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크릿 선샤인?
밀양을 쓰게 된 이유
신애: 아저씨,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종찬: 뜻요? 뭐 우리가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
신애: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종찬: 비밀의 햇볕, 좋네예.
영화 초반,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이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대사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 왜 하필 밀양일까도 궁금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풀이하고 번역할 줄이야. ‘비밀의 태양’이라? 모르긴 해도, 밀양에서 이런 이미지나 기호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굳이 찾는다면, ‘밀양아리라’, 그리고 소박한 전원풍경 등의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 그러고 보면 이창동 감독은 이런 식의 낯익은 표상을 전복하기 위해 부러 밀양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대표작 <초록물고기>가 그렇듯이, ‘비밀의 태양’ 역시 형용모순이다. 태양이 비밀스럽다니? 태양 너머에 뭔가가 숨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태양 자체가 비밀이라는 뜻인가? 언어도단!
애초 이 장에는 <초록물고기>를 쓸 작정이었다. 실제로 연구실에서 강의를 할 때는 <초록물고기>로 강의안을 작성했었다. 헌데, 그 와중에 <밀양>이 나와‘버렸다’. 이창동 감독이 간만에 만든 작품인 데다 개봉 직전, 주인공 신애 역을 맡은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타는 쾌거를 올렸다. 과연(!) 이창동 감독의 뚝심은 놀라웠다. <밀양>은 <초록물고기>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관객의 기대나 정서를 눈곱만치도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너무나 불친절한’ 작품. 결국 나는 이 장을 <밀양>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군데군데 <초록물고기>를 끌어들여 <밀양>의 비밀을 푸는 ‘보조키’로 쓸 작정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영화
관객들은 실로 당혹스러웠으리라.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더더욱.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카리스마, 그리고 국제영화제 수상이라는 권위 때문에 보긴 봐야 하는데, 그리고 적당히 감동을 받을 준비도 되어 있는데, 도무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으리라. 주인공인 전도연조차 영화의 주제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을 정도니까. 뭐, 그렇다고 이 작품이 미스터리 심리극이나 심오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영화에 속하는 건 결코 아니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참으로 평범하다. 주제도 ‘가족’이다. 가족, 그 얼마나 진부한 테마인가.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유괴사건’도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그 자체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현상이 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도 유괴, 납치, 살해사건이 온 매스컴을 도배하고 있다. (맙소사!)
그런데 난해하다고? 아마도 그것은 내용 자체에 있다기보다 내용을 다루는 감독의 독특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즉, 이창동 감독의 시선은 가족 자체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욕망의 판타지와 그 근원적 불가능성을 좇고 있다. 일찍이 <초록물고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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