節制使) 김종직(金宗直)이 삼가 발문을 쓴다.

 

 

인용

작가

14B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