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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2.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간 까닭은? 본문

연재/시네필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2.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간 까닭은?

건방진방랑자 2020. 2. 27.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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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간 까닭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오다

 

신애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아들 준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녀와 밀양 사이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밀양은 처음이에요. 살러 왔어요.”

 

실제로 한 번도 와 본 적조차 없다. 그런데 살러 왔다고? 이런 무모한! 대체 무슨 심사로? 그녀가 밀양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남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괴범이 된 웅변학원 원장에게 하는 말.

 

그냥 밀양이 좋아서 살러 온 거예요. 애 아빠 고향이기도 하구요.... 애 아빠가 평소에 늘 밀양 내려와서 살고 싶다고 노래 불렀었거든요.”

 

, 밀양은 남편의 고향이자 꿈이었고, 과거이자 미래였던 곳이다. 따라서 신애가 밀양으로 온 건 남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림으로써 남편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의 발로다. 오호! 그렇다면, 자신의 고향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 낯선 고장으로 이주를 감행할 정도로 남편과의 유대가 지극했던 것일까?

 

 

남동생: 나 솔직히 누나 이해 못하겠어.... 매형, 누나 배신하고 딴 여자랑 바람났었잖아.

신애: 아냐, 임마. 준이 아빠는 우리 준이랑 나만 사랑했어.

 

 

그렇다. 그녀의 남편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요컨대, 그녀가 꿈꾸던 사랑과 행복은 산산이 부서져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신애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그녀의 삶은 남편과 아이와 자기로 이루어진 스위트 홈이라는 표상에 완전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의 배신과 죽음 뒤에 그녀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끈은 밀양이라는 장소뿐이었던 게다.

 

, 서울이 싫어. 여기가 좋아. 여기가 왜 좋은지 아니?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여기서 새로 시작할 거야.”

 

서울이 아니라, 왜 밀양인가? 서울에는 자신이 배반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양에선 그 기억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 동시에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새로운 판타지를 구축할 수 있다. 그녀가 가족들한테도 알리지 않고 무작정 밀양행을 택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욕망의 원초적 대지

 

그런 점에서 신애는 <초록물고기>의 막동이와 동일한 욕망의 배치 속에 있다. 막동이는 서울 변두리지만 버드나무가 있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꿈과 욕망은 딱 이 시기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군에서 제대하고 사회로 복귀했을 때, 그의 고향과 가족들은 더 이상 거기에있지 않았다. 일산 신도시 건설로 주변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소박하고 정감 어렸던 그의 집은 졸지에 삭막한 판잣집으로 전락해 버렸다. 동시에 그의 가족들 간의 유대 역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엄마는 파출부를 뛰고, 첫째 성은 뇌성마비, 경찰인 둘째 성은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셋째 성은 계란 트럭장사, 여동생은 다방 종업원. 이들 사이엔 이제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하다. 막동이는 둘째 성에게 말한다.

 

우리 식구들 전부 같이 모여 살면 안 될까? 옛날같이.”

 

둘째 성은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 같이 살면서 같이 돈도 벌면 좋잖아? 공장을 하든지 식당을 하든지.”

 

막동이의 욕망은 여전히 가족의 영토 안에 묶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대지에 대한 허망한 꿈일 뿐.

막동이한테는 유년기가 고향이라면, 신애에겐 밀양이 고향이다. 전자에겐 고향이 시간성을 지닌다면, 후자에겐 장소성을 갖는다. 그녀에게 서울은 절대 고향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꿈과 추억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건대, 고향을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보는 건 실로 피상적이다. 근본적으로 고향은 욕망이 귀환할 수 있는 거처 혹은 욕망의 원초적 대지를 말한다. 그리고 이때 욕망은 기억을 통해 작동한다. 신애에게 그 기억은 남편에 대한 것이 전부다. 고작 이 정도가 어떻게 그녀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기억이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주체가 얼마만큼 거기에 의존하는가, 곧 중력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막동이와 신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막동이는 기억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지만, 신애에게는 그 구체성이 없다. , 신애에게 고향의 판타지란 전적으로 외부, 곧 남편으로부터 주입된 표상일 뿐이다. 말하자면, 막동이보다도 삶과 욕망 사이의 간극이 더 한층 벌어진 셈이다. 그래서 더 위태롭다. 그 간극만큼의 고뇌와 번민을 짊어져야 하니까.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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