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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뒷골목의 등불 - 1. 사흘을 굶고 머슴과 친해진 연암 본문

책/한문(漢文)

뒷골목의 등불 - 1. 사흘을 굶고 머슴과 친해진 연암

건방진방랑자 2020. 4. 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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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흘을 굶고 머슴과 친해진 연암

 

 

윗글은 제자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연암 댁을 방문했던 일을 적은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란 소품 산문이다. 여기에는 연암이 사흘 굶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가난이 선비의 다반사라지만, 그 높은 뜻에 안쓰런 궁핍이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5월 그믐에 서편 이웃으로부터 걸어 연암 어른 댁을 찾았다. 때마침 희미한 구름은 하늘에 걸렸고, 숲속에 걸린 달은 푸르스름하였다. 종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은은하더니 나중엔 둥둥 점차 커지는 것이 마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어른이 댁에 계실까 생각하면서 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먼저 그 집 들창을 살펴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季夏之弦, 步自西隣, 訪燕巖丈人. 時微雲在天, 林月蒼翳. 鍾聲初起, 其始也殷殷, 其終也泛泛, 若水漚之方散. 意以爲丈人在家否, 入其巷, 先覘其牖, 燈照焉.

그럼에도 이 글의 첫 단락은 알 수 없는 흥취와 절묘한 리듬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그믐날 저녁 무렵이다. 희미한 녈구름은 하늘 위로 한가로이 떠가고, 아직 숲을 벗어나지 못한 으스름 달빛은 푸르스름한 제 빛을 흐는히 흘리고 있다. 한낮의 더위도 한 소금 물러나 제법 선선해진 시간이다. 이 양반이 서울에 올라 오셨다는데 정말 댁에 계실까? 걸음걸이가 저도 몰래 바빠진다. 그때 마침 멀리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은은하게 멀리서 한 차례 울리는가 싶더니만, 연거푸 둥둥 울리자 종소리는 점점 긴 여운을 남긴다. 마치 물방울이 수면 아래서부터 보글보글 퍼지면서 올라오는 것만 같다.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그려낸 절묘한 포착이다.

종소리의 간격이 잦아들수록 그의 걸음걸이도 자꾸 더 빨라진다. 혹 이 어른이 댁에 안 계시면 어찌 하나? 그믐밤의 어두운 길을 혼자 터덜거리며 되돌아가기는 싫다. 바쁜 걸음이 골목으로 접어든다. 선생 집 들창 쪽으로 눈길이 먼저 달려간다. 불이 켜 있다. ! 계셨구나. ‘등조언燈照焉’, ‘불이 켜 있다!’ 그 한 마디 표현 속에 담긴 그의 반가움과 안도를 나는 느낄 수가 있다.

 

 

그 문으로 들어섰다.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 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내가 온 것을 보시더니 옷을 고쳐 입고 앉으시고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듣고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入其門, 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見余至, 遂整衣坐, 劇談古今治亂及當世文章名論之派別同異, 余聞而甚奇之也.

그리고는 선생이 사흘째 굶고 계셨다는 이야기, 맨 발 맨 상투로 창턱에 다리를 척 걸쳐 얹고서 곁방 아랫것과 말씀을 나누고 있더란 이야기, 그러더니 마치 좀 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꿰뚫어 말씀하시더란 이야기를 적었다. 앞쪽의 사흘 굶은 가난과 맨 발 맨 상투의 풀어진 자세 때문에 뒤쪽의 해박한 경륜이 더 낙차 있게 다가온다. 요컨대 그는 그 해박한 경륜을 어디에도 펼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사흘을 굶고 머슴과 친해진 연암

2. 켜진 촛불 속 희망과 꺼진 촛불 속 절망

3. 연암협에 살던 연암이 서울로 온 이유

4. 연암의 호기로움

5. 기백이 시들어 뜻마저 재처럼 식다

5-1. 총평

6. 한 끼 때우려던 바람이 벼락에 사라지다

7. 한 인물에 대한 극단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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